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개정, 농민에게 온 30년 만의 기회

원재정

영화 <1987>이 연일 화제다. 문재인 대통령이 영화를 직접 관람했고, 영화 속 복면을 쓴 대학생이 조각 같은 배우 강동원이라는 사실도 비밀이 아닐 만큼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표되는 짐승 같은 사회가 불과 30년 전이라니, 새삼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영화 <1987>은 그 시대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변화시키는 주역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역사의 거울이었다. 영화 <1987>의 감상에 젖으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해 헌법개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올해는 30년 만에 또다시 헌법개정이 예정돼 있다. 30년 넘게 유지돼 온 지금의 헌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됐다. 농민헌법 개정운동도 일찌감치 진용을 갖추고 새해를 맞았다.

영화 <1987>과 개헌 그리고 최저임금
1987년 헌법개정으로 얻은 대표적 결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대통령 직선제이고, 대통령 직선제만큼 중요한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보장도 빼놓을 수 없다. 헌법 제32조 제1항에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로 인해 피고용인 노동자 측과 고용주 측이 임금의 최저수준을 정하고 법으로 강제한다. 1987년 헌법개정으로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최저임금제, 올해의 최저임금은 7,530원이다. 지난해 6,470원보다 16.4% 상승했다. 노동자들이 1시간에 최소한 7,530원은 받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회적 안전망이 매년 가동되고 있는 셈이다. 노동자들의 안정된 생활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최저임금제에 있다면, 밀려드는 수입농산물 피해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의 안정된 생활은 농산물 최저가격 보장에 있다.

왜 농민헌법운동인가
1987년 헌법개정에서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제라는 결실을 맺었지만, 농민들의 삶을 바꿀 문구는 단 한 문장도 담지 못했다. 농민들이 30년 만의 개헌에 일찌감치 한목소리를 낸 이유다. 그 30년 동안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식량자급률은 사실상 최하위이고 농민들의 농업소득은 1년에 1천만 원에도 못 미치는 농업 쇠퇴의 길목에 서 있다.

지난해 8월 22일 기자회견을 연 ‘국민과 함께하는 농민의길’. 1987년 이후 30년 만의 헌법개정이 예정돼 있어 농민들은 일찌감치 농민헌법의 필요성에 뜻을 모았다. ⓒ한국농정신문
지난해 8월 22일 기자회견을 연 ‘국민과 함께하는 농민의길’. 1987년 이후 30년 만의 헌법개정이 예정돼 있어 농민들은 일찌감치 농민헌법의 필요성에 뜻을 모았다.
ⓒ한국농정신문

  지난해 8월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가톨릭농민회,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4개 농민단체로 구성된 ‘농민의길’은 헌법개정에서 농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농민헌법운동본부’를 제안하며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농민헌법운동본부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국민에게 먹거리 기본권을, 농민에게는 농산물 가격보장 정책을 마련하는 토대를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면서 “농산물 최저가격 보장과 농업의 다원적 기능, 공익적 가치를 명시하는 것이 그 기초가 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농민들이 처한 위기의식을 헌법개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절박한 호소였다.
  지난해 10월, ‘농민권리와 먹거리 기본권 실현을 위한 농민헌법운동본부’가 공식 출범하면서 ‘농민을 살리는 헌법’ 논의도 급물살을 탔다. 농민헌법운동본부는 40여 개나 되는 농민단체와 시민단체가 참여했고, 부정한 권력을 끌어낸 ‘촛불 국민’들이 새 사회, 새 가치의 골격을 만드는 헌법개정에 한 목소리를 냈다. 출범식에 참석한 설훈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장도 “국민들도 농업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공감하고 있기에 헌법에 농민의 권리, 농업의 가치 그리고 먹거리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담는다는 제안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다만 얼마나 조직적으로 여론을 확산하느냐의 기술적 문제가 남아있다”며 농해수위 위원들과 힘을 모아 돕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이후 농민헌법운동본부는 농민헌법연구팀을 가동해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과 농민권리를 담아낼 헌법조문 수정 회의를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전국 각지의 농촌에서는 들불처럼 농민헌법운동본부가 꾸려지고 농민헌법이 왜 필요한지,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하는지 제대로 알기 위한 강연도 속속 이어졌다. 농민헌법연구팀장인 윤병선 건국대 교수는 “자본주의 아래 농산물 가격 결정은 늘 농민에게 불리하게 작동하고 있다. 헌법이 자본과 임노동 관계에서 불리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민에 대한 권리를 이제는 (헌법에서) 보장해야 한다”고 농민헌법 개정의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엔 농민들만을 위한 농민헌법이 아니라 국민 모두를 위한 농업의 공익적, 다원적 기능을 국가가 보상해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뜻도 담겨있다.
  농민헌법운동본부는 지난해 12월 7일 대표자 회의를 통해 헌법개정에 반영돼야 할 농업조항을 마련했다.

