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서의 삶, 반농반X를 꿈꾸며

글·사진 김현희

농사는 내 삶의 일부, 그러나 모든 것은 아니다
  ‘반농반X’는 일본의 생태운동가 시오미 나오키(鹽見直紀)가 처음 쓴 말로, 삶의 반은 농사를 짓고 반은 각자의 소명이나 특기를 살려 살아가는 모습을 뜻한다. 이 방식은 내가 귀농을 준비하던 2016년 무렵 이미 유행하던 말이었다. 반농반X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농사에 생계를 다 걸지 않기 때문에 진지하지 않은 접근이라 여기곤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반농반X는 나 같은 평범한 청년이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자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지속 가능한 대안이자, 농업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진지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반농반X에 대한 정의는 단순하다. ‘농사는 내 삶의 일부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수입을 농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이 정의는 귀농·귀촌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농촌 현장에서는 이미 상식과도 같은 내용이다.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4년 농가 및 어가경제조사 결과’에 따르면 농가 소득에서 농업 외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40%에 달하며, 공적 보조금을 뺀 순수 농업소득은 전체의 19%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장의 농민들은 이미 소득에 있어 반농반X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농업의 정체성이 반농반X인 것이다.

현실은 반농반X만 돼도 감지덕지
  그래서 나는 농촌에서의 반농반X가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살아보니 현실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반농반X는 당장 농촌에 내려온 무자본, 무기술, 무연고의 청년에게는 턱없이 높은 기준이자 도달하기 힘든 경지였다. 당장의 나에게는 감히 꿈꾸기도 벅찬, 아주 오랜 시간 지향해 나가야 할 목표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먼저, 농사가 내 소득이나 시간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은 10년을 살아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술과 몸이 단련된 농부들조차도 어려운 일인 만큼, 초보 농부가 안정적인 소득을 내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다. 두 번째로, 특정한 ‘X’가 소득의 나머지 50%를 책임져야 한다는 전제 조건도 만만치 않았다. 농촌 지역 내에서 확고한 수요가 있고, 농사와 병행할 수 있을 만큼 시간적으로 유연한 기술이나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실로 부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와 주변의 귀농 청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만의 반농반X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다. 각자의 우여곡절과 쓰라린 실패, 그리고 눈물겨운 도전기를 겪으면서 말이다. 이 도전은 지역에 다양한 활력을 주변에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지금부터 반농반X를 향해 걸어온 나의 지난 10년간의 생존형 도전기에 대해 나눠볼까 한다.

2018년, ‘청년로망시험포’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하우스 세 동과 노지 밭 200평을 일구고 각자가 꿈꾸던 농촌 로망을 실현해보았다

도시 직장인에서 농촌 직장인이 되다
  나의 첫 농촌 생활은 직장인으로 시작했다. 순창으로 처음 내려오면서 귀농귀촌지원센터의 교육팀장으로 활동했다. 체계적으로 농사를 배우고, 낯선 지역사회에도 안착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일을 하며 틈틈이 병행하는 농사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자아실현에 가까웠다. 당시 실습용 밭을 관리하긴 했지만, 언제나 센터 일이 우선이었다. 작물을 정성껏 심어두고도 교육 일정에 쫓겨 때를 놓치면 밭은 금세 풀밭이 되었고, 그러면 또 그 무성한 풀밭이 교육생들의 예초기 실습장으로 변하곤 했다.
  3년 차 때는 청년들과 함께 1년짜리 장기 교육을 기획했다. 청년들이 각자가 품고 온 농촌에 대한 로망을 직접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청년로망시험포’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청년 5명과 함께 하우스 세 동과 노지 밭 2000평을 경작했다. 수확한 농산물은 꾸러미를 만들거나 농협, 지역 장터에 내다 팔아 수익을 나누어 가졌다. 들인 정성과 땀에 비해 농사로 얻은 금전적 수입은 미미했다. 만약 교육 사업의 일환이 아니었다면 철저한 마이너스였을 시도였다.
  이 경험은 안전하게 각자가 원하는 농촌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고, 이로 인해 지역에 정착하는 청년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모두들 교육이 끝나자 “전업농이라는 길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좀 더 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센터를 그만두고 전업농으로의 도전을 시작했다. 아니, 시작되는 줄만 알았다. 그것이 결국 농촌의 ‘N잡러(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는 다중 직업인)’로 거듭나는 서막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전업농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갖가지 일을 병행하기 시작했던 것이 반농반X의 시작이었다.

