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박다니엘
문밖에서 서성이던 청년에게 내어준 ‘곁’
내가 한살림 영암달마을공동체(이하 달마을)와 함께하게 된 것은 고향으로 돌아와 한참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유학을 떠났지만, 시골살이에 익숙한 몸이 도시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해 다시 고향으로 왔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농사를 옆에서 지켜보고, 학교에 다니면서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일을 도왔기에, 농촌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정신없이 지나가는 농번기가 끝나고 조금 쉴 틈이 생기면 밀려오는 허전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의 빈 페이지를 채워보려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교육에 참여하거나 동아리에 가입하기도 하고, 귀농 청년들과 친환경농사에 관한 공부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재배하는 작물이 다르다 보니 재배법과 영농 일정이 맞지 않고, 친환경농사를 꿈꾸면서도 당장 생계를 위해 관행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겹치면서 모임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부모님과 함께 유기농 벼농사를 짓던 나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농사 방식을 자연스레 습득했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정도의 수입으로 관심 분야를 공부하거나 마을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간혹 SNS를 통해 다른 지역에서 청년들의 모임이 열린다고 하면, 지리산 아래 산내라든지 충남 홍성군이나 전북 진안군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곳 청년들은 어떻게 모이게 되었나 궁금해서였다. 같은 농촌을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활동에서 배울 점들이 많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외부인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달마을 대표로부터 공동체 활동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에 유기농 흑미를 보내고, 매달 있는 월례회에도 꼭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직거래로 내보낼 흑미를 재배하고 있었기에, 생산면적을 늘리면 가능할 것 같았다. 월례회에 몇 차례 참석하면서 그가 한살림에 보낼 자신의 몫을 내게 양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인은 겨울철 작물을 주로 하고 벼농사는 한 해 먹을 정도로만 줄이려고 했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곁을 내준 것이다. 그 첫 마음을 떠올리면 고마울 따름이다.
느리게, 흩어져, 때로는 어울려
모내기와 추수로 바쁜 6월과 10월을 제외하고 매달 열리는 달마을 월례회는 주로 읍에 있는 농업인쉼터에서 진행한다. 참석한 회원들 모두가 지난 모임 이후에 어떻게 지냈는지 간단히 근황을 나누고 다양한 논의로 넘어간다. 회의를 시작할 때면 오늘은 빨리 끝내고 가자고 하면서도 이야기하다 보면 금세 두세 시간을 넘기곤 한다. 대표와 총무는 한살림 전남연합회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공유하면서, 서로 자주 만나고 겪어야 하나씩 알게 된다는 말을 종종 한다. 공동체 내에서 대부분의 의사 결정은 전체 회원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중요한 사안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이러한 방식에 불만을 느끼는 일부 구성원도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껏 모두가 돈독하게 지내온 건 느리고 불편한 이 ‘기다림’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자 농사를 지으면서 한 달에 한 번 만나 무언가를 논의하는 것만으로 공동체라는 느낌을 갖기는 사실 쉽지 않다. 거의 모든 회원이 적게는 두세 개, 많게는 10여 개의 모임에 가입되어 있어 매번 월례회에 참석하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친환경농사를 짓고 있다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군내 8개 읍면 곳곳에 흩어져 있어 농사일을 함께 하는 것 역시 수월하지 않다. 모내기나 수확과 같은 농번기 작업은 살고 있는 마을의 이웃들과 진행한다. 간혹 대형 농기계가 필요하거나 여분의 모판을 나눌 때는 개별 연락을 통해 도움을 주고받는다.
오히려 공동체 차원의 일들은 농한기에 친환경농사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지자체가 주관하는 청년공동체 사업에 선정되어 확보한 예산으로 유기농 농사법에 대한 강의를 듣고 농사 현장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받는다. 친환경농사에 필요하지만 개인이 만들기는 번거로운 약재를 공동으로 제조하여 회원들에게 나눠 주기도 한다. 몇 년 사이 드론 방제 방법이 확산되면서 친환경 농토에 농약이 날아오는 피해가 자주 발생하자, 공동체에서 재료를 구입하고 토지 경계에 세울 안내 푯말을 만들어 필요한 만큼 나누었다. 봄가을에는 수확을 앞두고 회원 농가들의 논밭을 돌면서 친환경 재배 상황을 확인하고 시험 재배하고 있는 농사법에 대한 상호교류를 갖는다. 최근에는 지속 가능한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퍼머컬처(Permaculture) 디자인 코스를 통해 어떻게 하면 친환경농업, 마을, 그리고 지역사회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건강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달마을이 친환경영농조직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지원사업에 대한 제안이 들어오곤 한다. 회원들 사이에서도 공동사업 추진에 대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회원들이 저마다 일정 규모의 영농 활동을 하는 상황에서 운영위원회 중심으로 농한기에 시간을 내어 사업안을 기획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일은 굼뜰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기반을 갖추기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2023년 농산물창고, 유통센터, 가공공장 등을 세울 수 있는 사업 부지를 마련한 것은 의미 있는 걸음이었다. 올겨울에는 조그마한 사무실을 준비하고 있다. 달팽이처럼 조금씩 천천히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나 할까.
