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 오디세이 – 사람이 돌아갈 곳, 제도가 돌아갈 곳

글 김규호

이타카, 척박한 바위섬으로의 귀환
  최근 국내 문화계의 가장 큰 화제는 단연 ‘오디세이’다. 9월 6일 동명의 영화가 개봉 33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고, 관련 서적의 8월 판매량은 전년 동월 대비 31배나 늘었다. 무려 2700여 년 전의 고전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트로이 전쟁 이후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10년간의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 대서사시. 지난 8월 31일 타계한 미국의 농부 철학자 웬델 베리는 《소농, 문명의 뿌리》에서 이 이야기를 전쟁에 사로잡힌 세계를 떠나 가정과 땅을 돌보는 삶으로의 지난한 여정으로 해석한다. 서사 구조는 바다, 즉 어둠 짙은 자연과 변덕스러운 신들의 힘의 지배를 받는 비인간적 질서와 맞닿아 있고, 오디세우스의 눈과 발은 ‘삶의 근원인 기억과 전통, 시골 마을, 모두의 공동 자산인 땅과 농부들이 쉼 없이 경작해 온 계단식 농토가 빛을 발하는’ 고향으로 향한다. 여신 칼립소가 제안하는 영생과 풍요의 삶을 마다하고 척박한 바위섬과 필멸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에서, 웬델 베리는 추상적이고 불멸하는 낙원보다 구체적이고 한계가 있는 대지를 선택하는 한 위대한 인간의 의지를 읽어낸다.

  최근 우리 정부가 농지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데이터와 문서 중심으로 살핀 1차 기본조사가 7월 말 종료되었고, 8월부터는 올 연말을 기한으로 하는 현장 심층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조사의 목적으로 알려진 ‘농지투기 근절’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해 정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농지 정책의 밑그림이 분명치 않다 보니, 농촌 현장에서는 이 예기치 못한 속도전의 목표와 의미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혼란과 불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날로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정부는 1차 기본조사를 통해 불법 행위가 의심되는 농지가 조사 대상 농지의 27%에 달하는 사실이 드러난 것만으로도 이 조사의 필요성과 일차적인 성과를 말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심층조사를 거쳐 이를 다시 ‘과거 별문제 없었거나 현재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사례’와 ‘명백한 투기·편법 사례’로 깔끔하게 구분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 구분 자체가 이 조사를 통해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할 도구는 지금 당장 필요하지만, 정작 그 도구는 일단 문제를 다 풀어 보고서야 윤곽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이 조사가 직면한 딜레마의 한 단면이다.

