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농부로 살게 하는 것들

안정화 · 사진 김신범

  시골살이 8년 차, 짝꿍인 신범과 함께 자연과 함께하는 농사에 대해 배우며 즐겁고 진지하게 작은 농사를 짓고 있다.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며 남들처럼 살다가 도시텃밭을 통해 농사의 즐거움을 경험했다. 돈을 벌어 돈으로 사야 하는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내 손으로 무언가 직접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이 바로 농사였다. 내가 먹을 것을 직접 생산한다는 보람, 땅과 작물을 만질 때 느껴지는 기쁨. 어느새 농사를 내 삶 속에 들이고 싶어졌다.
  무언가 해보고 싶을 때 우리는 왜 하고 싶은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를 파고들기보다 이 일로 먹고살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하곤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이고, 어쩌면 현실적인 생각의 흐름이다. 하지만 나와 신범은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방법부터 찾게 되기 전에 조금은 다른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싶어 유럽으로 떠났고, 그 여행에서 농사가 어우러진 다양한 삶을 만날 수 있었다.

독일 베를린, 마트에서 버려진 채소를 가져다가 다듬어 요리하는 중
독일 베를린, 마트에서 버려진 채소를 가져다가 다듬어 요리하는 중.
덴마크 스반홀름 공동체, 출하를 위해 시금치를 세척하는 모습.
덴마크 스반홀름 공동체, 출하를 위해 시금치를 세척하는 모습.

낯선 풍경, 다른 삶
  여행 중에 여러 나라에서 작고 아름다운 도시텃밭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도시 안에서 길을 따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녹색의 공간들이 눈부셨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커뮤니티 가든 ‘프린체신가르텐(Prinzessinnengarten)’에서 자원봉사로 농사일을 하고, 텃밭 옆 작은 주방에서 열리는 음식물쓰레기 워크숍을 들었다. 마트에서 버려지는 채소를 수거하여 요리하는 워크숍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곳에서는 도시텃밭을 함께 가꿀 뿐 아니라 농사와 음식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꼭 시골에 가서 농사를 업으로 택하지 않아도, 도시에서도 농사와 연결된 삶을 살 수 있었다.
  덴마크에 있는 공동체에서는 두 달간 살며 처음으로 매일 6시간씩 일상적으로 주어지는 농사일을 했다. 공동체 농장의 규모가 굉장히 크고 작물도 다양해서 여러 가지 작업을 해볼 수 있었지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풀을 뽑거나 같은 작물을 수확했고, 몇 시간 동안 잎채소를 세척해 비닐봉지에 포장하는 단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농사를 지을 때 그곳엔 내가 원치 않아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노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의 경험을 통해 내 몸이 농사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내가 원하는 농사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우프(WWOOF)라는 제도를 통해 작은 농사를 짓는 농부들을 만났다.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 가족농이 꾸려가는 작은 농장, 도시 외곽에 마켓가든을 꾸려 도심에 작은 로컬푸드 가게를 운영하는 젊은이들의 사회적 기업 등등. 사람들이 다양한 곳에서 다채로운 방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나이가 들고 은퇴하여 시골에 농지를 장만한 이들은 체력이 되는 만큼 쉬엄쉬엄 본인을 위한 농사를 지었다. 대문 앞에 작게 자율판매대를 만들어 수확물을 판매하거나 농가민박으로 농사 외에 다른 수입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우리와 나이가 비슷한 젊은이들은 역시나 쉽지 않아 보였다. 주 4일 시내로 출근하여 생계를 위한 소득을 마련하고, 금토일 3일간은 집을 고치고,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었다. 젊은이들이 만든 사회적 기업은 도시 외곽의 농지를 임차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잘 계획된 농사는 아니지만 크라우드 펀딩을 받아 땅을 빌리고, 하우스를 짓고, 돈이 생기면 관개시설을 만들며 하나씩 해나가고 있었다. 말도 안 되게 허술해 보였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안 될 것 같은 수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존재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했다. 왜 이렇게 사는지, 어떻게 시작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농사를 짓는지. 물어보고 듣고 도움이 되는 말들을 기억하려 애썼다. 대화하는 언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단어나 짧은 문장으로 진짜 하고픈 말을 던지게 되었다. 서로의 삶을 모르고, 각자가 살아온 문화가 다르기에 섣부른 조언도, 넘겨짚는 말도 하기 어려웠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기에 더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었고 숨김없이 말할 수 있었다. 농사를 고민하는 내 생각을 현실을 모르는 젊은이의 치기 어린 선택이라 치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낸 시간이 우릴 키웠다. “그게 되겠냐”, “그렇게 하면 돈 못 벌어”, “안돼” 이런 말로 가득하던 미래에 숨통을 틔우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여행을 계속하며 시간이 흐르고, 돌아가서 뭘 먹고 살지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 내려놓은 어느 날, 우리에게 조금 여유를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꿈을 곱씹으며 살기보다는 한 번 정도는 해보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자고.
  여행하는 동안 열린 마음으로 우리와 만나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설픈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대답해주고 함께 일하며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어준. 그들이 내어준 그 시간은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을 바꾸어 주었다. “뭐 먹고 살래?”에서 “어떻게 살래?”로.

