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살리고 건강한 생명을 기르는 것이 진짜 유기농”

전양순 우리원식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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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의 풍경은 온통 금빛이다. 추수를 앞둔 가을 들녘이, 정직하게 고개 숙인 벼들이 바람에 너울거리며 만들어내는 장관이었다. 예부터 10월을 상달이라 하여 귀히 여긴 이유도 이 곡식들에서 나왔겠지. 우리 땅의 끄트머리, 전라남도 벌교의 황금 들녘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논 군데군데가 멍이 든 것처럼, 바싹 타들어 가 빛을 잃은 벼들의 군락들.
“벼멸구 때문이에요. 올해 여름이 유난히 길고 뜨거웠잖아요. 이렇게 추수철 다 돼서 벼멸구가 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닌데….”
논으로 가면서 전양순 대표(52, 우리원식품 대표, 제21회 대산농촌문화상 수상자)가 말했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벼가 완전히 익기 전에 서둘러 추수를 끝낸 논도 보였다. 올해는 남부 지방에서 쌀농사 짓는 농민들에게 매우 힘든 해라 했다. 농약을 치지 않는 친환경 농업은 그 피해가 더 심각하다.

벼줄기가 튼튼하면 벼멸구의 공격에 끄떡없다.
벼줄기가 튼튼하면 벼멸구의 공격에 끄떡없다.

볏대가 빳빳하면 벼멸구가 먹지 못해
그런데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전양순 대표의 논은 깨끗하다. 벼멸구는 벼 줄기에서 양액을 빨아먹어 벼가 하얗게 말라죽는데, 줄기가 빳빳하면 벼멸구가 공격해도 끄떡없다는 것. 작물에 병이 왔을 때 문제가 생겼을 때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아예 오지 않는 건강한 작물을 생산해내는 전 대표의 농사법이 주효했다.
전양순 씨가 농사를 짓는데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흙을 만드는 일이다. 추수 후 탈곡하면 바로 논에 생 볏짚을 깔아주고 로터리를 친다. 다시 여기에 왕겨와 쌀겨를 펴주고 물을 대준 뒤 직접 만든 효소액을 희석해 뿌린다. 추수 후부터 이듬해 모내기 전까지 이렇게 다섯 번, 때를 맞춰 논을 갈아주면서 쌀을 빼곤 논에서 나온 것들을 다시 논으로 돌려준다. 이렇게 하면 땅속에서 미생물 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 땅이 건강해진다는 것.
“써레질하는 그날부터 물을 깊게 대줘요. 흙이 가라앉으면 4일 지나서 모내기를 하는데, 이때 물을 뺐다가 또다시 물을 대주죠. 한 40일간만 빵빵하게 대주면 풀이 나질 못해요.”
이렇게 쌀겨농법, 침수농법을 10년 이상 꾸준히 해 온 덕분에 땅은 튼튼해지고 ‘풀과의 전쟁’도 끝낼 수 있었다. 이제는 아예 풀을 매지 않는다.

듬성듬성한 논, 추수철에 반전이
모내기 풍경도 좀 다르다. 전 대표는 포트 모를 사용하는 데 포트 하나에 하나, 둘 많아야 세 개를 파종해 35일간을 키워 본답으로 보낸단다. 한 곳에 15포기 이상 심는 일반적인 모내기와 비교하면 논이 휑해 보이지만 가을엔 눈부신 반전이 기다린다.

벼를 듬성듬성 심어도 가을이 되면 논이 꽉 찬다.
벼를 듬성듬성 심어도 가을이 되면 논이 꽉 찬다.

“모를 촘촘히 심으면 대가 약하고 사이사이 벌레가 많이 생겨요. 듬성듬성심으면 모가 자라면서 대가 굵고 튼튼해지고 또 분얼(포기치기)이 잘 돼서 나중엔 논이 꽉 차게 되죠.”
종자를 받는 일에도 무척 정성을 들인다는 전 대표. 가능한 손으로 벼를 거두고 반드시 햇볕에 말리며, 여러 번의 과정을 거쳐 좋은 종자를 분리해 준다.
이렇게 풍요로운 논은 긴 시간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의 결실이라고 말하는 전 대표. 남편 강대인
씨(2010년 작고)를 정농회에서 만나 결혼하고 벌교로 내려온 1984년만해도, 다들 식량 증산에 힘을 다할 때였고, 유기농을 고집하는 젊은 부부를 지지해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주변에 유기농 하는 사람이 있나 가르쳐줄 사람이 있나. 한번은 올해처럼 벼멸구가 왔는데 그냥
말라가는 논을 바라보며 우는 게 전부였어요. 수없이 실패하고 또 다시 시작하고. 그래서 육종도 한거예요. 병충해에 강한 씨앗이 있어야 유기농을 계속할 수 있다 싶어서….”
그가 우리 벼 종자 287종을 보유한 이유이기도 하다.

