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꽃이 피는 계절, 가을의 잔치 입말음식

글·사진 하미현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의 잔치음식. ⓒ입말음식 SPOKEN RECIPE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의 잔치음식. ⓒ입말음식 SPOKEN RECIPE

  “가을엔 마을에 잔치가 참 많았어. 추석, 환갑 잔치, 결혼식… 뭐 날이 좋고 먹을 게 많은 때니까 잔치가 많았던 것 같애. 잔칫날이면 마을 아짐들이 모여서 제일 먼저 ‘과방’부터 짰어요. 닭반대기, 우갱이, 고추장떡, 잡채, 간재미찜, 갈비, 잔치국수, 순대, 과즐… 잔치 음식이 참 많았어. 그중에 내가 손이 빠르고 야무져서 늘 과방장을 맡아 하다 보니 음식들을 다 기억하지.” (강원 평창군 대화면 전금자 님 입말)

  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오래된 맛과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입말음식’ 연구가로, 201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지구 마을을 누비며 맛의 여정을 이어오고 있다. 내가 발견한 가을은 그야말로 ‘잔치의 계절’이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가꾼 온갖 곡식과 열매로 풍성한 가을은 추석이나 백중 같은 명절은 물론이고, 마을 축제까지 동네가 들썩이는 계절이다.

가을 잔치 음식은 강원도 사람들의 심성을 닮아 구수하고 깊은 맛을 낸다. ⓒ입말음식 SPOKEN RECIPE
가을 잔치 음식은 강원도 사람들의 심성을 닮아 구수하고 깊은 맛을 낸다. ⓒ입말음식 SPOKEN RECIPE

잔치 음식 저장고, 과방

  동네에 잔칫날이 찾아오면 제일 먼저 온기가 돌고 왁자지껄해지는 곳이 있었다. 바로 ‘과방’이다. 잔치를 치르려고 집 한쪽이나 야외에 뚝딱 만든 임시 부엌이자 음식 저장고를 말하는데, 이곳은 동네 아짐들이 모여 앉아 손을 보태고 음식을 차려 내던 맛의 소통 공간이었다.

  그때는 요새처럼 봉투에 돈을 담아 내기보다, 손수 만든 정성 어린 음식으로 마음을 나누는 ‘음식 부조’를 보냈다. 특히 오랫동안 한마을에서 같이 자란 친구의 혼례 날이 되면 아주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건넸는데, 이것이 바로 ‘우갱이 떡’이다. 노릇하게 지져낸 수수부꾸미 위에 갓 구운 코스모스나 맨드라미 화전을 덮은 떡이다. 붉고 순한 가을 꽃빛을 곱게 얹은 모습이, 그야말로 마음을 담은 아름다운 ‘맛 보자기’이자 정성스러운 포장이었던 셈이다.

  닭고기와 두부를 함께 찐 닭반대기, 문어에 향긋한 가을 햇고추를 넣고 간장 양념에 조물조물 무쳐 낸 문어고추무침, 수수와 옥수수로 만든 고추장으로 구운 장떡, 뜨거운 수증기에 푹 쪄서 손으로 죽죽 찢어 먹는 간재미찜, 메밀쌀과 시래기, 돼지 선지를 넣고 만든 강원도식 순대, 잡채, 갈비, 잔치국수, 쌀과 콩물을 넣어 보름 동안 정성껏 발효시켜 불에 굽거나 튀긴 달콤한 과즐 등… 가을 잔치 음식은 강원도 사람들의 심성을 닮아 구수하고 깊은 맛을 품고 있다.

