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이라는 또 다른 길에 서다

 

40대 중반에 새롭게 다시 만난 농촌, 산청 간디숲속마을.
40대 중반에 새롭게 다시 만난 농촌, 산청 간디숲속마을.

1983년 서울대 농대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여성조경가의 칼럼을 읽고 조경학과를 알게 되었다. 현장을 누비며 다닌다는 말에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전공을 결정했다. 1년을 관악캠퍼스에서 보내고 3년을 수원캠퍼스에서 지냈다. 캠퍼스는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주변은 논밭이었다. 후문 쪽에는 주점을 겸하는 딸기농원이 많았다. 대낮에도 수업을 빠지고 그곳에서 술을 자주 마셨다. 대낮에 비틀거리며 오다가 도랑에 빠지는 녀석들도 있었다. 농촌에서 지내는 것이 재미는 있었지만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무력감도 있었다.

80년대는 주택문제가 가장 큰 도시문제였다. 공원이나 유원지를 지을 땅에 아파트를 짓는 게 더 나을 거 같았다. 대학원에서 전공을 도시계획으로 바꾸고 관악캠퍼스에서 지냈다. 수원에서 고립되어 지내다가 거대한 캠퍼스에서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다. 대학원 1학년 때 일산, 분당 신도시계획이 발표되었다. 신도시 예정지에서는 농민들이 격렬하게 개발반대 운동을 했다. 주택공급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들어간 대학원인데 개발반대 현장에 가보고나니 아이러니하게도 신도시 반대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삶은 또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직장은 서울주택도시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를 다녔다. 농촌과 자연을 뭉개고 아파트를 짓는 회사였다. 연구원이었기 때문에 개발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다만 개발과정에서 부딪히는 환경단체들의 거친 태도와 말투에 반감이 커서 그때까지만 해도 환경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은 지속가능한 도시개발과 생태도시로 가고 있었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주지 않아도 저 스스로 피고 지는 풀과 꽃이 아름답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주지 않아도 저 스스로 피고 지는 풀과 꽃이 아름답다.

골골하던 도시 아이, 건강한 시골 아이로
늦둥이 둘째가 여섯 살이던 2005년에 재취업한 회사는 분당에 있었고 집은 일산이라 두 신도시를 오갔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느라 아이들을 거의 건사하지 못했다. 육아는 친정엄마가 도맡아 해주었지만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학교는 혼자 하기 어려운 숙제를 내주었고, 아이는 숙제를 제대로 해 가지 못했다. 고민 끝에 공부에 얽매이지 않는 대안학교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도시형 대안학교는 워킹맘이 보내기에는 불가능한 학교였다. 좌절하던 즈음 한 모임에서 만난 이가 강원도 양양에서 산촌유학센터를 열었다며 초대장을 보내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도시의 학원생활에 지친 아이는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된다니 일 년 다녀보겠다고 했다. 아이는 2년을 강원도 양양에서 시골 작은 학교에 다닌 후 경남 산청의 대안초등학교로 옮겼다. 노산으로 허약하게 태어나 골골하던 아이는 시골에서 건강한 아이로 거듭났다. 아이를 시골에 보내놓고 나도 한 달에 한 번 꼴로 시골을 드나들면서 새로운 농촌을 만났다.

2012년, 아이의 중학교 진로상담 과정에서 간디숲속마을을 알게 되었다. 산청간디중학교를 만들면서 함께 만든 생태마을이었다. 중학교에서는 아이들이 2주에 한 번 집에 온다는 말에 나는 아이를 좀 더 자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가 집에 안 가면 엄마가 내려오는 방법도 있다고 선생님이 알려주었다. 공공기관 이전정책 덕분에 직장이 2010년 분당에서 대전으로 옮겨와 직장에서 산청까지는 두 시간 거리였다. 아이를 자주 볼 겸, 생태마을살이도 경험할 겸, 나는 마을에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적당한 집을 얻어 2013년 2월부터 주말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주중에는 회사에서 신도시 연구를 하고 주말에는 시골의 생태마을에서 보내는 5도2촌의 삶을 1년 반 살았다. 금요일이 되면 시골로 여행 갈 생각에 설레었고 주말을 자연 속에서 아이와 충만하게 보냈다. 월요일 새벽이면 아쉬운 마음으로 도시에 돌아와 삶과 동떨어진 신도시 연구와 잡일로 시간을 보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삶이었다.

