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니 시간도 멈추더라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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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김장을 앞두면 으레 어머니는 방앗간에서 찹쌀을 빻았다. 정미기계가 덜덜 소리를 내며 찹쌀을 곱게 빻아 내뱉으면 벌써부터 침이 고였다. 대부분 김장김치 속에 들어갔지만, 일부는 찹쌀부침개로 변신했다. 찹쌀가루를 물에 풀어 적당한 농도로 반죽하여 프라이팬에 구우면 반죽이 익어가며 부풀어 오르면서 이내 바삭바삭하게 익었고, 그 한 귀퉁이를 젓가락으로 떼어내면, 모짜렐라치즈처럼 찌익 하고 늘어지던 부침개의 맛이란.

정.미.소. 곡식을 찧고 빻는 곳.  방앗간이라고도 불린 그것은 마을입구에 상징처럼 서 있었다. 다들 배를 곯을 때도 정미소 안에는 쌀가마니가 가득했다. 궁핍한 현실과는 달리 하얀 쌀이 마구 쏟아지던 그 곳은 성냥팔이소녀가 창으로 바라보는 황홀한 풍경 같았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정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소멸은 아주 빠르게 진행됐다. 마을 어귀에서 위용을 자랑하던 정미소는 대규모 미곡처리장에 그 자리를 내어준 후 급속히 쇠락해졌고 녹슨 기계는 처치 곤란한 흉물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제 정미소는 인적이 많지 않은 시골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까.
그런데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에 아주 특별한 정미소가 있다. 평범한 농촌마을에 자리한 계남정미소. 이곳 대표인 사진작가 김지연 씨(63)는 전국을 돌며 사라져가는 정미소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500여 군데를 돌았나, 그는 진안의 마령면에 있는 계남정미소에‘꽂혔다.’한 시대 사람들의 밥이고 꿈이었던 정미소가 2006년, 문화를 나누는‘공동체박물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배경이다.
예전‘정미소’가 마을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한 만큼 이왕이면 마을 공통의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공간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름도‘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로 붙였단다. 계남정미소가 특별한 이유는 유명한사람의 작품전시가 아니라 우리 옆에서 흔히 있었지만 사라진 것들, 우리가 공유하는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삶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란 대단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 곁에 있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들, 그것의 가치를 함께 느끼고보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요.”
60평 남짓한 정미소 안에는 아직도 가동이 가능한 정미기계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2000년 3월이라 쓰인 도정요율표도 붙어있다. 안쪽에는 잃어가는 기억, 되돌리고 싶은 추억들을 부여잡는 전시회가 열리는 따뜻하고 정겨운전시공간이 아담하게 마련되어 있고, 입구 한 쪽에는 계남정미소를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의 메시지를 담은 노트가 수북이 쌓여있다.

계남정미소에는 가동가능한 정미기계가 그대로 있다.
계남정미소에는 가동가능한 정미기계가 그대로 있다.
정미소 안쪽에는 정겹고 따뜻한 전시공간이 있다.
정미소 안쪽에는 정겹고 따뜻한 전시공간이 있다.
2006년에 문을 연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는 우리의 소중한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공간이다.
2006년에 문을 연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는 우리의 소중한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공간이다.

2010년 12월, 계남정미소에서는 전라북도 근대학교 100년사를 볼 수 있는‘우리학교’가 전시되었
다. 3월까지 문을 닫고 오는 4월 새로운 테마로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옛 추억이 그리워, 혹은 예전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 오다가다 들른 이들에게 쉴 의자와 따뜻한 차 한잔을 내어주는 계남정미소. 그곳은 정미기계에서 황홀하게 쏟아지던 새하얀 쌀들처럼,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추억들을 풀어내게 만든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햇볕처럼.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 www.jungmiso.net)
.신수경skshin7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