환대와 변화,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

– 독일, 오스트리아 농민의 제2의 다리

아름다운 문화경관은 농민이 있어 가능하다.
아름다운 문화경관은 농민이 있어 가능하다.

글·사진 신수경 편집장

2022년 5월, 드디어 유럽으로 가는 문이 다시 열렸다. ‘미래가 있는 농촌, 지속 가능한 농업’ 연수를 재개하면서,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온 세계가 왕래와 교류를 멈추었던 3년 동안 어떠한 변화가 있을까 궁금했다. 어쩌면 “700년 전 죽은 늙은이가 다시 와서 자기 집을 찾을 것”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전통을 중시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생각했을 때 여전하지 않을까.
  11일간 독일 베를린에서 시작해 라이프치히를 거쳐 남부 바이에른주의 여러 곳, 오스트리아 티롤 지역과 스위스의 아펜젤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약 2400㎞를 달렸다. 이번 연수의 키워드는 환대, 그리고 변화다. 우리가 만난 농민들은 몇 년 만에 먼 나라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환대했다. 워낙 친절하고 인심 좋던 농가는 물론이고, 항상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찾았던 카를스루에 클라인가르텐 단지에서도 소박하고 따뜻한 환영식을 열어 주었다.

카를스루에 클라인가르텐 단지 회원들의 환영 인사.
카를스루에 클라인가르텐 단지 회원들의 환영 인사.

  한편, 본격적인 농업 후계 경영이 이루어지는 농가를 많이 만났다. 부모 세대가 ‘농업으로 농촌에서 지속 가능한’ 삶에 만족하고 농의 철학을 담은 삶의 방식을 지키려는 경향이 많이 보였다면(그런 모습에 감동하곤 했지만), 농장을 물려받은 아들은 농사의 적정 규모를 키우고, 현대적 시설과 기계화 투자 등으로 노동력을 줄이는, 효율적인 경영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바이에른주 농림부에서는 EU 농업정책의 변화를 확인했다. 2023년부터 시행될 EU의 공동농업정책(CAP) 정책에서는 면적에 비례하여 지급하는 직불금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면서 소농 지원금을 면적에 반비례하여 추가 지급하고, 청년농업인(승계농)에게는 최대 120ha까지 5년간 ha당 134유로를 고정으로 지급하는 등 소농과 청년 농업인 지원을 더욱 강화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또한, 제1축 직불금의 예산을 제2축인 농촌개발에 이전하여 환경 개선 및 보전 의무 강화에 더욱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정책이 변화되었다. 이에 따라 유기농업에 대한 지원도 커졌다. 독일은 2030년까지 유기농 비율을 30%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정책의 변화는 현장에서 만난 농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한 농민들의 부가가치 창출을 뜻하는 제2, 제3의 다리도 계속 다양화되고, 상생과 협력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원칙을 지키면 단점이 사라진다
생물보전지역의 농업, 크리스토퍼 젠슬러
독일 헤센주 생물보전지역 뢴Rhön. 생물보전지역은 인간이 훼손해 놓은 지역을 다시 복원하여 그대로 보존하는 곳으로, 핵심지역과 완충 지역으로 나뉜다. 핵심지역은 전혀 손대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곳. 원시림 같은 곳이다. 핵심지역에서 벗어난 완충 지역에서는 농민이 농사를 지으면서 경관을 관리한다.
  “농민이 없으면 숲이 우거지고 덤불로 변해요. 경관이 훼손되죠. 나라가 농민에게 국토 관리를 맡기는 겁니다.”

생물보전지역에서 유기농사를 짓는 젠슬러 씨.
생물보전지역에서 유기농사를 짓는 젠슬러 씨.

크리스토퍼 젠슬러Christof Gensler 씨는 1986년 부친의 농장을 승계한 뒤, 1998년 유기농으로 완전히 전환하고 현재는 총 33ha의 산림과 목초지, 경작지에서 소 20마리를 키우며 유기 농사를 짓고 있다. 일반 농사보다 보조금을 더 받지만, 농사만으로는 살기 어려워 재배한 밀로 빵을 만들고, 농장 내 로컬푸드 매장과 식당을 운영하며, 숙박업을 하면서 농업을 지속해간다.
  생물보전지역이라 농사를 짓는 데 더 제약이 많다. 농약은 물론이고 기계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으며, 기르는 가축이 환경을 변형시키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이 차별성과 프리미엄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젠슬러 씨는 이것을 “원칙을 지키다 보면 단점이 사라진다”라고 표현했다.

