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농민에게 “속박이”를 허하라

우리 동네 할머니들은 호미 귀신은 한 번 붙으면 절대 안 떨어진다고들 하신다. 농사에 한 번 맛을 들이면 영영 끊을 수 없단 말씀이다. 호미 귀신의 흔적은 도심에서도 발견된다. 조그만 땅이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대파나 상추, 고추 따위가 심어져 있고, 아예 시멘트나 벽돌, 아스콘 등이 흙을 남김없이 뒤덮어버린 데라도 커다란 화분이 조각 밭을 대신해 서 있다. 때맞춰 씨앗을 뿌리고 정성 들여 가꾸며 돌봐주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거둬들여서 날름 먹어치우는 그 맛은 매우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이 일은 인류에게 아주 익숙하고 오랜 것이다. 최소한 1만여 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살아가는 데,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일에는 다 쾌감이 따른다. 유전자의 농간일 것이다. 밥을 먹거나 똥을 눌 때 쾌감이 따르는 것처럼 농사에도 쾌감이 스며있다.

소비자가 원하는 농산물, 나 먹을 농사처럼 짓기 어렵다
내다 팔 농사 말고 내가 먹을 농사는 순전히 재미로 하는 농사다. 돈 버는 농사짓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텃밭에는 먹을 것들로 그득하다. 대파, 쪽파에 아욱, 근대, 오이에 풋고추, 열무, 당근, 배추, 강낭콩, 완두콩, 쑥갓, 옥수수, 감자, 고구마에 마늘, 참깨, 들깨 등등 어느 집이나 어김없이 때맞춰 키워내는 제철 농산물들이다. 내가 먹을 농사는 내가 먹을 농사라서 마음이 가볍고 편하다. 일부러 불을 때 가며 수확 시기를 앞당길 이유가 전혀 없다. 오이나 풋고추가 구부러지면 어떻고 벌레 먹으면 어떠하며, 옥수수자루가 작아도 상관없고 배춧속이 조금 덜 차도 아무 문제없다. 오히려 더 맛있다. 겉모습은 문제될 게 없다. 그저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중요하다. 맛? 갓 수확한 신선한 제철 농산물은 무조건 다 맛있다.
우습게도 농민들이 자기 먹을 텃밭 가꾸는 것도 흉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농민이 자기 먹을 농사에는 농약도 안 치고 무농약으로, 유기농으로 해먹으면서 내다 팔 농산물에만 농약을 팍팍 쳐댄다는 비난인데,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세상에 독한 농약이나 제초제 치는 걸 좋아하는 농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약줄 들고 약 한 번 치고 나면 황소 같은 장정들도 다리가 휘청, 허적이는데 그게 무슨 고약한 소리인가 말이다. 전에 만난 어떤 농학과 교수는 관행 농업을 옹호하고 생산성 떨어지는 유기농업을 비판하면서 농약은 보약이라고 강변했다. 나이 많은 분 면전에 대고 쓴 소리 하기는 좀 그래서 꿀꺽 삼키고 말았지만, 한여름에 1,000평쯤 되는 비가림 하우스에 들어가서 혼자서 약줄 끌어가면서 살충제를 한 번이라도 쳐 본적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남 먹이는 농사는 내 먹는 농사처럼 짓기 어렵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걸 만들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정해놓은 마음속 기준, 그러니까 소비자들의 기
대치에 못 미치는 농산물은 터무니없이 싼 값을 받든지 폐기해야 한다. 일반적으
로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하고 모양이 반듯하고 예쁜 걸 좋아한다. 물론 농사 짓
는 나도 그렇다.

