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0년, 이젠 교육과 협동이다

주형로 충남친환경농업인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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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역에 내렸다. 10년 만이었다. 차를 타고 중심가를 벗어나자 수확을 앞둔 황금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을 농촌의 가장 흔한 풍경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른 것이 보이는데, 논 가장자리에 박혀있는 빨간 지붕의 오리집이다. 우리나라에서 오리농법을 처음 시작하고 친환경 농업의 새로운 획을 그었던 주역인 주형로 씨(53,제10회 대산농촌문화상 수상자, 충남친환경농업인연합회 회장)를 다시 찾아가는 길, 마음이 먼저 서두르고 있었다.

도시의 텃논, 교육과 농업이 함께 간다
“교육이 농촌을 버렸어요.”
첫 마디부터 세다. 주형로 회장은 거침없이 말을 잇는다.
“농업·농촌에 온갖 좋은 정책 아무리 갖다놔두 어땠시유? 잘 안됐지유? 농촌에는 할 만큼 했다는 거예요. 근데 왜 안됐냐. 소비자가 없기 때문이에요. 농민이 아무리 좋은 농산물 만들어도 제대로 똑똑하게 먹어주는 소비자가 없으면 소용없지요.”
똑똑한 소비자를 키우는 일은 학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30년 전에 학교에서 텃밭과 동물농장을 버렸어요. 생명의 공간, 사랑의 공간이 사라진 거죠.”
30년 전 버렸던 생명의 공간을 학교에 다시 돌려주는 것, 그것이 도시학교 텃논만들기 사업이다. 2010년 홍성군농업기술센터의 ‘싱싱 아이디어 공모’사업으로 3개 학교에 시범적으로 논을 만들어 준 것이 성공해 10개가 되고 현재 100개 학교로 늘었다.

한울마을은 주민들이 함께 땅을 구입하여 집을 짓고 길을 만든 마을공동체다.
한울마을은 주민들이 함께 땅을 구입하여 집을 짓고 길을 만든 마을공동체다.

충남지역뿐 아니라 전국의 도시학교가 대상이다. 서울에만 48개 학교가 참여한다. 충남친환경농업인연합회 회원들이 직접 학교를 방문해, 커다란 고무 대야에 논을 만들고 학생들이 직접 벼를 심도록 한다. 삐죽이 농장, 즐거운 농장, 무지개 농장……. 학생들은 농장의 이름을 붙이고 당당히 자기 벼를 갖는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벼를 돌본다.

100개 도시학교 텃논 만들어주기 사업
100개 도시학교 텃논 만들어주기 사업

“어느 날 서울의 한 학교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한 아이가 바람에 꺾인 이파리를 보고 계속 올리고 있다가 안 되니 울더랍니다. 그렇게 벼와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거지요.”
도시 아이들이 생활 속에서 지켜보는 농업. 농부가 묻는다.
“이 벼는 누가 키워줬나요?”
아이들이 앞다퉈 대답한다. 햇볕, 공기, 바람, 물, 아저씨, 선생님, 거름……. 정답이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말하진 않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 그 모든 존재가 함께 벼를 키웠다는 생각이 자리한다는 것만도 가치 있는 일이다. 그 아이들이 자라면 농민의 땀을 귀히 여기는 똑똑한 소비자가 될 것이다.

주하늬 씨가 만든 마을 지도에는 마을공동체의 희망이 담겨 있다.
주하늬 씨가 만든 마을 지도에는 마을공동체의 희망이 담겨 있다.

조화로운 세상, 공동체 마을을 만들다
주형로 씨가 사는 곳은 한울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교사, 동화작가, 미술가, 직장인, 귀농인 등 다양한 재능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 20가구가 모여 있다.
마을 입구부터 평범한 농촌마을의 모습은 아니다. 태양열 발전기가 달린 지붕, 흙과 나무를 섞어 만든 예쁜 집. 형형색색 꽃들 속에 자연스럽게 길이 나 있고 전선이 없어 시야에 거칠 것이 없는 아름다운 풍경. 이국적인 냄새가 풍기면서도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마을엔 또 다른 특별함이 있다.