농사로만 먹고살 수 없는 농민들은 숙박, 체험, 식당 등 제2의 다리를 갖는다
농사로만 먹고살 수 없는 농민들은 숙박, 체험, 식당 등 제2의 다리를 갖는다.

  “생물보전지역에서 나온 농산물은 건강하고 책임 있는 농산물이라는 인식 덕분에 좋은 가격을 받아요. 또 이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식당 등이 활성화되고 관련 산업도 커지면서 활성화되고 있어요. 소비자들은 이곳을 방문하고 농산물을 소비하면서, 생물보전지역을 돕고 있다는 자부심도 느끼게 됩니다.”
  1991년 이 지역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자, 젠슬러 씨는 바로 지역민과 협력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이 지역을 지키며 사람들과 같이 살 방법을 찾았습니다. 보조금을 받지 않는 지역민은 (이렇게 제약이 많은 곳에서) 어떻게 살죠?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공동 프로젝트를 운영했어요. 지역에 맞는 방법을 찾고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이익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이날 우리는 농장에서 뢴 지역에서 생산한 고기와 채소, 감자 등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음식 하나하나가 귀하게 느껴졌다. 가치를 공감하게 하는, 노력의 힘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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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이 모델이 되다
낙농 지대 유일한 과수농가, 피터 리더탄너 씨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알고이 지역. 해발 720m, 연평균 기온 7℃, 연 강수량 1200mm, 겨울이 길다. 다른 농사를 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전통적인 낙농업 지대다. 이 지역에서 80ha 규모로 딸기, 베리류, 자두, 사과 등 다양한 과채류 농사를 짓고 있는 피터 리더탄너Piter Niederthanner 씨. 1993년 농장을 이어받으면서 딸기와 각종 베리류를 재배했고, 2002년 사과로 확장하면서 2011년에는 낙농업을 완전히 접었다.

피터 리더탄너 씨는 전통적인 낙농지대에서 과수농사를 지으며 유통구조를 확 바꿨다.
피터 리더탄너 씨는 전통적인 낙농지대에서 과수농사를 지으며 유통구조를 확 바꿨다.

  “주변에서 미쳤다고 했어요. (농사가) 된다고 해도 수익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죠.”
주변의 만류에도 그가 개척자의 마음으로 ‘모험’을 감행한 것은 농민들끼리 경쟁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농민에게 이익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기존의 유통구조를 확 바꾸었다.
  피터 씨의 유통판로는 크게 세 가지인데, 농장 내 직판장Farm Shop에서 직판하고 주 2회 농민 시장에 나가는 것, 그리고 소비자가 직접 수확해가는 방식이다. 지난해 직판장을 확대해 지역 농민의 농산물을 함께 팔고, 만남과 쉼을 위한 카페 공간 등을 새롭게 열었다.

5월, 딸기를 첫 수확했다며 연수단에 선물로 주었다. 피 터(왼쪽)와 아들 마틴.
5월, 딸기를 첫 수확했다며 연수단에 선물로 주었다. 피터(왼쪽)와 아들 마틴.

  사과농장을 둘러보면서 유기농으로 재배하는지 묻자, 피터 씨는 “유기농은 아니지만, 친환경 제제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유기농을 하면 좋지만, 작물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죠. 유기농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농업을 포기할 수 없어요.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해서 적정한 가격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해 빈부 격차 없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농민의 역할”이라고 답했다. 그의 농업 철학이 잘 드러나는 말이었다.
  ‘모험’이 ‘모델’이 된 라이자흐 농장. 피터 씨는 일찌감치 농업학교를 졸업한 아들 마틴에게 농장 경영을 물려 주고, 본인은 선임 매니저로 농장 일을 돕는다. ‘독일 농민에게 가장 큰 기쁨은 후계농이 있다는 것’이라는 말을 입증하듯, 개척자의 이모작 인생은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

 