2007년에 간디중학교와 함께 만든 간디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도시에서 온 귀촌인들이었다. 주민들 중 절반은 여전히 도시로 출퇴근하고 나머지 절반은 마을에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도시월급자였던 이들이 아이와 함께 인생을 리셋하고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는 모습은 내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옆집 친구 덕에 다양한 시골 일을 체험하면서 자연 속에서 하는 일의 즐거움도 알게 되었고 내가 밖에서 몸으로 하는 일을 꽤나 좋아한다는 것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역시나 십대 때의 선택이 나에게 맞는 것이었다. 사회적 의미를 찾는답시고 전공을 바꾸고 머리만 쓰면서 젊은 시절을 보낸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직접 가꾼 박하로 만든 차와 목욕주머니. 몸을 쓰고,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좋다.
직접 가꾼 박하로 만든 차와 목욕주머니. 몸을 쓰고,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좋다.

시간과 경쟁에 쫓기며 도시에서 살아야 하나
2014년 나는 회사에서 완전히 생소한 분야의 국책연구단을 맡게 되었고 평가를 둘러싼 갈등을 겪게 되었다. 조직에서의 평가는 상대적이다. 남들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야 살아남으니 일점이라도 더 받기 위해 싸워야 한다. 평가체계를 담당하는 기획부서는 우리 연구단에게 낮은 점수를 부여하려고 했고 우리 연구단원들은 애초에 약속한 대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를 오가며 나는 지쳤다. 사는 게 꼭 이런 방법만 있나, 존엄하게 태어난 인간이 이렇게 남의 평가를 받고 살아야 하나, 진한 회의가 밀려왔다. 공교롭게 그 시간 세월호가 침몰했다. 아이들 학원비 번다고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아이랑 외식 한번 못했는데 아이가 죽어버렸다는 한 엄마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돈 벌자고 아등바등 살기보다 더 늦기 전에 자연 속에서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평가받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도 열고 싶었다.

나는 경제력을 중시하는 워킹맘이었다. 도시에서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남편과의 관계에서 내 발언권은 경제력과 비례한다고 생각했다. 공기업에 다니면서 도시근로자 월평균 소득보다 높은 수준의 금액을 벌었지만 돈을 모으는 재주가 없다보니 월급이 들어오면 며칠 만에 어디론가 다 사라졌다. 돈벌이의 보람을 느끼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재무컨설팅을 받고 정년까지 일하는 것을 전제로 여러 가지 연금과 보험을 들었다. 그런데 불과 일 년도 안 되어 나는 사직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면에서는 갈등이 컸다. 경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자유로운 삶과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이라는 두 가지 욕구가 다 마음 안에 있었다. 이 둘을 어떻게 충족할 것인가? 고민을 해결하려고 비폭력대화센터에서 하는 중재집중과정을 들었다. 교육을 받고 해답을 찾아보니 지난 1년간의 시골살이에 그 답이 있었다.

이제는 돈으로 산 선물 대신 손수 만든 곶감, 박하차, 생강차 등을 선물한다. 받는 사람의 기쁨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돈으로 산 선물 대신 손수 만든 곶감, 박하차, 생강차 등을 선물한다. 받는 사람의 기쁨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시골살이, 돈으로 해결하던 것을 내 손으로
마을에서 농업과 관련된 일로 생계를 꾸려가는 이웃들의 벌이는 도시 회사원들의 월급에 한참 못 미쳤다.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자녀를 다르게 교육하는 것이었다. 대안학교를 나온 마을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독립해서 살고 있었다. 새로운 모델을 만들며 살아가는 이웃의 삶은 내게 길잡이가 되었다. 아이들의 교육비를 책임지고 있던 나는 교육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서울의 사립대학에 다니는 큰아이에게는 2년 치 학비를 선불로 주며 이것이 마지막 경제적 지원이라고 말했다. 학비가 비싼 비인가 대안중학교에 다니는 둘째에게는 공립대안고등학교를 권했다. 아이들은 나의 결정을 담담히 받아들였고, 이제라도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라고 지지해 주었다. 적게 쓰고 내 손으로 직접 하는 방식으로 내 생활을 바꾸기로 했다. 그 상징으로 카페에서 파는 비싼 커피는 사먹지 않기로 했다.