남 먹이는 농사는 내 먹는 농사처럼 짓기 어렵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걸 만들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정해놓은 마음속 기준, 그러니까 소비자들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농산물은 터무니없이 싼 값을 받든지 폐기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하고 모양이 반듯하고 예쁜걸 좋아한다. 물론 농사짓는 나도 그렇다.
말할 것도 없이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농산물이 좋은 농산물이다. 그래서 모든 농산물은 크기와 모양에 따라 좋고 나쁨이 정해지고 매겨진 등급에 따라 가격이 정해진다. 가격은 농민이 아니라 도매상인이 정한다. 도매상인은 비싸게 쉽게 팔 수 있는 농산물에 후한 값을 줄 테고, 그렇지 않으면 값을 싸게 줄 것이다. 도매상인은 소매상인의 눈치를 살피고, 소매상인은 소비자를 의식한다. 농산물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최종 지배자는 결국 소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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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와 모양에 따라 좋고 나쁨이 정해지고, 그 등급에 따라 가격이 정해진다.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친환경 농산물은 환영받지 못한다.
크기와 모양에 따라 좋고 나쁨이 정해지고, 그 등급에 따라 가격이 정해진다.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친환경 농산물은 환영받지 못한다.

‘특’품을 위한 고투입 농업
농산물 등급 간의 가격차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최고 등급을 ‘특’, 다음 등급을 “상”이라 하면, 상품의 가격은 심할 경우 특품 가격의 20~10% 수준까지도 내려간다. 선별이 고르지 않으면, 이를테면 특품 속에 상품이 섞여 있으면 상품으로 취급한다. 농민들은 그러니 자기가 생산한 농산물을, 소비자들의 대리인인 시장 상인이 원하는 바에 따라 대단히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선별할 수밖에 없다. 고투입 농사는 여기서 비롯한다.

유기농업 운동 혹은 친환경 농업 운동은 이와 같은 구조에 대한 대안으로 출발했
다. 농민과 도시민이 서로 만나 얼굴을 익혀, 우리가 남이 아님을 확인하고, 이제
도시민과 농민이 서로 남이 아니니까 남 먹이는 농사 말고 내가 먹는 농사를 넉넉
하게 지어서 나누어 먹자는 뜻이었다.

농민들 입장에서 보면 ‘특’품을 많이 출하해야 소득을 올릴 수 있다. 특품을 많이 출하하려면 방법이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경작 면적을 늘리는 것(규모화 전략이라 하자)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면적에서 특품의 출현비율을 높이는 것(전문화 전략이라 하자)이다. 단순히 수치로만 따지자면, 농민 한 사람이 경작 면적을 두 배로 늘리려면 농민이 2분지 1로 줄어들어야 가능하다. 농민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줄어들 리 없다. 게다가 땅값도 비싸다. 그래서 농민 입장에서 볼 때 규모화 전략은 시행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전문화 전략이 만만하다. 예를 들어 감자의 경우, 상당히 비옥한 토양에서도 화학비료 없이 퇴비나 유기질 비료만 가지고 농사를 지어보면 알이 굵고 모양이 반듯한 특품(관행 농산물의 ‘상’품 정도에 해당하겠다)의 출현율은 30% 이하다. 그런데 만일 ‘특’품의 출현 비율을 60%, 90%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농지를 두 배, 세 배 늘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먹을거리가 남아돌아 하루가 멀다고 한 해도 빠짐없이 농산물 값 폭락 파동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고투입이 중단 없이 계속된다.
가까이에 밀식된 개별 작물이 모두 특정한 모양을 갖추고 일정한 크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서로 양분경합을 해서는 안 된다. 경합이 일단 발생하면 고르게 크지 않는다. 작물이 모두 고르게 크려면 각자 필요한 만큼 충분한 양의 식사를 아주 편안하고 느긋하게 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작물을 위한 밥상이 늘 잘 차려져 있어야 한다. 농사짓는 농민이라면 이치가 이렇다는 걸 누구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단위면적당 비료 사용량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지나친 양분 섭취는 작물을 허약하게 만든다. 그러니 병원균이나 해충으로부터 작물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살균제, 살충제를 주기적으로 살포하는 수밖에 없다.

