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마일을 줄이는 방법,
자치와 협력

이탈리아 모데나는 지역 포도주와 치즈, 햄 등 푸드마일이 아주 짧은 지역 먹거리가 풍성하다.
이탈리아 모데나는 지역 포도주와 치즈, 햄 등 푸드마일이 아주 짧은 지역 먹거리가 풍성하다.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 모데나의 한 포도농장은 아침마다 마을 주민들로 북적인다. 자동차 트렁크에서 1~2ℓ짜리 물통을 꺼내 포도주를 받는다. 지역 특산품인 람브루스코Lambrusco 포도로 제조한 포도주로, 모데나 주민들의 저녁 식탁에서 빠져서는 안 될 메뉴다.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축산 농가들이 생산한 우유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로 가공된다. 양돈 농가들은 ‘프로슈토’ 햄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에게 판매한다. 포도주를 마시며 “내 친한 형님네 농장 포도로 만든 거야”라든가, 치즈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해지는 언덕에서 농장 젖소들이 풀 뜯는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더군”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네들이야말로 진정한 식도락가가 아닐까.
두 달 전 서울 중산층 4인 가족의 주말 저녁 식단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식탁은 풍성했다. 골뱅이무침, 임연수어구이, 동그랑땡. 두부 된장찌개…. 부부가 술안주용으로 마련한 골뱅이 무침의 골뱅이는 영국 북해에서 8,500㎞를 건너왔다. 임연수어는 700㎞ 떨어진 러시아 오호츠크해에서, 두부에 사용된 콩은 600㎞ 떨어진 중국 지린 성에서 수입됐다. 동그랑땡에 사용된 다진 쇠고기는 7,200㎞ 떨어진 호주에서 들어왔다. 생산지에서 소비지까지 거리를 일컫는 ‘푸드마일’을 적용해 단순 계산해보면, 이날 저녁 음식들의 푸드마일은 대략 2만 9,900㎞. 식재료들이 지구 4분의 3바퀴를 돌아온 셈이다. 지역 농산물이 식탁에 오르는 이탈리아 모데나 사례는 우리에겐 꿈같은 이야기로만 들린다.
통상 푸드마일이 길어지면 먹거리의 안전도는 떨어진다. 수송과정에서 첨가물이나 농약, 보존제 등이 사용될 수밖에 없다. 푸드마일이 길수록 소비자가 접할 수 있는 생산 정보마저 불투명해진다. 이쯤 되면 ‘수입 농산물 없이 살아갈 수 있나. 우리에게 대안은 있나’라는 의문과 마주하게 된다. 당시 ‘4인 가족의 푸드마일’ 기사에 대한 댓글 몇 가지를 보면, ‘러시아산이면 어때 똑같은 바다에서 잡은건데…. 다문화 시대에 먹거리만 꼭 국내산이어야 좋은 거라는 보장도 없고’, ‘만날 신토불이 역겹다’, ‘수입 농산물 품질이 국산보다 더 우수하고 가격도 저렴한 경우가 많다’ 등이다. 국산 먹거리에 대한 소비자들의 평가는 얼음장보다도 차가웠다.

멀고 먼 소비자와 생산자, 길고 긴 ‘푸드마일’
지난해 초 ‘친환경 유기농가’ 인증을 받은 몇몇 농가에서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한 사실이 언론 보도를 탔다. 야당의 ‘친환경 무상급식 바람’을 잠재우려는 정치적 의도와는 별개로,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한 지자체와 돈이 모든 것이 돼 버린 우리 농업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단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이 문제가 예상을 깨고 큰 이슈로 발전하지 않은 것은 국산 농산물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가 이미 상당히 무너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윤병선 건국대 교수와 소비자시민모임이 국내산 먹거리의 푸드마일을 조사한 ‘국민 식생활분야 푸드 마일리지 산정연구’ 정부 용역보고서를 보면, 국내산 농산물의 신뢰도 추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농산물은 통상 산지에서 산지 유통인의 손을 거쳐 서울 가락시장에 집결, 다시 지방 도매시장으로 분산되는 등 4~6단계의 유통과정을 거친다. 예컨대 대전에 사는 소비자 ㄱ씨가 구매하는 충남 당진산 무는 산지 유통인에게 모인 뒤, 중간 상인을 거쳐 당진에서 104㎞ 떨어진 서울 가락시장으로 집결한다. 도매상들에 의해 가락시장에서 153㎞ 떨어진 대전의 오정시장으로 넘어가고 다시 소매상에게 팔린다. 푸드마일은 최소 257㎞에 달한다. 당진산 무가 오정시장으로 직접 공급된다면 푸드마일은 113㎞로 줄어들고, 당진 무를 생산하는 농민이 ㄱ씨와 직거래를 하면 푸드마일은 더 짧아진다. 국내산 농산물이지만 생산자에서 소비자까지 수많은 단계로 나누어지고 단계별로 유통되면서 푸드마일이 길어진 것이다.
윤병선 교수는 보고서에 “푸드마일을 줄이는 일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의 사회적 거리, 심리적 거리를 줄여 안전한 먹거리, 농민의 얼굴이 담긴 먹거리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대면하는 경험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농민과 소비자 간의 사회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농민은 ‘농산물 생산유통’이라는 컨베이어벨트에서 생산 분야에 소속된 채 단순 노동을 제공하는 인부로 전락한다. 이윤과 경쟁이 중시되는 농업 시스템의 모습이다. 국내 소비자들이 모데나 소비자처럼 ‘얼굴 있는 먹거리’를 찾기 어려운 이유다.