삶의 방식을 전환하기로 결심하고 회사를 그만둔 지 이제 3년이 되었다. 큰 아이는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충당하고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을 앞두고 있다. 둘째 아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부산에 있는 뮤지컬극단에서 합숙생활을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무능해지니 아이들이 일찍 자립했다. 무능한 부모가 제일 좋은 부모라는 말을 체험했다.
일상의 삶에도 변화가 있었다,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던 것을 내 손으로 하고 있다. 선물할 일이 생기면 내 손으로 만든 박하차, 생강차, 곶감, 허브로 만든 포프리 등을 선물했다. 받은 이의 만족도는 돈으로 산 것 이상이었다. 겨울철에는 기름보일러 대신 작은 화목난로 하나로 지냈다. 작년 한 해 동안 쓴 기름값은 온수용으로 십만원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 나의 일은 ‘반농반X’다. 생활의 반은 박하밭을 일구고 박하차를 만들면서 농사 관련된 일을 하고, 또 반은 비폭력대화를 나누고 글을 쓰는 일을 한다. 이전과는 완전 다른 일들이고 정년이 없는 일들이다. 큰돈이 되지는 않지만 나 혼자 쓸 만큼은 들어온다. 대개의 도시인들은 남이 제공하는 일자리를 통해 밥벌이를 한다. 도시인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남들이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조직에 몸담던 사람이 조직을 떠난 후 갖게 되는 가장 큰 비애는 그렇게나 자주 오던 연락이 딱 끊어진다는 것이다. 조직원은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의 직함으로만 가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나 역시 전공분야에서의 직함이 없으니 그쪽 분야에서는 나를 더 이상 초대하지 않는다.

나 역시 예전에 하던 일과는 완전히 결별하고 다른 삶을 살려고 했다. 그러나 일 년 전 마을 대표가 되면서부터 하는 일은 대부분이 예전 일과 관련된 것들이다. 마을회관 관리하기, 마을구판장 짓기, 빗물저금통 설치하기, 마을도로 포장하기, 마을지하수 관리하기, 마을길과 마을숲 가꾸기,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한 마을회의 진행하기가 그렇다. 몇 달 전에는 마을 안에 생태마을연구회를 만들었다. 또 비폭력대화를 통한 중재활동을 하다 보니 마을 안에서의 토지사용이나 시설물 설치를 둘러싼 갈등을 중재하게 되었고, 지인을 통해 그의 회사가 관리하는 임대아파트단지내의 갈등을 중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예전의 경험이 마을대표일이나 중재활동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결국 모든 일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농촌이 주는 선물은 새로운 삶의 방향과 속도
20대 초반, 단순한 끌림으로 들어간 농과대학에서 만난 농촌은 권태롭고 무기력한 공간이었다. 사회적 의미를 찾아 돌아온 도시는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치열하고 삭막한 공간이었다. 뒤늦게 낳은 허약한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다 40대 중반에 새로운 농촌을 만났다. 그 만남이 이어져 나이 오십에 인생을 리셋할 공간으로 농촌을 선택하게 되었다.

내게 농촌은 아름답고 풍성하고 안전한 곳이다. 돈으로 환산하자면 이전에 받던 월급을 다 주어도 살 수 없는 자유로운 시간과 아름다운 자연이 가까이에 있다. 공기는 청정하고 물은 달콤하다. 화학비료를 주지 않아도 나무와 풀은 저 알아서 피고 진다. 남이 나를 써주지 않아도 아침에 눈을 뜨면 할 일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손과 발을 움직이면 귀한 것들이 얻어지고 그것들을 주변에 나누다 보면 소소한 벌이가 뒤를 잇는다. 주변에는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귀촌한 벗들이 있어 도시보다 이야기 거리가 풍성하다. 마을 사람들이 나를 지켜주니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아도 안전하고 밤길을 혼자 걸어도 무섭지 않다. 서로를 믿으니 진정한 자유가 있다.

이 아름답고 풍요롭고 안전한 농촌이 내게 주는 선물은 새로운 삶의 방향과 속도이다. 남들 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리던 길에서 벗어나 나는 다른 길을 만들고 있다. 하루 한 평씩 마을숲과 마을공간을 가꾸고, 또 한편으로는 비폭력대화 공부를 깊이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치유의 공간을 마을에서 만들어가고 싶다. 그 길 위에서는 남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으니 자유롭고 홀가분하다. 백 살까지 산다고 생각하면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다. 쉬고 싶으면 쉬고 가고 싶으면 간다. 휴식과 자기돌봄의 여유가 있고, 불안함 대신 안정감이 있다. 농촌은 꿈을 위해 평생 할 일이 있는 곳, 내 꿈이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그런 곳이다.

글·사진 윤인숙

 

27※필자 윤인숙: 산청간디숲속마을 대표.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신도시를 만드는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1년 반 주말 시골살이를 한 후 회사를 그만두고 산청의 생태마을로 귀촌했다. 박하 밭을 가꾸는 일과 비폭력대화를 이웃에게 전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휴식과 치유가 있는 힐링마을을 만드는 게 꿈이다. 저서로는 주말 시골살이의 즐거움을 담은 『마음을 정하다』(2014,한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