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때는 바야흐로 남아메리카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에서 개최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GATT)”의 새로운 다자간 무역협상, 이른바 우루과이 라운드가 미국 정부와 다국적기업의 주도하에 보호주의 장벽을 허물고 자유화, 개방화의 방향으로 타결이 무르익던 무렵이었다.
풍토적으로 소규모 가족농 체제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 농업과 농촌 그리고 서비스산업은 뭐라 할까, 요즘 용어로 생산성이 낮고 가격경쟁력이 취약한 태생적인 제약성 때문에 바람 앞의 등불처럼 스러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때였다. 농촌 하늘엔 검은 구름이 뒤덮여 있었다. 단군 이래 최대라 하는 전국 186개 시민, 농민, 소비자, 환경, 문화, 종교 정치 단체가 참여한 “반 우루과이 라운드(UR), 우리농업지키기” 운동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던 필자를 교보생명보험의 창립자 대산大山 신용호愼鏞虎 선생이 사람을 보내어 만나자고 하신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나는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해 김 교수가 옳은지 그른지 잘 모른다. 하지만 농촌과 농민을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만은 느껴진다. … 나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나를 키워주고 마음의 힘이 되어준 농촌과 농민에 대한 애정이 여태까지 교보생명의 밑바탕에 살아있다. 이 땅에 진 빚을 갚고 떠나고 싶다. 내 재산을 바쳐 이 땅의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에 대한 사랑을 대대손손 남길 공익사업을 하고 싶은데 도와 달라.”
그 꿈이 1991년 10월 “대산농촌재단”의 탄생으로 실현돼 오늘까지 25년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윤추구가 기업의 최종목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대산 선생의 평소 지론이다. 그것도 소외되고 어두운 곳, 농업·농촌·농민에 닿아 있었다. 우리나라에 내로라하는 수많은 대기업주들이 이 땅에서 성공하고 떠났거나 아직 살고 있지만, 어둡고 소외된 농업 농촌 농민, 3농을 위해 진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사회(재단)에 환원하신 분은 아마도 대산 신용호 선생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이렇듯 혹독한 개방화(WTO/UR/FTA)의 물결 속에서 그리고 승자독식의 산업화 파고 앞에서 우리 농업 농촌 농민에게 대산농촌재단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3농은 천애의 고아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대산 선생의 선견지명이 빛나는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대산농촌재단은 명실공히 우리나라 농촌 농민의 희망이고 자랑이며 보람이었다. 농업부문에 독보적인 교육 문화 장학 연구 발전의 산실이었다. 수많은 인재를 배양하고 수천수만 명에게 희망과 보람을 심어 주었으며 지금도 아마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대산농촌문화상, 대산장학생 양성, 농업실용연구 지원, 해외농업연수와 농업심포지엄 지원 등 산업화 개방화 시대에 내팽겨져 온 이 나라의 농업 농촌 농민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동도(同道, 同徒)들에게는 대산농촌재단이야말로 무한히 고마운 에너지 원(源)이며 의지할 유일한 배터리이다.
오늘도 대산 선생이 남기고 간 훈훈한 향기가 온 누리 농촌 곳곳에 은은히 풍겨나고 있다. 짐승도 죽을 땐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 땅 언덕을 바라보며 눈을 감는다(首丘初心)고 했는데 대산농촌재단은 신용호 선생의 고향 땅 언덕임과 동시에, 현재와 미래에 있어 이 땅의 수많은 농업 농촌 역군들의 고향 땅 언덕이다.
25년을 이어온 대산농촌재단은 산업화와 개방화의 광란 속에서 또 25년, 250년 후에도 우리나라 3농에 우뚝 버티고 포근히 품어 안을 영원한 고향 땅 언덕이다.

 

47-1※필자 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 대표. 1998~2000년 제50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상지대 총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워낭소리, 인생 삼모작의 이야기』(2014, 따비), 『더 먹고 싶을 때 그만두거라』(2009, 한국농어민신문) 등 다수가 있으며 지속 가능한 농업과 농촌을 위한 다양한 집필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