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박효정
20대에 귀농을 결심한 이유
도시에서 나고 자란 데다 윗대의 할머니도 시골에 계시지 않았기에 농촌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소가 잠자는 모양이라는 우면산 약수터에 매일 물 뜨러 다녔던 8세 시절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등산로를 살짝 벗어나 울창한 수풀 속 폭신한 스펀지케이크 같은 흙을 밟고 머릿속까지 상쾌해지는 향을 마신 까닭인지,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던 두통이 시나브로 사라졌다. 숲과 공원에서 흙 파며 곤충 잡기에 열 올렸던 시기를 아득히 잊어버렸지만, 20대 연고 없이 귀농을 결심한 것은 어린 시절 경험한 촉촉한 생태감수성 덕분이라고 뒤늦게 감을 잡는다.
25살 무렵엔 도시에 있는 저소득층 동네의 오래된 공부방에서 실무 교사로 일하면서 초중등 학생들과 저녁 8시까지 복작였다. 한 사회의 전환은 교육에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조차 본을 보일 만한 길을 걸어 본 적이 없었기에, 아이들 앞에 서는 부끄러움이 커졌다. 이내 수개월 만에 물러섰다. 우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건강한 결을 세운 후 다시 아이들을 만나겠다고 마음을 벼렸다.
그해 겨울 대단한 용기랄 것 없이 배낭 하나 메고 도시를 떠났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찾아 변방으로 나선 것이다. 정착과 유목 사이에 정체성을 두고, 묵은 밭을 개간하며 허름한 빈집에서 입에 풀칠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내가 눈 똥이 어디로 가고 내가 먹는 밥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삶에 질렸기 때문에, 음식과 대소변이 하나로 연결되는 그림을 그렸지만 현업 농민의 절망까지 꿰뚫지는 못했다.
“이 일이 정말 재밌어?”
당최 이곳에 뭐 하러 왔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자주 들었다.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를 뒤로하고 농촌에서 정녕 행복한 게 맞냐고 순수한 농심(農心)을 의심받기도 했다. 내가 꿈꾸던 농사는 다수의 농민에게 아득바득 버티는 생계 수단에 불과했다.
농촌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우리가 농촌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행복이란 말을 빼고, 그냥 ‘살 수 있을까?’ 조차도 쉽지 않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농사를 지어서 행복하다는 청년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농민 계층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소득이 적고, 빌려준 자가 아니라 빌린 자였다. 청년이 아니더라도 농사를 포기하고 다시 유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자살하는 청년농민이 우리 옆에 있었다. 분명 청년농민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간곡하였지만,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에서 비롯된 세계관에서는 오히려 행복에 인색했고 차라리 불행이 편했다.
귀농 후 가장 큰 타격은 농사가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1000평(3300㎡) 밭에서 100kg 남짓 토종콩을 거두었는데, 땅을 구한 빚의 이자 값도 안 나왔다. 수확 시기가 잘못되었나, 터지던 콩깍지가 마르지 않는 습도의 문제였나, 수정할 때 가물었나, 콩 순지르기를 해야 했나, 재배 과정을 톺아보며 후회했다. 타작하며 밭에 튀었던 콩 이삭줍기를 했다. 봄부터 애써 자란 동그스름 매끈한 흰콩이 흙 속에서 반짝이는 듯했다. 한 시간을 주운 것이 고작 한 줌 정도의 콩이었지만 귀했다. 값으로 치니 인건비의 1할도 안 나왔다. 늦봄부터 늦가을까지 가뭄과 폭우 사이에서 애태우고 땀 흘렸던 날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농사는 노동의 대가가 정직하지 않았다. 몇 달간 날씨 변수에 맞춰 생장 단계별 적절한 농작업 타이밍을 놓치면, 앞에 기울인 노력이 깡그리 엎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큰 바람과 비, 바싹 마른 날씨와 끈적한 습도를 오가는 변덕과 잔인함을 어떻게 버틸지 철저하게 약자의 입장에서 농사가 이어졌다. 땅값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부담감을 등에 짊어지니 선택이 무겁고, 앞날이 깜깜했다.
“농촌은 이미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져 박살 났으니 회생 불가야!”