“헌법개정이 30년짜리 농사” 지난해 11월 순창 농업인의 날 행사에 참가한 농민들이 농민헌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을 하고 있다. ⓒ한국농정신문
“헌법개정이 30년짜리 농사” 지난해 11월 순창 농업인의 날 행사에 참가한 농민들이 농민헌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을 하고 있다. ⓒ한국농정신문

농민헌법, 무엇을 담나
헌법은 크게 국민의 기본권과 권력구조로 구성돼 있다. 농민헌법은 국민의 삶과 농민의 삶을 바꾸는 ‘기본권’ 강화에 방점이 찍혀있다.
  지난해 농민헌법운동본부는 「제34조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제121조 1항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 2항 농업생산성의 제고와 농지의 합리적인 이용을 위하거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발생하는 농지의 임대차와 위탁경영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인정된다」, 「제123조 1항 국가는 농업 및 어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하여 농·어촌종합개발과 그 지원 등 필요한 계획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는 기존의 헌법 조항을 병합하거나 수정 혹은 문구를 신설한 합의안을 마련했다.
  우선 34조 국민의 기본권 문항 중 ‘식량권’을 명시해 식량의 생산과 공급이 국가의 기본 임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농민헌법은 34조에 ‘모든 국민은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권리를 갖는다’는 조항을 신설한다.
  또 121조와 123조에 나뉘어 있던 농어업 관련 조항을 121조 하나로 통합한다는 계획이다. 통합 121조는 △경자유전 원칙 유지, 임대차와 위탁경영의 범위는 농민과 농촌의 이익 증진의 범위로 한정 △농민이 안정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적정한 소득과 최저가격 보장 △여성농민의 권리 보장 △농민의 자조조직 지원과 자율적 활동 보장 등을 분명히 했다.
  특히 헌법에 있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소작을 금지하고 있지만 현실은 농사짓는 농민의 60%가 임차농(현대판 소작)이기에 유명무실을 빌미로 이를 폐기하자는 개발론자들의 주장에 반기를 들었다. 경자유전 원칙을 유지하면서 농지의 임대차와 위탁경영을 인정하되 ‘농민과 농촌의 생활상의 이익 증진’ 범위 내로 한정했다. 이를 위해 국가가 엄격히 관리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하게 된다.

농민의 생존권·국민의 먹거리 기본권, 새 헌법에
농민헌법은 결국 먹거리 기본권을 강화해 우리나라 농업생산 기반을 지속 가능하게 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농지는 농사짓는 농민에게, 농산물은 최저가격 보장으로’라는 두 가지 조항만 ‘법대로’ 된다면 국민들의 먹거리 기본권도 한층 강화될 수 있다.
  다행히 농업의 가치를 헌법으로 보장하자는 움직임은 점점 더 세를 확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농협중앙회의 서명운동이다. 농협은 농업의 가치를 헌법에 명시하자는 1,000만 명 서명운동도 성공리에 매듭지었다. 시골 장터 농민들도 서명했고 출근길 도시민들도 서명에 동참한 반가운 결과다.
  이제 남은 것은 농업계의 통일된 입장과 목소리다. 농민헌법 성안을 위해 지난 1월 9일 농민의길과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농협중앙회 등이 농협중앙회에서 ‘범농업계 농업가치 헌법반영 추진연대 발족식(농업헌법 추진연대)’을 열고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 범농업계는 이날을 기점으로 농민헌법이라는 옥동자의 탄생을 위해 연대의 한 배를 탔다.

지난 1월 9일 농협중앙회에서 열린 ‘범농업계 농업가치 헌법반영 추진연대 발족식’에서 공동선언문에 서명을 마친 공동대표들. ⓒ한국농정신문
지난 1월 9일 농협중앙회에서 열린 ‘범농업계 농업가치 헌법반영 추진연대 발족식’에서 공동선언문에 서명을 마친 공동대표들. ⓒ한국농정신문

농민헌법, 농민의 삶을 바꾸는 씨앗
새해의 첫 달, 헌법개정을 결정하는 시간까지는 5개월가량 남았다. 헌법개정 일정은 2월 말까지 개헌안 제안, 5월 15일 국회 의결, 6월 13일 국민투표 등의 절차를 거치게 된다.
  농민헌법은 한마디로 지속가능한 농업을 법과 제도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농사지어서 생활은커녕 농협 대출금도 다 못 갚아 한숨만 깊어지는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30년 전 개헌으로 노동자들이 일군 ‘최저임금’처럼 농민들도 ‘농산물 최저가격 보장’의 불씨를 댕겨야 한다.
  농민들이 나서지 않으면 30년 만에 온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27-2※필자 원재정: 한국농정신문 편집부국장. 농사를 짓지도 농촌에 살지도 않으면서 농업·농민·농촌 기사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매년 느끼고 있다. 밥 한 끼는 중요한 줄 알면서 농업문제엔 둔감한 사회에 필요한 기사를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국회와 농림축산식품부를 출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