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지주-소작농’ 체제를
넘어

농촌의 현실 : 유명무실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지주-소작농 체제 재현 : 재벌 & 부재지주
1949년 죽산 조봉암이 주도했던 농지개혁은 지주 계층과 소작농을 해체하고 자영농 계층을 양산하여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이 단기간에 산업화를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농지개혁 이후 반세기를 넘어 대한민국은 다시 지주-소작농 체제로 복귀하고 있다.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에서부터 면면히 흐르던 ‘농지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소유한다’는 원칙은 1987년 개정된 현행헌법 제121조 1항에 ‘경자유전耕者有田’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했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이다. 통계청에 의하면 2015년 대한민국의 농지 절반 이상이 임차농지라고 한다1). 1949년 농지개혁이 일어나기 전 1947년 말 전국의 소작 농지 면적은 전국 농지의 60.4%에 달했다2)고 하니 대한민국의 상황은 다시 농지개혁 전으로 돌아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농지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소유해야 한다’고 대한민국 헌법에 버젓이 명시되어 있건만 최근 우병우 민정수석의 처가의 농지 매입부터 이명박 정부 시절 쌀 직불금 부당수령으로 경질된 이봉화 보건복지부 차관, ‘땅을 사랑해서’ 농지를 매입했지만, 농지법 위반으로 환경부 장관 후보에서 사퇴했던 박은경 후보자 등 대한민국의 고위공직자들은 법을 어기면서까지 농지를 부동산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렇듯 고위공무원부터 개발정보를 활용하여 농지를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하니 ‘경자유전’의 원칙이 지켜질 리 만무하다.
불법을 저지르면서 농지를 이용해 토지불로소득을 취하는 이들도 문제지만 경자유전의 원칙을 해치는 더 큰 위협은 재벌들의 농지취득 문제이다. 이들의 위협이 더 큰 이유는 합법의 탈을 쓰고 경자유전의 원칙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한국의 재벌들은 다시금 이윤 극대화를 위해 농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불법을 넘어 합법적으로 농지투기를 시도했던 역사는 과거 전력이 있다. 현대건설, 동아건설은 선진 과학영농이라는 명분으로 매립을 통한 농지조성 허가를 받았지만 결국 지속적인 로비를 통해 타 용도로 전환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었다.
2016년에는 세계기업과의 경쟁이라는 명분으로 ‘미래농업’, ‘6차산업’, ‘스마트팜’을 내세우는 정부의 적극적인 농업지원정책에 힘입어 LG CNS는 해외자본과 합작하여 새만금 유리온실 단지를 조성하여 토마토와 파프리카를 재배하려다 농민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사업을 접기로 하였다. 하지만 대기업의 농업 진출은 ‘농업 성장을 위한 자본유치’를 내세우는 정부의 적극적인 기업 지원 정책과 이미 세계시장에서 경쟁의 한계를 맞고 있는 대기업들이 농업에서 시장을 창출하려는 ‘블루오션’ 전략이 맞물려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3)
닭고기 중심의 축산기업 ‘하림’과 같이 닭고기를 키우는 농민들에게 생산을 맡기는 수직계열화 방식이든 ‘농지와 시설과 유통’을 장악하는 직접 생산 방식이든 농민들이 ‘힘의 불균형’으로 소작농으로 전락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이러한 ‘지주-소작농’ 체제가 정부의 지원 하에 합법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우리 농업의 가장 큰 문제이다.

농업 노동력 재생산 붕괴
농촌 사회 한 편에서 지주-소작농 체제가 재구축되어가는 가운데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농업 노동력 재생산 붕괴로 농촌 사회가 고충을 겪고 있다. 2015년 기준 농촌인구의 37.8%가 65세 이상의 노인들이라는 국회 입법조사처의 발표는 농업인구의 고령화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농촌인구의 고령화 문제는 경자유전 원칙의 훼손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시에서의 경쟁과 팍팍한 삶에 지친 청년들이 귀농하는 숫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하지만 자본이 없는 청년들이 귀촌・귀농을 선택할 때 부딪히는 커다란 진입장벽은 비싼 농지이다. 농산물의 가격에 비해 농지가격이 턱없이 높은 이유는 농지의 용도변경을 통한 시세차익에 대한 기대가 농지가격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고위공무원 등 여윳돈과 정보가 있는 이들이 농지를 매입해 부재지주의 역할을 하는 이유도 농지의 용도변경을 통해 얻을 시세차익 때문이다. 이러한 토지불로소득에 대한 기대가 농지가격을 높이고 비싼 농지는 귀농・귀촌을 꿈꾸는 청년들을 가로막아 농업 노동력의 재생산을 가로막고 있다.