  결국 이는, 과연 이 항해가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를 알고 시작한 제도의 ‘귀환길’인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필자는 여기서 특별히 ‘항해’의 주체가 ‘조사’가 아닌 ‘제도’임을 눈여겨봐 주기를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미덥든 허술하든 ‘조사’의 시기·항로·방법론은 이미 나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깊은 층위에 존재해야 할 이 조사의 지향점으로서 국가가 이번에 확보되는 데이터로 무엇을 어떻게 재편하겠다는 것인지, 대체 어떤 공공질서 안에서 농지를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 농지는 ‘비유동성’을 특징으로 하건만 어찌 된 노릇인지 관련 사안을 들여다보려면 우리는 매번 어지럽고 멀미가 난다. 글로벌 공급망의 균열이 일으키는 파도가 사방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가운데, 한 국가의 존립 조건과 모든 세대의 안녕을 고려하여 농지의 역할, 위상과 보전·활용의 방향을 규정해야 하는 관련 법과 제도는 지금 어디쯤을 표류하고 있는가. 농지를 가졌거나 이용하는 사람은 목하 얼마나 떠내려온 것인가. 사람이 돌아갈 곳과 제도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1949년 6월 21일 제정된 농지개혁법을 공포하기 위해 제작된 전단.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49년 6월 21일 제정된 농지개혁법을 공포하기 위해 제작된 전단.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농지개혁, 신생 국가의 기반을 닦다
  현 농지제도와 그 근저에 자리한 국민 정서의 뿌리는 해방 이후 소작 구조를 혁파하고 자작농 중심의 농지 소유·이용 체계를 확립한 ‘농지개혁’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7월 제정·공포된 제헌헌법이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제86조)라고 규정하면서 소작 문제 해결의 단초가 처음 마련되었고, 이후 「농지개혁법」(1949.6.21.제정)이 시행되며 전근대적인 지주제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 법은 농지 소유 자격을 ‘가족 단위로 자작하는 농가’에만 부여했는데, 이는 당시의 지배적 영농 단위가 ‘가족노작형(家族勞作型) 소농’이었음은 물론, 농지가 개인 소유권의 대상이 아닌 가산(家産)이었다는 사실까지 아우른다. 이러한 비(非)농민의 농지 소유 금지 원칙과 더불어 소작제 금지, 3정보(3ha)라는 소유상한의 설정 등이 농지개혁의 세 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전체 농지의 95% 이상이 자작지로 전환되었고, 농가 기준 자작농 비율도 1945년 14.2%에서 1951년 80.7%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해방 이후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농지개혁이 미친 영향은 단순히 농업 부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농지개혁은 기존 지배계급을 해체해 자작농과 자유인 중심의 국민적 정치 공동체의 기틀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신생 국가의 유일한 부존자원을 활용해 향후 산업화와 교육열 등을 뒷받침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가령 농지 소유 상한 규정은 토지 과점(寡占)에 기반한 봉건적 질서와의 결별 및 초기 조건의 균등화 차원에서도 중요했지만, 한편으로 2·3차 산업 발전이 더뎠던 당시 상황에서 농업이 가능한 한 많은 인구에게 경제적 토대를 제공해야 할 필요성을 반영한 측면도 컸다. 단지 ‘농업정책’을 넘어 강력한 ‘부의 재분배’ 정책이자 ‘복지 정책’으로서 국민적 지지와 열망을 바탕으로 추진된 사안이 ‘농지개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현시대에 우리나라 국민 경제에 대한 농업의 기여가 그 면모나 영향력 측면에서 과거와 같을 수는 없으며, ‘농지’ 관련 조사나 제도개선이라는 사안을 대하는 국민적 감수성도 크게 변했다. 1950년 전후와 달리 농지 문제는 경제 전반적 이득보다는 식량 안보와 부동산 정의라는 상대적으로 추상적인 가치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과거에는 ‘지주 대 소작농’이라는 구도가 선명했으나, 지금은 실경작자 외에도 은퇴 후 귀농, 상속, 임차 규모가 큰 전업농, 주말농장, 투기 목적 외지인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이에 ‘농지’의 농업적 필요보다 자산 형성 수단으로서의 유용성이 일반 국민 사이에 한결 익숙한 사회적 감각이 되어 있으며, 때로 이러한 ‘유용성’을 농가로서도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버팀목으로 활용하곤 하는 실정이다.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과 농업 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많은 선진국에서 공통된 현상이다. 그러나 농지를 둘러싼, 그리고 농지로부터 기대되는 기회와 수익의 양상이 이처럼 복잡하고 어수선한 나라는 거의 없다. 이는 상당 부분, 1950년대 후반 농지개혁사업이 완료되고도 농지에 관한 기본법을 갖추기까지 다시 40년 가까이 걸린 제도적 지체에서 비롯된다.