존경받는 수십 년 차 유기농민의 선언을 코앞에서 들었다. 무너지는 속도는 눈에 띄게 빠르고, 희망을 짜는 속도는 더뎌 체감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본디 흙으로 빚어졌기에 밭에서 일하다 죽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할머니 농부를 우러렀지만, “젊은이들아, 나처럼 살지 말아라” 이것이 윗대 농부들의 전언이다. 선대에서 종말을 선언한 농업의 계보는 세대교체가 불투명했다.
농사는 뒷배 없이 시작하기 어려웠고, 초심자 단계를 넘어서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 농업교육학에서는 처음 농사를 접하여 안정화 단계에 이르기까지 평균 15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에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일은 수십 년 농민들에게도 확언할 수 없는 형편이다. 관절은 쓰는 만큼 닳고, 골병들지 않은 노농(老農)이 없고, 여태껏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한 노력만큼 전문가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귀농을 후회한 적은 없다. 이리 지난한 일인지 모르고 섣불리 시작했지만, 다채로운 농작업에 지루할 틈 없는 흥미를 동력 삼아 줄곧 농사를 배웠다. 이따금 숨은 고수들도 만났다. 이들은 자신의 농장을 실험실 삼아 연구하며 지역 환경에 맞는 데이터를 체득한 육체가 곧 권위였다. 게다가 스스로 ‘돌아이’라고 부르는 돌연변이 같은 청년들은 시류에 개의치 않고 농(農)의 가치를 구축했다.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았던 청개구리 농민은 자신의 아이들이 농업을 선택해도 기꺼이 응원하겠다고 반기를 들었다.
씨앗에서 피어나는 활력
농사를 짓겠다고 귀농하였지만 유기농사에만 오롯이 전념하지 못했다. 생산자이자 소규모 가공업자, 온라인 쇼핑몰 소상공인으로 소비자를 만나고, 텃밭 수업, 생태 해설, 환경 교육으로 지역 학생들을 마주했다. 물론 귀농 초기에는 약초를 채취하고 농사짓기도 바빴다. 늦가을 수확 후 갈무리까지 끝나면 농부가 할 일은 다했다는 안도감에, 판매 활동에 소홀하거나 장터에 나가도 쭈뼛거려 열심히 자란 농산물에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옹골진 씨앗을 골라 심고 작물을 가꾼 자부심은 어디로 갔는지, 돈으로 환산하여 낯선 이에게 파는 일이 어색하기만 했다. 다행히 비대면 온라인 플랫폼에 기대어 경제적으로 농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능숙지 못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제품 디자인을 하여 시제품을 만들고, 테스트를 거쳐 제품의 상세 페이지를 만들어 홍보했고, 소비자의 솔직한 피드백을 기록하고 반영했다. 판로가 자리 잡히고 나서야 유기농 쇠무릅, 독활, 아스파라거스, 무농약 콩 및 자연산 약초들의 품질과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재배와 채취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작은 학교에서 12회차 텃밭 수업 요청이 왔다. 농사일이 가장 많은 철과 수업이 겹치니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고사했는데, 아이들이 텃밭 수업을 해달라고 졸랐다. 엄마가 학교에 왔으면 하는 마음보다 텃밭 수업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마음이 아이들에게로 기울었다. 텃밭 수업을 하며 지역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사뭇 아름찼다. 텃밭 수업 회차마다 학생들이 흘린 구슬땀과 경탄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유독 무더웠던 여름 텃밭에서 산토끼처럼, 고라니처럼 폴짝폴짝 이랑을 뛰어다니며 김매던 3~6학년, 스프링클러처럼 뱅글뱅글 돌면서 물을 뿌려주는 아이들, 관찰하던 두더지 먹이를 주려고 지렁이를 찾아서 밭을 파헤치던 학생들, 자생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잡초를 밭에 옮겨 심는 친구, 밭일은 제쳐두고 땅속 생물이 궁금하다며 흙과 멀칭한 폐박스를 들추던 학생들, ‘직접 키운 작물로 내 손맛이 느껴지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 수업이 인상적이었다’는 친구들, ‘중학교 가서도 하고 싶다’는 6학년, 다음에는 ‘더 잘 키우고 싶다’, ‘더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이들 덕분에 학교 텃밭에서 피어나는 활력을 나눌 수 있었다.