농약의 가장 큰 피해자는 농민이다
요즘은 세련된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기도 하지만, 보통 아직은 농민이 농약을 온몸으로 숨 쉬고 적시면서 논밭에 뿌린다. 농약 피해를 누군가 문제 삼는다면 농민이 가장 큰 피해자이자 일차 피해자란 점을 먼저 말해야 한다. 친환경 농업과 관련한 논의에서 이 점이 늘 간과된다. 나는 친환경 농업과 관련한 논의에서 농민이 간과되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 친환경 농업이 전면화되면 누구보다 먼저 농민이 농약을 뿌리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가장 큰 수혜자는 농민이 된다. 그다음으로 아주 잠재적인 피해자가 소비자다. 만에 하나 농작물에 잔류 농약이 기준치를 넘어서면 소비자가 피해를 볼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은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지만 늘 가능성은 있다. 소비자는 농민에 비하면 이차적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간과하면 안 될 피해자가 자연이다. 우리 인간이 자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서 아주 느리게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어서 가장 덜 고려되기 쉬운 특성이 있다. 그렇지만, 자연 생태계에 문제가 만일 발생하면 그 피해의 범위가 지역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이고, 그 피해의 정도가 감히 인간 따위의 힘으로는 도저히 돌이키거나 상쇄할 수 없을 정도의 가공할 만한 것이 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인간이 자연에 끼치는 피해는 두렵고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새나 벌이 멸종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면 된다. 물을 먹기 위해 논에 들렀다가 제초제가 뿌려진 논물을 먹고 객사하는 벌을 볼 때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상상을 하게 된다. 벌이 없어지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어떤 사태가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벌이 없어짐으로써 발생하는 피해에 비한다면 중국에서 몰려오는 대책 없는 미세먼지는 그저 애교에 불과한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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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균이나 해충으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 살균제, 살충제를 사용한다. 이 농약의 가장 큰 피해자는 농민이다.
병원균이나 해충으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 살균제, 살충제를 사용한다. 이 농약의 가장 큰 피해자는 농민이다.

우리는 남이 아니니 내가 먹는 농사를 지어 나눠 먹자
모양과 크기로 농산물의 등급을 판정하고 등급 간에 엄청나게 큰 값의 차등을 두어서 농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별을 엄격하게 하도록 강제하는 이런 농산물 유통 구조(이른바 규격화)는, 무엇보다 자원을 낭비하는 구조이고, 농민이나 소비자나 자연 생태계 모두에게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구조라고 보기 어렵다.
유기농업 운동 혹은 친환경 농업 운동은 이와 같은 구조에 대한 대안으로 출발했다. 농민과 도시민이 서로 만나 얼굴을 익혀, 우리가 남이 아님을 확인하고, 이제 도시민과 농민이 서로 남이 아니니까 남 먹이는 농사 말고 내가 먹는 농사를 넉넉하게 지어서 나누어 먹자는 뜻이었다. 말이 그렇지 비료 대신 퇴비를 만들어 쓴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20kg 요소비료 한포만큼의 양분을 땅에 넣어주기 위해서는 300kg~500kg 정도의 퇴비를 내야 한다. 바람 불기 전 새벽 나절 두어 시간 제초제 뿌리면 될 일을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기약도 없이 김을 매고 또 매야 한다. 그렇게 농사를 짓고 그렇게 나누어 먹던 시절이 있었다. 유기농산물 나눔을 하던 농민이나 도시민이나 할 것 없이 그 시절의 꿈은 “어디서나 누구라도 유기농산물을 사 먹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날이 왔다.
한편으로 친환경 농사를 짓는 농가가 엄청나게 많아졌고, 시장도 그만큼 넓어졌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40년, 짧게 잡으면 15년 만에 이제 누구라도 친환경 농산물을 먹고자 하면 가까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농민들도 정말 편하게 친환경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오리나 우렁이를 이용해서 논 제초문제를 해결해버렸다. 밭은 제초매트가 보급되면서 제초문제가 상당히 해결되었다. 유기질비료가 넉넉하게 투입되고 병해충은 유기농 농약이나 각종 유기농자재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친환경 농산물 가격도 전혀 오르지 않은 채로 10여 년이 지나면서 소비자들이 구입하기에 그리 비싸지 않은 수준으로 하향 안정되었다. 이런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망스런 부분도 있다. 친환경 농산물의 소비량보다 생산량이 많아 소비되지 않고 적체되다가 폐기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친환경 농산물에 대해서는 출하가 거부되기도 한다. 연대와 협력을 목표로 설립된 여러 조합이 서로 경쟁하면서,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편으로 농민에게 농산물 가격 인하를 강요하기도 한다. 어떤 조합은 필요량보다 서너배나 많은 양만큼 농민들과 구두계약을 한 후에, 작황이 좋을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기도 한다. 친환경 농산물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생산자인 농민과 소비자인 도시민 사이의 힘의 균형이 무너져버렸다. 과잉공급 시장에서 우세한 쪽은 당연히 소비자다. 대형 도매시장이 생기기 전, 유통상인과 농민 사이의 일방적인 관계가 지금 다시 친환경 농산물 시장에서 재현되는 것 아닌가 싶은 조바심이 생길 때도 있다. 친환경 농산물 시장에서 갑인 유통자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갑질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익숙한 구조의 반복이다. 친환경 농업 역시 규모화 전략, 전문화 전략, 규격화 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래서는 대안代案이라 할 것도 없고, 더 이상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도 없다. 뜻은 어디로 가버리고 형식만 남았다고 강하게 비판할 수도 있다.