2013년 새롭게 들어선 농산물 가공공장. 1, 2층 합해 60명의 농민이 함께한다.
2013년 새롭게 들어선 농산물 가공공장. 1, 2층 합해 60명의 농민이 함께한다.

농민이 가격을 정하고 주도한다
당시 유기농 쌀농사로는 생활은 커녕 비용을 충당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농산물 부가가치를 올리는 방법을 생각한다. 우리원식품을 설립한 1996년부터 본격적인 농산물 가공을 시작했다. 백미, 현미, 흑미, 적미, 녹미를 섞어 오색미라는 이름으로 만들고, 각각의 쌀도 다양한 소포장 제품으로 상품화했다. 98가지 산야초와 유기 농산물로 만들어 8년 이상이 되어야 세상으로 나가는 효소액을 비롯해 매실액, 유기농 된장, 고추장, 장아찌 등 우리원이 만드는 25여 가지의 가공품은 전 씨가 고집스럽게 유기농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 되어 주었다.
전 대표는 직거래 회원을 소중히 여긴다. 유기농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없었을 때부터 그는 직거래 회원들과 30분, 1시간씩 이야기하면서 공감과 신뢰를 쌓아갔다.

전양순 대표는 효소액을 비롯해 25여 가지 가공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전양순 대표는 효소액을 비롯해 25여 가지 가공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택배도 없을 때, 농사짓는 틈틈이 작업해서 일주일에 한 번 벌교역으로 보내면 서울역 등등으로 나와서 물건을 받아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일이지요.”
그렇게 인연을 맺은 직거래 회원이 현재는 1만여 명을 훌쩍 넘었다.
“농업에 있어 소농을 살리는 건 정말 중요해요. 유통도 마찬가지예요. 귀찮다고 대형유통업체만 상대하면 안 돼요. 전화주문, 유기농 생협이랑 전자상거래, 유기농 매장 같이 안전하고 다양한 판로를 갖춰야지요. 그리고 농산물이 됐든 가공품이 됐든 농민이 가격을 정해야 해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직업은 농부라는 전양순 씨. 맏딸인 선아 씨는 이제 든든한 동지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직업은 농부라는 전양순 씨. 맏딸인 선아 씨는 이제 든든한 동지다.

26년 전, 시중 쌀 1가마 가격이 12만 원일 때 그는 흑미 한 가마를 80만 원을 받았다. 그렇게 해도
인건비조차 빠지지 않는 가격이었지만, 누가 그 가격에 쌀을 사느냐며 남편도 말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쌀이 다 팔렸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흑미의 가격은 같다.
“비용이 줄었는데 소비자들에게 비싸게 받을 이유가 없어요. 땅이 좋아지면서 수확량은 늘었고, 인건비도 안 들어가고 쌀겨도 그렇게 많이 넣을 필요도 없어졌어요. 26년 전엔 비용도 다 충당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 남아요.(웃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직업은 ‘농부’
2013년, 우리원에는 가공공장이 새롭게 들어섰다. 총 200평 규모로 1층은 발효식품 가공, 2층은 친환경 쌀을 가공하며 각각 35농가, 25농가가 함께 참여해 지금보다 다양한 농산물 가공제품들이 선보일 예정이다. 매년 5천여 명이 찾아와 교육을 받는 전남친환경농업교육관 뒷산에는 얼마 전 편백도 심었다.
“생산과 가공, 유통, 관광, 그리고 교육까지. 저는 이른바 6차 산업을 벌써부터 해왔어요. 앞으로는 농업교육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가치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가려구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직업은 유기농사를 짓는 ‘농부’라는 전양순 대표. 이제는 유기농을 하는 동지들이 많아 외롭지 않고, 저비용으로 유기농을 쉽게 할 수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원 농장의 대표로 든든히 옆을 지켜주고 있는 큰딸 강선아 씨를 비롯해 반디,보리, 태승, 은하 다섯 명의 자녀들이 다채로운 색깔로 멋지게 이어갈 농업의 미래에 마음이 부푼다.
‘사람을 기르는’ 성농聖農의 길이, 바로 앞에 있다.

글·신수경 / 사진·김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