작은 농사를 짓고 있는 밭 전경. 다양한 생명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작은 농사를 짓고 있는 밭 전경. 다양한 생명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인정받고 지지받는 관계의 소중함
  여행을 다녀와 신범과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삶과 일이 다르지 않았으면 했다. 쓰레기가 많이 나오지 않고 에너지를 적게 사용해 자연에 부담이 덜한 방식의 농사를 시도해보고 싶었다. 밭에 무엇이 자라는지 알고 내 손이 구석구석 닿을 수 있는 농사를 짓고 싶었다. 작은 땅과 집을 빌려 시작한 농사는 판매보다는 자급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땅은 두 사람이 먹기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내주었고 결국 판매를 생각하게 되었다. 기존의 유통 방식 같은 것들은 아예 몰랐기에 우리가 소비자로 자주 찾아갔던 농부시장 마르쉐@의 문을 두드렸다.
  작은 규모지만 손이 많이 가는 농사여서, 농산물의 적정 가격을 정하기도 어렵지만 그 가격을 소비자에게 설명하기도 참 어렵다. 하지만 대화하는 농부시장 마르쉐@에서 우리는 자신의 길을 가는 농부님들과 농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소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급농사로 시작하여 농부시장에 나가게 되고, 매달 택배로 보내는 꾸러미를 하기까지.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작은 규모와 적은 수입, 끊임없이 농부라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과 비슷한 농사를 짓고 있는 선배 동료 농부님들 덕분이다.

농부시장 마르쉐@에서 우리는 자신의 길을 가는 농부님들과 농부의 이야기 에 귀 기울여주는 소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농부시장 마르쉐@에서 우리는 자신의 길을 가는 농부님들과 농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소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씨앗 만나는 날 워크숍. 토종씨앗을 통해 만나온 농부들의 지혜와 경험을 다 시 나눈다.
씨앗 만나는 날 워크숍. 토종씨앗을 통해 만나온 농부들의 지혜와 경험을 다시 나눈다.

  농사짓는 삶을 꿈꾸고 실행하며 어떻게 먹고사나 생각을 참 많이 한다. 직장을 다닐 때,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구할 때도 이런 고민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먹거리를 기르는 농사가 정작 먹고살기가 힘들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뻔히 어려움이 보이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시골살이와 농사짓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농부의 삶을 몸에 입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처럼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다리에 힘을 더 주라고, 몸과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꺾으라고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눈으로 보고 실제 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여러 고민이 있었기에 우리와 비슷한 농사를 짓고 있는 선배들을 절실히 만나고 싶었다. 땅과 집, 큰 기계와 자본이 없이 시작한 농사. 두 사람의 의지와 두 손으로 직접 일해보는 경험. 설명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내 삶에 대입해보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했다. 이미 해본 선배의 경험을 대가 없이 나눠주고 우리의 고민을 묵묵히 들어주고 동료라 칭해주는 풀풀농장과 꽃비원 그리고 또 다른 마르쉐@ 농부들. 농사짓는 방법과 농사짓는 마음을 함께 배우게 되는 지구학교의 개구리와 소금쟁이. 이제 막 농사를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 정성들여 키워온 토종씨앗과 농사 경험을 아낌없이 나눠준 농부들. 우리는 그렇게 다른 농부들의 지혜와 경험에 기대어 살아왔다.
  우리는 이제 겨우 일곱 번의 농사를 지어보았다. 해마다 조금씩 바뀌는 기후환경은 그나마 우리의 작은 경험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으로 우리를 내몬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해가 갈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며칠 전 농부시장 마르쉐@에서 개최한 ‘2024 지구농부포럼’에 농사 이야기를 하러 다녀왔다. 소농과 함께하는 마르쉐@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시장 외에도 농부나 작은 생산자들의 이야기를 소비자들에게 전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지구농부포럼은 그 일환으로 지구를 위한 농사에 대해 듣고, 직접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현장의 경험을 나누는 귀한 자리이다. 해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농부의 이야기를 듣는다. 올해는 발표자로 함께하게 되었는데 이런 역할이 생긴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우리의 이야기가 다른 농부들에게 쓸모가 있을지 걱정도 많이 했다.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운 작은 농부에게 이야기를 할 자리를 내어주는 마르쉐@이 참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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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지으며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들. 사진은 이팥꽃(위)과 노랑차조(아래)
농사를 지으며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들. 사진은 이팥꽃(위)과 노랑차조(아래).

