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패트릭 라이든, 강수희
당산나무는 경이롭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긴 세월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거대한 나무의 주름진 얼굴을 들여다보면 감탄과 놀라움, 무엇보다도 경외심이 깊어진다. 현대의 도시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지만, 옛 마을 어귀 혹은 한복판마다 수호신처럼 자리 잡은 당산나무는 성스러운 존재로 마을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다. 나무와 사람이 가까이 연결되어 있던 아름다운 전통은 근대화를 거치며 사라져갔고, 나무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은 구닥다리 미신처럼 치부되었다.
사람과 나무가, 도시와 자연이 지금보다 나은 형태로 공존할 수 있다면, 이를테면, 잊혀진 당산나무의 전통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다면, 도시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갈까? 사람과 나무가 더 가까이 연결된, 도시와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계절의 풍경을 예술가의 시선으로 상상해본다.
‘나무와 공존하는 도시’에 봄이 오면, 사람들은 매화 향기로 시작하여 릴레이 하듯이 이어지는 다채로운 꽃 풍경에 들뜬다. 나물을 캐고, 화전을 부치고, 꽃차를 덖으며 봄이 건네는 선물을 살뜰히 거둬들인다. 맑은 날이면 정성껏 만든 먹을거리를 챙겨 숲과 들판, 강가로 소풍을 떠나 봄바람과 햇살을 만끽한다. 긴긴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찾아온 새 계절, 만물이 되살아나는 생명력 가득한 시기를 온몸으로 흠뻑 누린다.
여름이면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마다 인구 밀도가 높아진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실내에 비해, 자연스러운 바람이 부는 나무 그늘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차도를 줄이고 아스팔트를 걷어낸 후 나무를 심어 가꾼 산책로와 공원은 도심 속 폭염을 완화하고, 이러한 녹지로 연결된 자전거 전용도로를 통해 자동차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무엇보다도 즐겁고 신나게 어디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가을에는 끝없는 축제로 온 도시가 들썩인다. 골목과 공원, 학교와 관공서 등등 어디에나 조성된 크고 작은 텃밭에서 온갖 채소와 열매와 곡식들로 풍요로운 수확이 끊이질 않고, 가을의 넉넉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함께 나눈다. 삶의 터전이 되어주는 자연에 대한,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함께 쌓아 올린 결실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를 올리는 추석의 넉넉한 정신이 되살아난다.
겨울이 오면 낙엽에 이어 서리와 눈이 쌓이며 땅을 포근히 뒤덮고, 앙상한 나무들은 마치 생을 마친 것처럼 보인다. 모든 존재는 태어나고 성장한 후 다시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걸, 예외 없는 자연의 순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나무들이 몸소 보여준다. 사람들도 나무들처럼 속도를 늦추고, 자연의 변화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더 조화롭고 아름다운 삶에 대해 숙고하며 새로운 흐름을 준비한다.
‘나무와 공존하는 도시’, 사람과 자연이 대립하지 않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도시의 풍경을 그려볼수록,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삶이 펼쳐질 그런 곳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커진다. 그렇기에 일단 나부터, 지금 이곳에서부터, 그런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하나둘씩 찾아내고 이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품는다. 계절의 변화를 잘 따르고, 가능한 장소마다 텃밭을 가꾸며, 나무를 심어서 잘 돌보고, 무엇보다도 내가 살아가고픈 삶을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그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고, 마음 맞는 벗을 찾아 함께 실천해나갈 것이다. 더 많은 나무와 숲, 새와 꿀벌과 야생동물을 품은 ‘나무와 공존하는 도시’에서는, 지금의 우리가 미처 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아름다움이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우리는 이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필자 패트릭 라이든, 강수희: 생태예술 창작그룹 ‘시티애즈네이처(City as Nature)’ 작가
도시와 자연, 사람들 사이의 조화로운 연결을 주제로 활동하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농법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자연농(Final Straw)>(2015)을 제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책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2017)를 펴냈다. ‘나무가 디자인하는 도시’ 프로젝트로 2022 대전과학예술비엔날레, 2023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 참가했으며, 현재 대전 보문산 자락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