조그마한 씨앗을 심었을 뿐인데 텃밭에서 왕성하게 뻗어나가는 식물을 보며 학생들은 오달지게 성숙했고, 나 또한 농생태계를 작물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씨앗 같은 어린 학생이 지역 생태계에서 어떻게 싹을 틔울지 고민했다. 우주 차원에서 티끌 같은 생태 수업이 보잘것없을지 모르지만, 우주의 시작이 바로 점 하나에서 출발했다. 땀 흘려 얻는 수확을 통한 생존 수업, 마을 할머니가 지켜온 씨앗을 학교 텃밭에 심어 먹으며 이어지는 식문화를 통해 지역민이 지역교육에 힘을 쏟을 때 한 마을의 진화와 순환이 이루어짐을 실감했다.
농업의 미래를 보다
“삶은 식물에 의해 유지되고 풍요로워집니다(Life is sustained and enriched by plants).”
호주 로열 보타닉 정원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농사도 그렇다. 흙과 식물을 보살피며 장소와 깊은 유대감을 이루고, 살아있다는 감각을 일깨우고, 자기의 쓸모를 키울 수 있다. 농사짓는 삶은 ‘내가 나답게’ 사는 구체적 방식으로, 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도왔다. 그렇기에 농업교육대학원을 다니며 후세대에도 필요한 전인교육으로서 농을 고민하고 있다. 비록 농업계 고교가 점점 사라지고 있고, 농업교육학과가 있는 대학은 전국에 한 곳뿐이지만 말이다. 생명이란 수많은 변수 속에서 살아남은 것을 이르지 않는가. 생명을 유지·강화하고, 그 힘을 나눌 방법으로 농업의 미래를 본다.
오늘과 내일이 다른 밭, 변화무쌍한 생명력을 목격하는 농민의 입에서 텃밭과 야생을 연결하자는 ‘재:야생화(Rewilding)’ 이야기가 나온다. 자연스레 유기농업에서 숲과 생태계, 지구 환경까지 관심이 번진다. 학교 텃밭 강사와 소농 여럿이 숲을 거닐며 최초의 육상식물 이끼, 생태계의 환원자 버섯과 독립영양생물인 식물 간의 관계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기후붕괴와 멸종위기 앞에서 더욱 다른 종과 연대하고 교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 서로의 운명으로 엮인다. 작물의 뿌리는 흙에서 양분을 빼앗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생물과의 공생으로 흙을 유익하고 부드럽게 한다. 숲 흙의 향긋함에 매혹된 데다, 밭 흙의 탄소 저장 능력을 알게 되면서 경운을 멈췄다. 주변 생태계와 상호작용을 하는 논밭으로 탄력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농민의 생애 주기에서 청년기는 지역과 세계, 먹거리와 건강, 전통과 세대를 잇는 연결고리를 형성하기 좋은 시기다. 농촌에서 청년의 연령 폭은 넓어지고, 청년농민의 다양한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이 중첩된다. 생산 중심의 전통적 농림업에서 제조, 유통, 관광, 예술, 문화, 교육 및 첨단 기술 등을 가로질러 청년농민은 농의 개념을 열어두고 넘나든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기인 청년이 농촌에 유입되고, 농촌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장벽을 허문다.
독립운동가 윤봉길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노예 교육을 거부하고, 20세에 야학을 세워 수업 교재인 ‘농민독본’을 직접 펴냈다. 3권 ‘농민의 앞길’ 편 중 독립투사의 뜨거운 문장이 여전히 유효하기에 청년농민을 두둑하게 응원하는 마음으로 농민 앞에 ‘청년’을 달아 읽어 본다.
“조선에서 주인공인 농민은 이때까지 주인 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까짓 농군 놈들, 촌놈들’이라고 학대하고 멸시함이 정말 혹독했습니다. 온 세상이 다 농민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 조금도 돌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에서 농민이 이처럼 가난하다는 것은 전 조선이 못살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힘을 농민에게 돌려야 합니다.”
필자 박효정: 농부와약초꾼 공동대표
경남 거창군에서 유기농 약초를 재배하는 농민으로, 귀농한 지 17년이 되었다. 농업교육대학원을 다니며 후세대에 필요한 전인교육으로서 ‘농’을 고민하고 있다. 삼 남매를 보살피며 토종콩과 약초 농사, 환경교육 및 생태 텃밭 수업을 버무려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