협동조합형식으로 얼마전 문을 연 한우식당
협동조합형식으로 얼마 전 문을 연 한우식당

“누가 와서 이곳에 사는 사람 누군가한테 당신 땅 어디까지여? 하고 물으면 여기서 저~기까지.
라고 말하지요. 바둑판처럼 땅을 나누지 않았어요. 여기 코스모스 핀 이 꽃밭의 20분의 1, 텃밭의 20분의 1이 내 땅이지요. 처음엔 반대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들 만족해합니다.”
이 마을은 주형로 씨가 중심이 되어 땅을 공동으로 마련하고 첫 삽을 뜨는 일부터 마을 사람들이 함께 했다. 크고 작은 불협화음 속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고 결과를 만들어 낸 한울마을 사람들은 이제 나무 한 그루 심는 것도 함께 고민하고 소통한다.
“저기 숲을 보면 나무들이 다 반듯해 보이지요?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큰 나무 작은 나무 비뚤어진 나무 못생긴 나무……. 거기서 느꼈지요. 이게 바로 사회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조화를 이루어 큰 그림을 만든다. 그런 자연을 닮은 마을을 만들고 싶었어요.”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한 귀촌인은 “환경도 좋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좋은 곳”이라며 마을을 자랑했다. 마을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이 마을엔 담도 없다. 마을 이름처럼, 그냥 한울타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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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센터 마을활력소와 협동조합 식당
문득, 10년 전의 이야기, ‘문당마을 발전 100년 계획’은 얼마나 진행되고 있을까 궁금했다.
“100년 계획을 세울 당시만 해도 가난과 어려움이 많았던 시절이죠. 계획대로 이제 이 지역 대부분 유기농입니다. 생산은 농민이 하고 판매는 농협으로 이관했어요. 농협이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농민은 농협과 함께 가야 합니다.”

지역센터 마을활력소는 지역 단체들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
지역센터 마을활력소는 지역 단체들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

또한, 이제는 마을을 넘어 지역으로 영역을 넓혀야 할 때라고 주형로 씨는 말한다. 그래서 홍동면 중앙에 ‘지역센터 마을활력소’를 만들었다. 마을과 지역의 일을 거드는 중간지원조직인데, 작은 조직과 단체들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을 활력소의 열린 공간에는 마을의 각 사회단체가 들어와 있는데, 이들은 따로 또 같이 지역을 위한 가치 있는 일들을 해나간다.
얼마 전 그는 지역주민들과 공동출자하여 한우식당 문을 열었다.
“원래 클러스터사업으로 건립됐는데, 문제가 많아서 우리가 인수했어요. 혜택을 받는 것을 농민과 지역민에게 돌려주자 해서 협동조합 형태로 만들었지요. 현재 주주는 100명 정도인데 365명을 모아 1일 주인제를 도입할 겁니다.”
지역 순환을 꿈꾸는 제1호 협동조합식당도 문당리 100년 계획 속에 있었다.

하늬바람이 부는 산과 들
주형로 씨의 아들 하늬 씨(30)는 아버지와 같은 풀무농고를 다녔고, 농대를 나와 농사를 짓는다.
1만 5천 평 벼농사와 밭농사, 그리고 한우 52마리를 키운다. 주형로 씨는 하늬 씨가 대견하고 믿음직하다. 그런 아들을 만들어준 건 교육의 힘이라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농업을 배우고 느끼며 자랄 수 있었던 환경, 스스로 답을 찾게 했던 본인의 철학과 아들의 노력. 자신의 이름으로 농사지은 지 2년 만에 하늬 씨는 마을 총무가 되었다. 얼마 전 손자 산들(1)이도 태어났다.
하늬바람이 부는 산과 들. 주형로 회장이 꿈꾸는 아름다운 농촌, 미래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의 100년 계획은 그렇게 계속 진화하고 있다.

〈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