사라지는 농지
이윤 극대화를 목적으로 삼는 재벌들과 어떻게든 수월하게 토지불로소득을 얻으려는 부재지주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농지를 전용하려 시도한다. 그 결과 지난 16년간 전남지역에서만 해마다 여의도 면적(2.9㎢ 기준)의 5배나 되는 농지가 사라지고 있다.4) 2001년부터 2014년까지 13년 만에 대한민국 전체 경작 면적의 9.9%, 여의도 면적의 약 638배나 되는 농지가 사라졌다고 한다.5)
한국의 농촌은 제도의 효용 측면에서나, 노동력 측면에서나, 농지 규모 측면에서나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있다.


농촌 현실의 원인 – 농지의 용도전환을 통한 토지불로소득

경자유전의 원칙이 무너지고, 높은 농지가격으로 인해 청년들의 귀농・귀촌이 어려워지고, 농지가 줄어드는 원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토지불로소득을 얻기 위한 농지 투기이다.
한국의 농지는 해당 농지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의 생산량과 가격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농지는 적은 비용의 농지전용부담금만 지불하고도 농지의 용도전환이 비교적 수월하다. 따라서 한국의 농지가격은 용도전환을 통한 시세차익에 대한 기대가 반영되어 높은 농지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수도권이나 대도시 주변처럼 인구가 몰려있거나 개발 가능성이 높은 지역의 농지 대부분은 용도전환을 기대하며 토지불로소득을 좇는 외지인들, 즉 부재지주들의 소유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부동산 투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한국의 재벌들도 이러한 토지불로소득을 지나칠 리 만무하다. 막대한 자본의 투입을 통한 농산물 독과점 생산에서 수익을 올리다가 여의치 않으면 로비를 통해 농지를 용도 전환하여 막대한 토지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는 농업은 글로벌 경쟁에 지친 재벌 대기업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부재지주, 재벌 중심의 현대판 지주-소작농 체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높은 농지가격을 부담할만한 자본이 없는 청년들은 귀농・귀촌을 하더라도 소작농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시에서의 경쟁과 팍팍한 삶이 싫어 귀농・귀촌을 꿈꾸는 청년들이 소작농으로 살기 위해 농촌으로 올 리 만무하다. 농지투기를 통한 토지불로소득을 방치하면 농촌의 고령화 문제 해결과 농업의 노동력 재생산의 해법은 요원하다.
농지축소 문제 역시 농지의 용도전환을 통한 토지불로소득을 그대로 두고서는 해결할 방안이 없다. 애당초 토지불로소득을 기대하며 농지를 매입한 부재지주들과 재벌 대기업들이 농지를 용도 전환하여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을 기회를 마다할 리 만무하다. 그 결과, 지난 13년간 전체 농지면적의 10%가 사라졌다.

한국에서도 농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지역농업생산자, 환경보호단체, 지방정부, 생협 등이 참여하는 거버넌스를 구축하여 농지를 매입한 후 지속가능한 농업을 하려는 농부들에게 임대할 수 있을 것이다.
‘농’의 가치를 사랑하는 시민들과 단체들의 거버넌스를 통해 만들어진 공동체가 농지를 소유하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꿈꾸는 청년농부들이 농지를 임대하여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현대판 지주-소작농 체제에 맞서는 현대판 ‘경자유전’이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경자유전’의 회복을 위한 대안 모색

농지에서 발생하는 토지불로소득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
현대판 지주-소작농 체제가 강화되고, 농업인구가 고령화되고, 농지가 사라지는 오늘의 농촌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해법은 간단하다. 오늘의 농촌을 황폐하게 하는 주범인 농지에서 발생하는 토지불로소득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면 된다. 농지에서 발생하는 토지불로소득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안은 농지의 가격을 현재 가격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세제를 개혁하거나, 아니면 지금의 농지를 절대적으로 ‘절대’농지로 확정하고 만약에 용도를 변경할 시에는 공공이 지금의 농지가격으로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6)
문제는 이러한 정책을 입법화해야 할 국회의원, 고위공무원들의 다수가 토지불로소득을 누리는 부재지주라는 점이다. 본 지면에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토지불로소득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정책입안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고위공직자 부동산백지신탁제’가 필요한 이유이다.