전업농과 N잡러, 그 어딘가를 헤매다
  야심찬 전업농의 첫 걸음은 마을에 있는 두릅 밭을 빌리는 것이었다. 어르신이 오랫동안 방치한 두릅 밭의 묘목은 상당수가 고사해 있었고, 수확할 것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이른 봄날, 쑥쑥 올라온 두릅을 정성껏 따서 서울로 보내니 돈이 되어 돌아왔다. 내 손으로 직접 일군 첫 영농자금이 생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양봉도 함께 시작했다. 귀농 센터에서 3년간 배운 지식도 있었기에 호기롭게 벌 10통을 사서 밭에 두었다. 어설프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몇십 통이나마 꿀을 채밀해 팔았다. 빌린 밭에는 고구마도 심고 들깨도 심었다. 충만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수입이 충분하지 않았다. 필요한 돈은 많은데, 어설픈 초보 농부의 농업 소득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돈이 되는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병행했던 일은 8가지 정도였다. 1. 농촌기획자, 2. 체험농장 보조강사, 3. 젖소 체세포 검사원, 4. 소 밥과 돼지 밥 주기를 비롯해 부족한 일손을 채우는 일꾼, 5. 성수기 관광지 노점 판매 보조원, 6. 공예품 제작 및 판매, 7. 체험 프로그램 강사, 8. 각종 매체 글 기고 및 귀농 사례 발표자. 당시에 나는 한 푼이 아쉬웠기 때문에 누군가 일을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는 ‘예스맨’으로 살았다.
  가정에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던 시기가 찾아오며, 농사와 N잡러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계속 이어갈 수는 없었다. 결국 지역 영농조합법인에 취직해 3년간의 직장 생활을 다시 연장하게 되었다. 두릅 밭도 반납하고 벌통도 처분했다. 밭농사도 놓고 싶었지만,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정말 농촌에 남아있는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잘 관리하지 못하고 돈도 안 되는데도 매년 고집스럽게 농사를 지었다.

나의 농사 선생님과 함께 논농사를 짓는 모습이다.

반농반X의 기회가 찾아오다
  어느 날, 알고 지내던 농사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선생님은 순창에서 자연 축산으로 돼지를 기르고 유기농 밭농사와 논농사, 과수 농사 등 다양한 작물을 오직 부부의 노동력만으로 키우고 있는 분이었다. 생태적이고 건강한 농사를 짓고자 했던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본보기였기에, 농장에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돕곤 했다.
  선생님이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돈 안 되는 농사만 계속 지으면 결국 버틸 수가 없다. 농사로 현실적인 소득도 직접 만져보고 성취감을 느껴야 계속 흙을 만질 힘도 나고, 이 지역에 뿌리내릴 마음도 생길 거다. 내가 짓던 논을 빌려주마.”
  제안을 받았던 당시에는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호의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본인이 가꿔오던 논을 선뜻 내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깊은 마음 씀씀이인지 깨달았다. 선생님은 작업하기 힘든 논을 남겨두고 농사짓기 가장 수월한 산 아래 논 아홉 마지기(약 1800평)를 내게 빌려주셨다.
  풍년새우와 긴꼬리투구새우가 헤엄쳐 다니는 건강한 논에서 선생님과 함께 모내기를 하고 물 관리 요령을 배우며 벼농사를 지었다. 첫해 유기농으로 재배한 쌀이 톤백 4개 반 정도 수확되었고, 전량을 직거래로 팔아 1000만 원이 조금 넘는 수익을 냈다. 귀농 후 오로지 농사만으로 벌어본 가장 큰 돈이었다.
  물론 이때도 총수입을 따져보면 다른 일들을 병행해서 버는 소득이 더 컸다. 그러나 닥치는 대로 일을 맡는 예스맨의 굴레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농사로 안정적인 소득이 뒷받침된다는 사실은 나의 내면에 큰 안정감을 선물했다. 그리고 엄청난 자부심도 주었다. 비로소 내가 농촌에서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빗자루 공예로 만든 공예품들. 공예는 당장 큰 돈은 되지 않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일이다.