유기농업이나 친환경 농업을 시작했던 뜻은 살리고, 생산과 소비의 저변은 더욱
넓힐 수 있는 좋은 방법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다. 농업 예산의 절반을 뚝 잘라서
빈곤층에게 먹을거리 사 먹을 돈으로 제공하는 미국의 예를 본받아서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에게 친환경 농산물 구매 카드를 제공하는 등의 특별한 제도를 도입하
자는 제안을 해 볼 수도 있을 테고,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해서 (미덥지 않은)
소비자 대신 정부가 농민의 생계를 책임지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비자여, 속박이를 열렬히 환영하라
애초 유기농업이나 친환경 농업을 시작했던 뜻은 살리고, 생산과 소비의 저변은 더욱 넓힐 수 있는 좋은 방법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다. 뭔가 획기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농업 예산의 절반을 뚝 잘라서 빈곤층에게 먹을거리 사 먹을 돈으로 제공하는 미국의 예를 본받아서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에게 친환경 농산물 구매 카드를 제공하는 등의 특별한 제도를 도입하자는 제안을 해 볼 수도 있을 테고,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해서 (미덥지 않은) 소비자 대신 정부가 농민의 생계를 책임지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친환경 농산물을 먹여야 한다는 주장도 점점 힘을 얻고 있다.
그렇지만 어떠한 제도를 만든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결국 도시 소비자들의 몫이 아닌가 싶다. 소비 패턴이나 소비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웃자고 하는 소리로 들어주시면 좋겠다. 소비문화가 완전히 바뀐 사회에서는 소비자들이 농민들의 ‘속박이’를 열렬히 원하고 환영한다. 크고 작고 반듯하고 구부러진 것들이 골고루 섞여 있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포장한 농산물을 내놓으라고 소비자들이 상인들에게 압력을 가한다. 그 압력은 너무나 격렬한 것이어서 유통하는 분들이 감히 크고 반듯하고 둥글둥글하고 속이 꽉 찬 것들만 따로 모아 진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이웃 중에 크고 반듯하고 둥글둥글하고 속이 꽉 찬 농산물만 따로 골라서 가져가려는 사람이 발견될 경우, 식당에서 담배 피워 무는 사람을 모두가 째려보듯이, 완전히 몰지각한 미개인 보는 눈으로 째려봐 주는,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런 사회에서라야 비로소 자연이 키우고 사람은 옆에서 거들 뿐인 자연스러운 농사, 진짜 친환경 농사가 자연스럽게 번져나가지 않을까 싶다.

5※필자 백승우: 강원도 화천에서 애호박 등 여름 채소 농사를 짓는 농부. 역사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영농조합 ‘강원유기농’의 조합원으로 농사짓는 짬짬이 글도 쓴다. 현장 활동가들의 눈으로 유기농업을 바라보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유기농을 누가 망치는가?』(시금치), 『토종곡식-씨앗에 깃든 우리의 미래』(들녘) 등에 공저자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