‘농’의 가치를 사랑하는 공동체가 소유하고 청년농부가 농사짓는다!
농지에서 발생하는 토지불로소득을 차단한다면 법조문에 갇혀있던 ‘경자유전’은 현실로 걸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정치현실 속에서 토지불로소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정책이 당장 시행되기는 쉽지 않다.
국회와 중앙정부가 하지 않는다고 농촌이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을 망연자실 바라만 볼 수 없다. 농의 가치를 사랑하는 이들의 연대를 통해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켜 낼 수 있다.

충남 홍성에서는 풀무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주민들이 청년농부들을 위한 농지매입 기금을 조성중이다. ©청소년과 놀이문화 연구소
충남 홍성에서는 풀무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주민들이 청년농부들을 위한 농지매입 기금을 조성중이다. ©청소년과 놀이문화 연구소

미국에서는 지역공동체의 지원과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이하 CSA)과 땅을 영구적으로 소유·관리하며 공동체 전체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토지의 가치를 공동체가 공유하는 공동체토지신탁(Community Land Trust, CLT)을 결합하여 유기 농지를 보존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위치한 Indian Line Farm이나 Caretaker Farm 등의 사례를 살펴보면 지역의 커뮤니티 그룹, 농부들, 지방정부, CSA 회원들이 함께 토지매입비용을 조달하여 CLT와 같은 비영리법인이 농지를 소유하고 농부들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농지의 개발 가능성을 배제하여 농부들이 안정적으로 유기농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한다.
한국에서도 농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지역농업생산자, 환경보호단체, 지방정부, 생협 등이 참여하는 거버넌스를 구축하여 농지를 매입한 후 지속가능한 농업을 하려는 농부들에게 임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미약하게나마 시작되고 있다. 귀농・귀촌의 메카가 된 홍성의 농지가격이 너무 올라 홍성의 풀무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농사지을 땅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풀무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주민들이 청년농부들을 위한 농지매입기금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홍성에서 일어나는 작은 시도에 크라우드 펀딩 등을 통해 ‘농’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시민들의 출자와 농지 관련 기금이 만난다면 의미 있는 한국형 농촌 CLT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농’의 가치를 사랑하는 시민들과 단체들의 거버넌스를 통해 만들어진 공동체가 농지를 소유하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꿈꾸는 청년농부들이 농지를 임대하여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현대판 지주-소작농 체제에 맞서는 현대판 ‘경자유전’이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작지만 의미 있는 날갯짓이 어떤 나비효과를 가져올지는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혹시 아는가. 곳곳에서 일어나는 현대판 ‘경자유전’의 작은 날갯짓의 나비효과가 현대판 지주-소작농 체제를 날려버릴 거대한 태풍이 될지….


1) 우리나라 농민 10명 중 6명은 ‘임차농’, 한국농정, 2016.07.08
2) “박근혜, 제2의 농지 개혁 단행하라!”, 프레시안, 2016.09.30
3) 대기업 농업진출 무엇이 문제인가 <하>, 한국농어민신문, 2016.08.02.
4) 전남 농지 전용, 지난 16년간 여의도 넓이의 77배, 노컷뉴스, 2016.09.30
5) 남기업, ‘청년, 토지, 그리고 기본소득’, 대산농촌문화, 2015 가을호
6) 남기업, ‘청년, 토지, 그리고 기본소득’, 대산농촌문화, 2015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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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성영: 토지+자유연구소 연구원, 희년함께 학술기획팀장으로 있으며 사회적 금융을 통한 토지가치공유 실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10년 이내에 귀촌을 하여 ‘농’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며 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