국회에서 농지 공공성 회복과 이용·보전·관리를 주제로 5회 연속 토론회가 진행되었다.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국회에서 농지 공공성 회복과 이용·보전·관리를 주제로 5회 연속 토론회가 진행되었다.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아홉 번의 시도 끝에 제정된 농지법, 그러나…
  농지개혁법은 농지 재분배와 그 이후의 초기 상태 유지에 주안점을 둔 법이었기에, 농지개혁이 종료되면 농지제도 전반에 대한 종합적 전망과 체계적 비전 아래 분배된 농지의 보전과 효율적 이용방안을 규정할 농지 관련 기본법을 제정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1952년, 대만(농업발전조례)이 1973년 서둘러 확립한 이 법을 우리는 1994년 말에야 비로소 제정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농지 관련 법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단편적이고 임기응변적 성격이 강했다. 예컨대 국가 주도 개발경제기에 주택·산업 용지 등으로의 대규모 농지 전용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토지를 싸게 공급할 수 있도록 농지제도의 정립을 후순위로 미루다, 1970년대 초 세계적인 오일쇼크와 곡물 파동을 계기로 비로소 무분별한 농지 훼손과 전용을 경계하기 위한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절대농지’(훗날 ‘농업진흥지역’ 개념으로 전환) 개념이나 ‘농지전용허가제도’ 등을 도입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농지법 제정이 난항을 겪는 사이 제도와 현실의 괴리는 커져만 갔다. 당시의 쟁점은 결국 전술한 ‘농지개혁 3원칙’이 여전히 유효한가로 요약된다. 우선 농지의 소유 자격 각 요소, 즉 ‘가족’, ‘자작’, ‘농가’ 개념 하나하나가 현실의 변화를 담아내기에 점점 벅차졌다. 가령 종자와 기술을 선택하고 판매 전략을 구상하는 등의 ‘자영(自營)’ 개념이 부상하면서, 이에 더해 부분적인 농작업 외부 위탁을 결합하는 방식이 농가가 모든 농작업을 전담하는 ‘자작’ 개념에 들어맞지 않기 시작한 것이 한 예다. 농지 소유 상한도 현실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재검토가 필요했다. 산업화와 경제 발전으로 농업·농촌 인구가 줄어들면서 상한 규제를 지속할 사회·경제적 명분이 약해졌고, 시간이 흐르며 ‘균분상속’으로 안 그래도 영세한 농지의 분산(分散)이 심화되면서 농업 경쟁력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의 ‘규모화’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농과 상속, 개발 압력 증대 등으로 비농민의 자본 유입이 늘고 낮은 농업 수익성 탓에 농민이 농업소득만으로 농지를 구매하기가 어려워지면서 농지 임대차의 현실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중 제도에 먼저 반영된 것은 임대차였다. 1980년 헌법에 ‘농업생산성의 제고와 농지의 합리적 이용’이라는 단서 하에 ‘임대차 및 위탁경영’을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허용하는 내용(제122조)이 담겼고, 1985년 말 기준으로 임차지 비중이 이미 30% 수준을 넘는 것으로 나타난 상황에서 이듬해인 1986년에는 「농지임대차관리법」도 제정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 탄생한 개정헌법에서도 농지의 임대차와 위탁경영에 대한 인정(제121조 제2항)은 유지되었다. 다만 이때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국가의 의무가 동시에 같은 조 제1항에 명시됨으로써, 미묘한 긴장 관계에 있는 두 항을 어떻게 해석하고 법률로 규정할지를 둘러싼 논쟁이 오늘날까지 분분한 상황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이농·은퇴 농가의 증가와 UR 협상 이후 농업 구조의 변화로 영농조합법인의 농지 소유가 가능해지고 농업진흥지역 위주로 농지 소유 상한 규정도 완화되는 등 농지개혁의 지난 3원칙이 모두 수정되기에 이르렀다. 1995년 WTO 출범 전후로도 이 흐름은 이어져 마침내 1994년 12월, 여러 개별법에 흩어져 있던 농지 관련 법률들을 모아 「농지법」이 제정(1996.1.1. 시행)되었고, 이는 1958년 이래 아홉 차례의 시도 끝에 이뤄낸 결실이었다. 그러나 농지 소유며 임대, 처분 등에 대하여 법에 담긴 많은 원칙과 예외들의 상당수가 법이 시행된 1996년 이후의 취득 농지에만 적용된다. 공백기에 이미 공고해진 사유재산권을 지금 와서 소급하여 다루기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농지는 국가적으로 농업 구조와 생산양식을 가장 근원에서 규정하는 핵심 인프라의 위상을 갖는다.
어느 시대에나 농지는 국가적으로 농업 구조와 생산양식을 가장 근원에서 규정하는 핵심 인프라의 위상을 갖는다.