우리의 삶이 지속 가능할까
  우리는 무엇이든 숫자로 표현하는 것을 익숙하게 여긴다. 성적이나 경제지표, 기온이나 강수량 같은 것들은 아마 사람들이 무언가를 동일하게 인식하고자 만들어낸 방법일 테다. 그중 우리 모두에게 쉽게 통용되는 단위는 돈인 것 같다. 가성비라든가, 매출이 얼마라든가 하는 말들로 공통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농사에는 분명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돈이 일반적인 가치의 척도가 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씨앗을 받기 위한 작물의 꽃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 더운 날 땀을 훔치며 올려다본 하늘의 푸르름, 씨앗을 보며 귀하다고 느끼는 마음, 내 농산물을 맛있게 먹었다는 사람들의 한마디에 느껴지는 뿌듯함. 이것은 매출액으로는 잡히지 않는 한마디 말이거나 흘러가는 감정일 뿐이지만 우리가 이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땀 흘리며 일을 하다가 하늘을 볼 때, 아름다운 하늘이 그곳에 있음에 감사 한다.
땀 흘리며 일을 하다가 하늘을 볼 때, 아름다운 하늘이 그곳에 있음에 감사한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런 방식의 농사와 삶이 지속 가능하냐고 묻는다. 모르겠다. 사람들이 원하는 딱 떨어지는 답을 만들 수가 없다. 얼마만큼 생산하고 얼마를 벌어야 우리의 삶이 지속 가능할까. 그저 지금까지 우리는 이렇게 지속해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삶을 ‘지속’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이만큼은 이런 방식의 삶도 지속 가능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삶이 이런 방식으로 지속 가능할 것이라 보장해주진 못한다. 모두의 삶은 다르기 때문에.
  적은 수의 농민이 많은 수의 소비자를 먹여 살리는 지금과 같은 사회구조에서는 농민과 도시소비자는 접점이 부족하고, 그만큼 서로를 이해하기가 너무나도 힘들다. 왜 이 당근이 저 당근보다 조금 더 비싼지, 굳이 손이 많이 가는 농사를 짓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짧고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계나 농약을 안 썼는데 비싼 이유가 무엇인지는 농사일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물다양성이 있는 생태계가 안정적이라 한다. 더 많은 다양한 생물들이 촘촘히 엮여 살아갈 때 생태계가 안정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야 문제가 되는 상황이 생겨도 회복하여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러하다. 좀 더 많고 다양한 작은 농부들이 농부의 친구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갈 때 좀 더 단단한 농업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소심한 우리는 나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작은 농사를 계속 짓고 싶다. 농사도 짓고 우리 농사의 결실을 나누는 꾸러미 식구들, 매해 동지 때 만나는 동지 모임 동료들과 함께 오래 만나고 재미있게 살고 싶다. 그렇게 사는 우리를 보며 저 정도쯤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같이 작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그 농부의 친구들이 많아진 미래를 상상해본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내 손으로 키워낸 먹거리의 소중함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가 있는 그곳을.

OLYMPUS DIGITAL CAMERA필자 안정화: 종합재미농장 대표
경기 양평군에서 짝꿍과 함께 자연과 함께하는 농사를 배우고 있다. 작은 농사를 지으며 농사와 일상이 하나가 되는 삶을 꿈꾼다. 책 《우리가 농부로 살 수 있을까》, 《농사가 재미있어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