  젊은 날 손에 기름 묻혀가며 정성껏 화전을 굽던 여인들이 세월이 흘러 알록달록한 꽃무늬 옷을 맞춰 입고, 맨드라미 꽃밭에 모여 앉아 그 옛날 잔치 음식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은 잊을 수 없는 가을의 한 장면이다. 잔치가 끝날 즈음엔 먼 길을 돌아가는 길에 하객들이 출출해질까 걱정해 남은 잔치 음식을 도시락으로 챙겨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잔치를 맞이한 이에게 보내는 축하와 먼 길을 달려온 이에 대한 고마움을 음식으로 서로 표현했던 것이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다른 지역의 잔치 음식을 꼽자면 전남 진도의 꿀육포가 있다. 집안의 큰 잔치를 준비할 때면 먼저 집간장과 꿀에 재워 만든 육포를 가을 햇빛 아래 잘 말리기 시작한다. 꾸덕하게 잘 마르면 큼직하게 잘라서 초대장 봉투에 담아 마을 어른들을 직접 찾아뵙고 ‘맛 초대장’을 건네는 문화가 있었다. 문자로 초대장을 보내는 지금과 달리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하는 모습은 진심으로 축하를 주고받는 잔치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집안에 큰 잔치가 있는 날이면, 집간장과 꿀에 재워 만든 육포를 초대장 봉투에 담아 '맛 초대장'을 건네는 문화가 있었다. ⓒ입말음식 SPOKEN RECIPE
집안에 큰 잔치가 있는 날이면, 집간장과 꿀에 재워 만든 육포를 초대장 봉투에 담아 ‘맛 초대장’을 건네는 문화가 있었다. ⓒ입말음식 SPOKEN RECIPE

맛의 고전에서 되찾는 잃어버린 시간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동네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어요. 전기가 생기고 나니 웬걸, 더 바빠지더라고요. 전기가 없을 때는 해가 지면 모든 일을 접고 쉬거나 공부를 했는데 전깃불이 들어오니 야간 업무가 생겼던 거죠. 그때는 초 하나를 켜두고 여러 스님들이 한 책상에 도란도란 모여 공부를 같이 했는데 전깃불이 켜지고 나서는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니 사람 정이 좀 사라졌다고 할까요.” (경북 영천시, 정호 스님 입말)

  문명의 편리함으로 시간은 많아지고 물건들은 주변에 넘쳐나지만 왜 우리는 더욱 바빠지고 소중한 것을 발견하기는 어려워졌을까? 인어공주가 다리를 얻은 대신 목소리를 내어주었듯 우리는 편리함을 얻은 대신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건 아닌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세상을 떠나기까지, 축하와 위로가 필요한 자리엔 늘 음식이 함께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장수를 기원하며 머리맡에 수수 옴팡떡을 놓아주었고, 친구의 결혼식엔 꽃길 같은 삶을 살길 바라며 꽃 장식을 얹은 우갱이 떡을 건넸고, 장례식엔 끼니를 놓칠 사돈을 염려해 팥죽을 위로의 선물로 보냈다.

  ‘입말음식’이라는 맛의 고전을 들여다보며 긴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나게 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지를 배운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불을 켜고, 모락모락 오르는 김을 잠잠히 바라보는 일. 볕에 잘 마른 찻잎 한 줌, 가을을 닮은 떡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은, 나에게 가장 귀한 ‘시간’을 내어주는 일이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가을, “참 고마웠다고, 당신이 있어 내가 잘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로 다 전하지 못한 아득한 마음들을, 나지막이 내어놓은 정갈한 밥 한 그릇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시간을 되찾아보는 건 어떨까.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세상을 떠나기까지, 축하와 위로가 필요한 자리엔 늘 음식이 함께했다. ⓒ입말음식 SPOKEN RECIPE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세상을 떠나기까지, 축하와 위로가 필요한 자리엔 늘 음식이 함께했다. ⓒ입말음식 SPOKEN RECIPE

하미현필자 하미현: 입말음식 연구가, 예술가
한국과 지구 마을을 발품으로 다니며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오래된 맛, 아름다운 문화를 수집·연구한다. 글, 전시, 다양한 행사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으로 이어가고 있다. Instagram : spoken_recipe_ha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