‘함께’하는 일의 빛과 그림자
달마을 농부들은 친환경농사에 대한 활동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함께하기도 한다. 오월이 되면 지역의 민간단체들이 연합하여 5·18 민주화운동 기념행사를 하는데, 해마다 달마을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들과 나누며 오월 정신을 기리고 있다. 2023년에는 광주·전남 한살림 생산자 소비자가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며 모이는 ‘삼월 삼짇날 행사’를 열기도 했다. 행사를 한 주 앞두고 공동체 대표의 창고에 모여 모두가 돌아가며 깃발에 문구를 써 내려갔다. 양쪽에서 천을 잡고 붓을 들어 획을 그을 때마다 탄성이 쏟아졌다. 잘 쓰든 못 쓰든, 서로를 격려하면서 달마을만의 개성이 담긴 깃발을 만들어냈다. 행사 전날에는 삼삼오오 팀을 나누어 깃발을 매달 대나무를 쪄오고, 체험에 쓸 버들가지와 보릿대도 잘라 왔다. 행사장을 둘러싸고 휘날리는 만장 아래에서 풍악으로 시작된 삼짇날 행사는 광주·전남 한살림 생산자들과 소비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모든 순서를 마치고 자리를 옮겨 뒤풀이하면서 달마을 회원들이 힘을 모아 큰 행사를 치를 수 있다는 것에, 이러한 뜻깊은 일을 함께 해낼 공동체가 있다는 것에 뿌듯하고 감사하다는 소감이 줄을 이었다. 무엇보다 바쁜 모내기철 정성 가득한 점심을 준비해 생산자들의 노고를 격려해 준 소비자 회원들과 만날 수 있어서 큰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살림 연합에서 치러지는 도농교류를 비롯해 지역 단체들과 함께 하는 행사들이 많다 보니 매번 모든 회원이 참여하기는 어렵다. 멀리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하는 경우에는 공동체 담당자나 임원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총대를 멘다. 총회 때마다 활동비가 더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지만 예산은 빠듯한 편이다. 한살림에 농산물을 공급하여 얻은 회원들의 수익 일부를 공동체 운영기금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달마을은 아직 신생 공동체라 보낼 수 있는 농산물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겨울에는 이상기후로 작황이 좋지 않아 약속한 생산량을 채우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사람 좋은 ‘큰 형님’들은 행사가 있으면 멀리까지 길을 나선다. 늦깎이 육아로 함께하지 못하는 나는 늘 마음이 편치 않다.
‘홀로’를 더 잘 살아낼 수 있게 하는 최선
“내일 또 비가 온다고 해서 다들 바쁘시죠? 다음 주 수요일 어떠신가요, 시간 되는 분들 모이시게요.”
달마을 카톡방에 번개 공지가 올라왔다. 봄가을 농번기 기간에는 월례회가 없는 데다 올해는 유난히 가을걷이가 길어지면서 한 달 넘게 모이질 못해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며 사업팀장이 모임을 제안했다. 이런저런 사정과 농민단체 일정을 고려하여 목요일 저녁으로 만남이 정해졌다. 5시부터 모이기로 했는데 아직도 일이 한창이라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서야 모임이 시작되었다. 요즘 들어 아빠와의 나들이에 맛 들인 세 살 큰아이를 데리고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마침 음료수를 사들고 온 동계 작목반장이 인사를 건넨다. 생각보다 빨리 왔다고 하니, 가을일을 끝내지 못한 회원들의 상황이 답답해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서둘러 나왔단다.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회원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들어와서 저마다 안부를 물었다. 지난 몇 주간 콩과 녹두 같은 알곡들이 익지 않아 가을걷이를 마무리하지 못했고, 벼 수확을 겨우 마친 논은 잦은 비로 귀리나 보리 등 겨울작물을 파종할 수 없어 발만 동동거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잡초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생분해 멀칭 필름을 사용해 시범적으로 논에 재배한 콩이 막상 수확하려고 보니 상태가 좋지 않다고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생분해 필름이 잡초가 웃자라는 것은 막아줬지만 이상기후로 자라던 콩이 제대로 여물지 못해 기계 대신 손으로 거두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여름 논밭을 점검하면서 생분해 필름을 사용하면 잡초에서 자유로워져 유기농 콩 농사도 제법 힘들이지 않고 지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여겼는데 못내 씁쓸하다. 9월까지 무더위가 계속되고 가을비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콩이 생리 장애를 겪어 알맹이가 익지 않은 것이다. 기후위기에 탈탈 털린 콩 농사로 기운이 빠진 사이, 귀리를 파종하고 있어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는 한 회원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수수를 두 단지나 시범적으로 재배했는데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수확할 게 없을 것 같다고 했던 회원이다. 가까스로 수확을 마치고 이제 귀리를 파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자를 받고 한쪽에서는 파종 시기가 이미 지났는데 지금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한다. 귀리가 잘 자라줄지 몰라 가을걷이가 끝난 농토는 겨우내 놀리고 봄이 되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이들도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지금까지 누구도 맞닥뜨려보지 못한 기후위기는 낯설고 엄혹하지만, 서로의 메아리에 기대어 지친 듯 지치지 않은 달마을 농부들의 가을밤은 그렇게 깊어져 갔다.
아이와 함께여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먼저 집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운전대에 가만히 손을 얹자 다시 혼자가 된 느낌이었지만, 때때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동지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함께’라는 건 외로움을 걷어낼 수 있는 해법이 아니라 섬과 섬을 채우는 물결처럼 ‘홀로’의 자리를 더 잘 살아낼 수 있게 하는 최선이 아닐까. 차에 오르자마자 스르르 잠이 든 아이를 바라보다, 차창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필자 박다니엘: 유기농생태마을 신안정 사무장
전남 영암군 월출산 아래 유기농생태마을 신안정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다. 인구감소와 기후위기 시대 지속 가능한 농업·농촌에 대해 고민하며 마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살림 영암달마을 농산팀장, 협동조합 ‘너머로’ 이사장도 겸하고 있다. 지역의 초등학교 친구들과 자전거로 마을을 돌고, 세 살 난 딸과 논길 걷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