정부의 ‘푸드마일’ 대책, ‘가격 잡기’에만 올인
정부와 학계에서는 농산물의 푸드마일을 줄여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농식품부는 지난 10월 농산물 직거래를 늘리고, 우수 직거래 장터에는 보조금을 지급하며 도매시장의 유통 시스템은 효율화하겠다는 내용의 ‘유통구조개선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소비자들이 인터넷 블로그를 이용해 특정 농산물을 홍보하고 판매수익 일부를 가져가는 ‘인터넷 큐레이팅’ 시스템도 들여왔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은 주로 ‘가격 잡기’에 초점이 맞춰졌다. 농산물 유통구조를 단순화해 가격 급 등락을 막고 농산물 가격을 안정화하겠다는 것이다. 당장 물리적 거리를 줄일 수는 있어도 농민과 소비자 간의 사회적, 심리적 거리를 좁혀나가고 농산물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얻기에는 역부족이다. 관이 주도하는 농정의 숙명은 모래성 같다. 근본 없이 쌓기만 하니 곧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푸드마일’이 지난 물리적 거리에만 주목한 학계에서는 웃지 못할 연구가 이뤄지기도 한다. 국내 농업경제학 학술지 ‘농촌경제’에 실린 ‘The Food Miles Effect of the Korea-China Free Trade Agreement(한중 FTA의 푸드마일 효과)’ 연구 보고서는 ‘한중 FTA로 중국산 농산물이 대량 수입되면서 푸드마일이 늘어날 수도 있지만, 미국, 호주 등 먼 나라에서 수입되는 농산물이 가까운 중국 농산물로 대체되면서 푸드마일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푸드마일’은 지역 먹거리가 사라지고 수입 농산물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한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 용어지만, 어느새 가치 중립적인 용어로 받아들여져 ‘물리적 거리만 줄일 수 있다면 FTA라도 문제없다’는 식으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농민의 얼굴이 담긴 먹거리를 맛본 소비자들은 그 즐거움을 잊지 못한다.
농민의 얼굴이 담긴 먹거리를 맛본 소비자들은 그 즐거움을 잊지 못한다.

푸드마일 줄이는 유일한 방법, ‘자치와 협력’
희망의 열쇠는 관이 아닌, 농민과 소비자에게 있다. 예컨대 생활협동조합인 한살림 연합은 특정 농산물을 생산하기 전 소비자 대표와 농민 대표가 모여 농산물의 가격과 생산량 등을 결정한다. 산지유통인이나 대형마트 구매담당 등은 없다. 조합의 주인인 농민은 또 다른 주인인 소비자와 동등하게 협상한다. 농민은 생산비 증가분을 가격에 반영할 수도 있고, 소비자는 가계 부담을 이유로 가격 인상을 최소화할 수도 있다. 농민과 소비자 간의 양보 없는 싸움이 이뤄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시장가격이 비쌀 때는 농민들이 가격을 낮추고, 시장가격이 폭락했을 때는 소비자들이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사다 보니 자연스레 의지하고 도움 주는 상대로 발전했다. 소비자와 생산자 간 농촌 체험 등을 통해 농산물에 대한 신뢰도 쌓였다. 이탈리아 모데나 주민들이 지역 농산물을 기꺼이 구매하는 것도 자신의 이웃들이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 그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20년, 첫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10년이 지나면서 한국인들의 식탁은 수입 농산물에 점령당했다. 구할 수 없는 국내산 농산물들은 부지기수로 많으며, 수입 농산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됐다. 한국은 자국 생산 농산물이 사라지는 속도가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 여기에 동시 다발적인 FTA를 맺으며 그 속도를 내고 있다. 이에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하는 사태가 속출하면서 사태는 점점 나빠지는 중이다.
국립환경과학원의 ‘2010년 한국, 일본, 영국, 프랑스 4개국의 푸드마일리지 산정 결과’ 보고서를 보면, 한국인 1인당 1t의 먹을거리에 대한 푸드마일은 2003년 3,456㎞에서 2010년 7,085㎞로 2배 늘었다. 4개국 중 1위다. 세계 최고의 푸드마일을 기록했던 일본은 푸드마일이 감소세에 접어들었다. 일본은 농업 강국도 아니고 농지도 척박하지만, 농민과 소비자들이 모여 지역공동체를 발전시키고 지역 먹거리(로컬푸드)를 이용하는 ‘지산지소’ 운동 등이 효과를 보인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프랑스도 2003년에 비해 푸드마일이 줄었다.
농산물 시장개방 시대에 한국 농업의 살길은 어디에 있을까. 농민과 소비자 간의 ‘자치와 협력’을모색하는 일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단 한 번이라도 농민 얼굴이 담긴 먹거리를 맛본 소비자들은 그 즐거움을 잊지 못한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소비자의 마음을 녹이는 유일한 길이다.

37※필자 이재덕: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대산농업전문언론장학생 출신으로 삼성언론상 어젠다상 및 취재 보도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농업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 ‘인간의 얼굴을 한 성장’으로 우리를 안내하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