X, 그 다채로운 가능성
  어느덧 논농사는 4년 차에 접어들었다. 선생님과 함께 돼지를 돌보면서 수익을 나누게 되었고, 생계의 절반을 농업으로 채우는 진정한 ‘반농(半農)’의 형태가 얼추 갖춰지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나의 삶을 지탱해 줄 지속 가능한 ‘X’는 과연 무엇이 될 것인지를 고민 중이다.
  현재 당장 큰 돈은 되지 않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일은 공예다. 죽공예를 비롯해, 빗자루 만들기 등 지역 산천에 널린 풀과 나무를 활용한 자연 공예를 꾸준히 하고 있다. 내 손재주가 그리 대단치 못하고, 수지타산도 맞지 않지만 상관없다. 농촌에서 재료부터 직접 모으고 가공해서 엮고 만드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큰 보람과 성취감을 주기 때문에 나에게 이 일은 평생 이어나가고 싶은 일이다.
  돈이 되면서 시간의 효율성이 좋은 일을 꼽자면 강사 활동만 한 것이 없다. 나는 친환경 농부로서의 정체성을 살려 다양한 생태 교육 활동을 병행해왔다. 논 체험을 나가기도 하고, 먹거리 교육이나, 자연물을 활용한 공예 교육을 진행한다. 2년 전부터는 순창군 환경 강사로도 위촉되어 마을과 학교를 돌며 환경 교육에 나서고 있다. 농촌의 생태계를 지키고 아이들과 주민들에게 환경의 소중함을 알리는 일이기에 보람이 있다. 올해는 강사로서의 전문성을 다지기 위해 환경교육사 3급 자격증 취득에도 도전하고 있다.
  농촌에서 살아볼수록 특정 분야의 전문기술이 없다는 사실이 참 아쉽게 느껴진다. 내 주변을 둘러보면 각자의 방식대로 훌륭하게 ‘X’를 만들어가는 이웃들이 참 많다. 지역의 농산물로 쌀빵을 만들어 판매하거나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고 피부관리나 마사지 자격증을 따 활용하기도 한다. 마을 도서관에서 일하며 사서 과정을 공부하기도 하고, 면사무소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거나, 지역 신문사 기자로 뛰거나, 다슬기를 까는 소일거리로 생계를 보탠다. 손재주가 좋은 청년들은 집수리나 목수 일을 업으로 삼기도 한다. 이렇듯 각자의 처지와 상황에 맞춰 농사의 비중을 조절하고, 지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들을 찾아 자신만의 생태계를 구축해 나간다. 농촌에서 농사와 다른 직업이 결합하는 양상과 층위는 그 어떤 곳보다 다채롭고 생동감 넘친다. 농촌은 도시만큼 정형화 되거나 경쟁이 심하지 않기 때문에, 눈치를 살피거나 체면을 차리거나 나이를 신경 쓰는 문제에서 조금 더 자유롭다. 그만큼 새로운 도전을 펼치기에 참 좋은 환경이다.

청년이 농촌에서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든든한 관계 자본을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청년이 농촌에서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든든한 관계 자본을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청년에게 필요한 ‘절반의 여유’
  생계에 쫓기는 전업농이나 시간에 얽매인 직장인의 굴레에서 한 발짝 벗어나니 비로소 농촌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농촌에 와서 시간을 벌고, 그 시간을 통해 돈이 안 되더라도 나에게 진짜로 필요한, 가치 있는 일들을 찾아갈 수 있었다.
  나에게 그런 일 중 하나는 지역의 공동체를 가꾸는 일이다. 나는 ‘(사)10년후순창’의 이사로 활동하며 다양한 활동을 한다. ‘공간 이음줄’이라는 공유공간도 가꾸고, 매월 한 번씩 열리는 ‘촌시장’이라는 플리마켓도 8년째 운영 중이다. 토종씨앗을 보전하는 모임도 참여하고, 밴드 활동을 통해 정기 공연 무대에도 오른다. 경험해본 농촌 현실은 매서웠지만, 그래도 가슴속에 품고 온 로망은 쉽게 시들지 않았다. 여전히 지역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겨나는 게 좋다.
  농촌에서의 이런 활동은 귀농 청년들이 흔히 겪는 심리적 고립감을 씻어내고, 지역 주민들과 끈끈한 관계망을 맺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농촌에서 든든한 관계 자본을 만드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시간적 여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언젠가 군청의 일자리 담당 공무원이 나를 찾아와 하소연한 적이 있다. 행정에서 예산을 들여 청년 일자리 사업을 만들어도 막상 청년들의 신청이 저조하다며, 주변 청년들에게 홍보 좀 해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년들의 생각은 다르다. 안정적인 일자리도 아니고 급여가 넉넉한 것도 아닌데,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를 꼬박 매여 있어야 하는 일자리는 농촌에 갓 정착하려는 청년들에게 매력적이지 않다. 당장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처음 농촌에 온 청년들에게는 지역의 곳곳을 탐색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 공무원에게 “한 사람을 뽑아 풀타임으로 일을 시킬 예산이라면, 차라리 일하는 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두 사람을 뽑아달라. 그 절반의 여유 시간이 청년들을 지역에 정착하게 만드는 진짜 매력적인 일자리가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농촌에서 주체적으로 살고자 찾아오는 청년들에게는, 생계의 위협 없이 다양한 일과 삶의 방식을 안전하게 실험해 볼 수 있는 심리적, 정책적 온상이 필요하다. 그 공간은 실패를 용인할 만큼 안전해야 하며, 청년이 고립되지 않도록 지역의 따뜻한 관계들과 연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최소한의 시간과 여유가 주어질 때, 청년들은 각자가 품고 온 로망을 씨앗 삼아 농촌에 없던 새롭고 창조적인 일들을 꽃피울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반농반X를 찾아낸 다채로운 이웃들이 우리 농촌에 더 깊이, 더 많이 뿌리내리기를 소망한다.

필자 김현희: (사)10년후순창 이사
2016년 순창으로 귀농했다. 전국귀농운동본부 순창군귀농귀촌지원센터 교육팀장, 순창친환경연합 교육팀장을 거쳐 현재는 유기농 농부와 환경 강사, 공예가로 살고 있다. 2019년부터 한국농어민신문에서 청년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