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생각이 이끄는 한발 앞선 농업

이수미 이수미팜베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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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에 들어서자 비탈 위로 복분자 밭이 펼쳐졌다. 푸른 물결 사이로 검붉은 알갱이가 보석처럼 박혀있었다. 풀을 헤치며 복분자를 따고 있는 이수미 씨(46)의 모습이 보였다.

경남 거창군에 있는 ‘이수미팜베리 농장’은 이수미 씨네 집 바로 아래 언덕에 이어져 있다. 부부는 거창 시내가 보이는 1만 4천 평의 황토 언덕 밭에서 베리를 기른다. 복분자와 블랙베리, 블루베리, 아로니아, 산딸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매년 생산량이 다르지만, 다섯 종류의 베리를 모두 합해 한 해에 보통 40~50톤 정도 수확한다. 주로 생과로 판매하고 30% 정도만 과즙이나 진액, 차, 후레이크 등 2차 가공품으로 만들어 판다.
어느 작목을 기르든 간에 농부의 삶은 고단하고 바쁘겠지만, 복분자는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특히나 부지런해야 한다. 열매가 익자마자 일일이 따주어야 하는데, 적기를 놓치면 하룻밤사이에도 금방 물러져 맛이 없어진다.
복분자가 한창 무르익는 유월. 한 해 농사 중 가장 바쁜 시기에 찾아온 손님에게 이수미 씨는 “취재 와준 덕분에 드디어 쉰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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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투성이의 척박한 땅을 3년간 일구어 오늘의 베리 농장을 만들었다.
자갈투성이의 척박한 땅을 3년간 일구어 오늘의 베리 농장을 만들었다.

긴 생머리 휘날리며, 삽질을 하다
이수미 씨는 고향인 거창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후 서울로 갔다. 유명의류기업에 취직해 꿈을 키워갈 무렵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아버지와 사이가 각별하셨던 어머니는 홀로 지내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이수미 대표는 다시 거창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농업에 긍정적인 바람을 불어넣고 싶었어요.” 농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이수미 씨가 말했다. 당시 농촌에는 아직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했다. 긴 생머리에 하이힐을 신고 서울에서 온 앳된 아가씨가 양계를 하겠다고 나서니 마을에선 다들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오죽하면 지역 신문에서 취재하러 나왔다고 한다. 동네 어르신들은 여자가, 그것도 결혼도 안 한 아가씨가 혼자 양계를 어떻게 하느냐며 고개를 저었다.
“제 또래 친구들은 커피숍에 놀러 갈 때 저는 양계장에서 삽질을 했어요. 닭은 질병이 돌면 하루아침에 다 죽어버리기도 해요. 몇백 마리를 보내고 나서야 내성이 생겼어요. 죽은 닭을 스스로 해부해보기도 하고,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닭 만 마리에 직접 예방주사를 놓으면서 온몸으로 부딪쳤죠.”
금방 관둘 거라던 주변의 우려 섞인 예상과는 달리 이수미 대표는 18년 동안이나 닭을 길렀다. 6천마리로 시작한 양계장은 4만 마리 규모로 커졌다.

복분자는 인공색소로도 만들기 힘든 진한 빛깔을 띤다
복분자는 인공색소로도 만들기 힘든 진한 빛깔을 띤다
집 벽면의 파란 색은 하늘을, 보라색은 복분자를 의미한다
집 벽면의 파란 색은 하늘을, 보라색은 복분자를 의미한다
이수미 대표는 건강한 먹거리를 만든다는 농민의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농사짓는다.
이수미 대표는 건강한 먹거리를 만든다는 농민의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농사짓는다.

사람들에게 먹이고픈 건강한 먹거리
사룟값이 폭등하면서 수익성이 낮아지자 이수미 씨는 양계 사업을 정리했다. 수십만마리가 들어가는 대규모 자동화 축사가 아니고서야 경쟁이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복분자를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
2008년부터 베리 농사를 시작하면서 무농약을 고집하여 올해는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복분자는 씻지 않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안전해야 해요. 내 아이, 내 남편에게 먹일수 있는 건강한 먹거리를 만드는 게 농민이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수미 대표는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농산물’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제품을 가지고 백화점이나 유기농 매장에 직접 나가 소비자를 만나기도 했다. “매장에 온 사람들에게 얼마나 정성을 다해 만들었는지 설명했어요. 그런데 농약을 치지 않았다고 하면 절반은 안 믿는 거예요. 재배한 과정을 따지기보다 가격이 싼 상품을 먼저 찾더라고요.  
소비자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는 일에 지칠 무렵 다녀온 대산농촌재단의 해외농업연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독일의 농가민박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며 이수미씨는 자신의 농장을 떠올렸다.
“농장에서 답을 찾았어요. 말과 글로 아무리 설명하는 것 보다 농장에서 한 번 보는것이 훨씬 효과가 좋아요. 복분자를 눈으로보고, 수확하고, 맛보면서 자연스레 교육이 이루어지는 거죠.”

“매일 싸워요”라는 말과 달리 부부 사이에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남편 박창구(54) 씨는 이수미 씨의 든든한 조력자다.
“매일 싸워요”라는 말과 달리 부부 사이에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남편 박창구(54) 씨는 이수미 씨의 든든한 조력자다.

누구나 찾아와 위로받는 농장
집 바로 옆에는 농가식당 겸 디저트 카페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찾는 이들에게 베리로 만든 디저트를 맛보여주면서 농장도 보여줄 계획이다. 주변에서는 이런 외진 곳까지 사람들이 찾아올까 걱정했다. 이수미 씨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농장을 만들고 싶단다.
“어떤 분이 혼자 와서는 농장 풍경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울고 간 적이 있어요. 그 기분을 알 것 같았어요. 각자 힘든 일을 정리할 수 있는 장소, 거리는 조금 떨어져있지만 알아서 찾아오는, 누구나 올 수 있는 그런 농장을 만들고 싶어요.”
이수미 대표는 자연 속에 위로가 있다고 말했다. 고된 노동을 끝마칠 무렵 지는 해를 보거나,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농장의 푸른 물결을 마주할 때면 마음속에 있는 괴로움과 아픔을 잊곤 한단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며 이수미 씨는 농장 주변에 꽃을 심고, 의자를 놓고, 잡초를 뽑는다.

‘가시’를 이겨내는 농민의 자부심
“복분자는 가시가 있어서 좋아요. ‘쉽지 않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잖아요. 우리 농업 현실처럼요. 어려워도 이겨내야죠.”
이수미 씨는 어렵기 때문에 자부심을 더욱 느낀다고 말했다. 여성을 향한 편견이나 소비자의 불신 등 인생 속의 ‘가시’를 그녀는 지혜롭게 헤쳐나갔다. ‘사람들 입에 한 움큼 넣어주고 싶은’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이수미 씨는 오늘도 그렇게 가시밭으로 향한다.

글·사진 김병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