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는 일에 대하여

– 제주 마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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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육지에서는 미적거리는 봄이 제주에는 보따리를 풀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송악산 선착장에 도착했다. 날이 화창해도 바람이 강하게 불면 마라도 가는 배가 뜨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을 졸였는데, 다행히 하늘이 파랗게 열리고, 짙고 푸른 바다를 하얗게 가르며 배가 출발했다.
  쾌속선을 타고 섬을 향해 가는 동안 하늘과 바다, 그리고 섬밖에 보이지 않았다. 영화 <자산어보>의 마지막 장면처럼, 몇백 년 전과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섬으로 가는 길. 풍경은 온통 하늘과 바다 뿐이었다.
섬으로 가는 길. 풍경은 온통 하늘과 바다 뿐이었다.

마라도와 짜장면
마라도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1990년대 모 통신사 광고에서였다. 당시 유명한 개그맨이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가다가,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짜장면 시키신 분!”을 외친다. 마침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말, “미안한데, 내가 마라도로 옮겼어.” 강력한 전파력을 강조한 설정이었는데, 전파력보다 더 선명하게 남은 것은 마라도와 짜장면의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이었다. 마라도에서는 정말 짜장면을 먹을까? 근 30년 전, 광고를 보며 들었던 의문이었다.

송악산에서 마라도까지 뱃길 30분. 섬에 머무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다.
송악산에서 마라도까지 뱃길 30분. 섬에 머무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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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짜장면.
방풍나물과 톳이 들어간 마라도 짜장면.

  “예전엔 하루에 배가 두 번 들어왔어요. 아침에 오면 오후에 나가야 하는데 배가 고프잖아요. 관광객들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게 짜장면이나 칼국수 같은 걸 만들었죠. 그 뒤로 마라도가 유명해지고 관광객이 많이 늘어나면서 섬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1시간 30분으로 제한되어 있어요. 섬을 둘러보고 요기도 채우려면 짜장면이 가장 빨라요.”
  결혼 후 20년째 마라도에 산다는 김은영 씨는 짜장면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21년 현재 마라도에서 짜장면을 파는 식당은 10개로 늘었다. 식당마다 넣는 재료도 맛도 달라 ‘마라도 짜장면’에 대한 평이 갈린다고 했다.

10년 전까지 마라도에서 주요 관광수단이었던 카트. 지금은 짐 운반용으로만 허용된다.
10년 전까지 마라도에서 주요 관광수단이었던 카트. 지금은 짐 운반용으로만 허용된다.

나무와 농지가 없는 섬,
경쟁에서 협력으로 가기 위한 실험
1883년. 마라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지 14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기록을 보면 초기에 정착한 사람들은 원시림을 개간해서 농사를 지었고 그 과정에서 숲이 사라졌다고 나와 있다. 지금도 마라도에는 그늘을 드리울만한 나무가 없다.
  “농민은 없어요. 땅이 척박하거든요. 예전엔 감자랑 수박을 재배했는데 파도가 치면서 해수가 밭에 침투되는 데다가 바람 때문에 침식이 많이 생기니까 농사짓기가 어렵죠.”
  1990년대부터 농업이 사라졌고 현재는 채소를 기르는 작은 ‘우영팟(텃밭)’만 농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마라도에는 성당,교회,절이 다 있다. 마라도성당 모습.
마라도에는 성당,교회,절이 다 있다. 마라도성당 모습.

  천혜의 경관과 바다 생태계의 다양성을 지닌 평범한 어촌마을이었던 마라도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 것은 1990년대 중반, 유람선이 섬으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관광객들이 밀려오고 방송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며 한때 연간 170만 명이 오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하늘과 바다뿐이던 섬이 왁자지껄 사람들로 북적이고, 대기업 편의점이 들어섰으며 민박과 식당 간판으로 채워졌다. 주민 소득이 높아지고 활기를 띠는 것 같았지만, 난립하는 전동카트로 자연경관이 훼손되고 환경 오염 문제가 심각해졌다.
  관광객 유치 경쟁이 심해지면서 주민간 갈등과 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이에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주민들은 2019년 ‘마라도협동조합’을 결성했다. 조합에는 마라도 마을정관에 따라 일정 기간을 살면 자격이 주어지는 ‘정주민’ 42명 중 24명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방풍나물은 마라도의 새로운 소득원으로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방풍나물은 마라도의 새로운 소득원으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흔한 풀이 귀한 자원이 되다
해안선을 따라 섬을 돌다 보면 억새밭 군데군데 군락 지어있는 초록색이 눈에 띈다. 마라도의 특산품인 방풍초다.
  “한 10년쯤 전인가, 마라분교에 부임한 선생님이 섬에 자생하는 식물을 조사해 식물도감을 만들었는데, 야생초가 168종이나 되더라고요. 사실 그땐 방풍나물이 뭔지 잘 몰랐죠. 그런데 관광객들이 와서 ‘여기 이렇게 좋은 게 있네?’ 하면서 뜯어가는 거예요. ‘그게 좋은 거예요?’ 하고 물어봤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김은영 씨는 톳 짜장면에 방풍나물을 넣는 것을 시작으로, 아침마다 방풍초를 부지런히 채취해 다양한 활용방안을 고민해왔다. 최근에는 협동조합 차원에서 김형신 제주보타리농업학교 대표의 도움을 받아 방풍막걸리를 개발해 제조과정 시연까지 마쳤다.

김형신 대표가 김은영 이사장(오른쪽)에게 방 풍막걸리 제조법을 전수했다.
김형신 대표가 김은영 이사장(오른쪽)에게 방풍막걸리 제조법을 전수했다.

짱뚱어와 방풍나물
영화 <자산어보>에서는 정약전이 어부漁夫 창대에게 짱뚱어에 대해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먹는 것이냐?” “우리는 안 먹고 돼지 주는데 자셔보시든가요.” 후에 정약전의 살림을 맡아 하는 가거댁이 짱뚱어탕이 차려진 밥상 앞에서 “우리 선상님이 보릿고개에 먹을 거 하나를 더 찾아주셨다”며 웃는다.
  마라도의 방풍나물 이야기는 영화 <자산어보>의 이 장면과 겹쳐진다. 너무 흔해서 가치를 알지 못했던 보석 같은 자원들이 발견되는 과정. 수십 년간 지역을 다니면서 많이 목격했던 일이기도 하다.

“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대한민국 가장 남쪽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그리고 이 섬에서 기술이나 지식이 없는 사람도, 몸 불편한 노인도 따뜻하게 함께 살아보고 싶어요. 그렇게 하다 보면 섬에 있는 모두가 함께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섬 주민의 ‘소박하지만 원대한’ 바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지역이 지닌 자원과 가치를 찾아내는 것을 돕는 일이 더욱 섬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6년째 휴교령으로 문이 닫힌 마라분교처럼, 전문가나 관료가 책상 앞에 앉아 계산기를 두들기며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글·사진 신수경 편집장

마라도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멀리 마라도가 보인다.
마라도를 나오며. 멀리 마라도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