은퇴한 부모님은 농장의 보배
오스트리아 최고의 빵을 만드는 농부
또 하나의 농가는 오스트리아 티롤주에 있는 소농. 피르흐너 농가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궁금했던 곳이기도 했다. 원래는 현재 농장주인 발터 클라이들 2세Walter Kreidle Sr의 4대조가 1910년부터 농사를 지어왔던 18세기 가옥에서 계속 농사를 지어오다가 2014년부터 이전계획을 세웠다. 농장이 마을 가운데에 있어서 소를 방목하는 데 불편해서였다. 2019년부터 약 14개월간 공사를 해 2020년 9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농지 규모는 7.5ha 그대로 유지하면서 농장의 시설을 현대적으로 설비하고, 예전 오래된 외양간을 개조해서 쓰던 양계장을 현대적 시스템으로 신축해 닭의 수를 300마리로 늘리기도 했다. 농장 내 판매장도 새롭게 단장했다. 농장에서 나는 다양한 농산물로 술과 잼, 가공품을 판매하고 지역 농민의 제품도 함께 판매한다. 빵을 굽는 매주 금요일에만 매장 문을 열지만, 매일 나오는 250개의 달걀을 신선하게 공급하기 위해 무인 판매대를 운영하고 있다.

이전하기 전 피르흐너 농가. 18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이전하기 전 피르흐너 농가. 18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새롭게 이전한 피르흐너 농가.
새롭게 이전한 피르흐너 농가.

  우리가 방문한 5월은 소가 겨우내 먹을 건초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인 농번기였다. 클라이들 부자는 인사를 건넨 후 초지로 나갔고, 발터 클라이들 2세의 어머니인 다정하고 명랑한 아그네스Agnes Kreidle 씨가 농장과 텃밭, 집까지 안내해 주었다. 2019년 방문 시 농장 이전을 무척 서운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다행히 표정이 밝아 보였다. 농장을 이전하면서 예전의 것들을 버리기 아까워 바닥을 가져와 벽에 붙이고, 목수인 사돈의 도움으로 만든 멋진 수납장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옛날 것들을 새집에 함께 둘 수 있어 아쉬움을 달랜다”라고 했다.
  2019년에 농업 마이스터 과정을 마치고 최종 논문을 제출한 상태라며 살짝 긴장해 있었던 농장주 발터 클라이들 2세는 무난히 시험에 합격하여 전문 농업인이 되었고, 약 80만 유로(약 10억 원)를 대출받아 농장을 확대, 현대화했다.
  “얘야, 내 생전에 대출금을 다 갚는 걸 봤으면 좋겠구나, 했더니 아들이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하더라고요.”

발터 클라이들 2세는 더 효율적인 농가경영을 계획한다.
발터 클라이들 2세는 더 효율적인 농가경영을 계획한다.
농업경영에서 은퇴한 클라이들 부부
농업경영에서 은퇴한 클라이들 부부.

  아그네스의 말속에서 든든하고 고마운 마음과 걱정이 함께 보였다. 오스트리아 ‘맛의 왕관’ 경진대회에서 ‘농부 빵’으로 10회 이상 최고상을 받았지만, 자신이 농사지은 밀로만, 정해진 만큼만 빵을 만드는 것에 만족한다고 웃던 예전의 모습이 겹쳐졌다.
  발터 클라이들 2세는 직접 재배한 밀 뿐 아니라 주변 농가의 밀을 수매해 빵 생산을 늘리고, 치즈 가공 등 부가가치를 더 높이겠다는 계획을 지니고 있다. 이제는 한 발짝 물러나 아들의 선택을 지지하고 돕는 클라이들 씨 부부, “은퇴한 부모님은 농장의 보배”라던 클라이들 2세,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이 새집에서 오래된 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던 모습과 닮아있었다.

피르흐너 농가.

캡

변하지 않는 것
3년 동안 여전한 것도, 또 달라진 것도 있었다. 듀얼시스템을 자랑하는 켐프텐농업직업학교의 교육 내용과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가는 지역공동체와 농업을 통한 치유와 교육, 플라스틱 쓰레기를 만들지 않겠다는 사회적 연대, 진정한 시민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하는 클라인 가르텐 등 달라진 모습을 쉽게 만났다.
  한편, 변하지 않는 가치도 확인했다. “농민은 보조금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하고 있다”라는 농업정책관의 말처럼,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작품이 되는 아름다운 문화경관은 농민이 있어 유지된다는 명백한 사실. 더불어 농촌공동체가 지속하는 비결은 주민의 주도적인 의지와 참여, 공동의 목표를 위한 협력과 연대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