규제와 규제 완화 사이의 진자 운동을 넘어
  농지법이 제정되고도 벌써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이 기간의 농지제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규제와 규제 완화 사이의 진자운동(swing of the pendulum between regulation and deregulation)’이라는 개념이 적절할 듯하다. 이 ‘스윙’의 동력은 여전히 자의적·정치적 시장 개입에서 온다. 소유 규제를 완화하고 외지인의 취득 문턱을 낮추고 전용이 쉬워지면 2021년에 경험한 ‘LH 직원의 신도시 투기’와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국민적 공분을 의식해 각종 규제를 강화하면, 이른바 ‘거래절벽’에 처해 또 다른 공분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지방 소멸’과 ‘수축 사회’가 거론되는 지금, 과연 투기는 전 국토, 전 농토에 만연한 현상일까? 거래절벽은 규제로 인한 정부실패가 원인일까, 아니면 농사가 어떻게 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발생하는 시장실패의 성격이 강할까? 흐트러진 농지제도가 농업의 경제적 잠재력과 구조적 진화 가능성을 저해하고, 그 결과로 쇠퇴하는 농업이 다시 우리 사회에서 농지제도 재정립의 필요성 논의를 냉소하거나 불신하게 만드는 ‘인과 순환’의 고리를 우리는 얼마나 정직하고 뼈아프게 직시하고 있는 것일까. 농지개혁 종료 이래 약 40년간의 제도 공백과 농지법 제정 후에도 십수 차례 바뀌어온 농지제도는 이 땅의 농지에 저마다의 유산을 남겼고, 그 내력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시간의 지층을 넘나들며 얽히고설킨 미시사(微視史), 즉 어수선하게 쪼개진 개별 필지 단위의 사연에 남아 있다.

  어느 시대에나 농지는 국가적으로 농업 구조와 생산양식을 가장 근원에서 규정하는 핵심 인프라의 위상을 ‘변함없이’ 갖는다. 그런 한편 ‘오늘날’ 농지는 한 개인에게 생산 수단과 주요 자산일 뿐만 아니라, 금융 영역에서는 신용의 기초이며, 행정 영역에서는 각종 자격의 기초가 된다. 여기에 하나의 힌트가 있다. 지금과 이후의 세대를 위해 우리 사회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농업 구조와 생산 양식은 무엇인가. (가령 언젠가 다른 지면에서 필자는 ‘이 땅의 농정에서 식량에 대한 고민을 경유하지 않는 어떠한 혁신도 피상적’이라고 썼다. 이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금은 그 답 위에 농지 규범의 큰 틀을 세움으로써 다시 한번 사회적 재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때다. 이는 필요시 개인의 ‘신용’과 ‘자격’을 위하여 다른 효과적 대안과 수단을 마련하는 농지 외적 제도의 모색까지를 포함한다.

  이것은 농지를 공동체의 역사와 책임이 깃든 기반으로 다시 선택하는 이야기다. 그 바탕에는 좁다란 국토와 잦은 재해 속에서도 땅을 일구고 작물을 길러내는 일, 그리고 오랜 세월 이어질 농업이라는 기초 산업과 그 직업군에 대한 연대감과 존중감이 자리한다. 사람도 제도도 그 원점으로 귀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김규호필자 김규호: 국회입법조사처 농업·농촌 정책 담당 입법조사관(연구관)
과거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환경농업단체연합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일했으며, 자료 조사와 분석을 통해 여야 국회의원의 입법 및 정책개발을 돕는 것이 주 업무이다. 한국농어민신문에 기명칼럼을 월 1회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