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단서와 흔적들
계절에 따라 순환하는, 언어로 완벽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풍경들이 있다. 30년 가까이 우리나라의 농촌과 이웃 나라, 혹은 먼 나라의 농촌, 혹은 농업 현장을 다니면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기록하고 경험하였고, 마음에 담았다. 투박하고 정겨우며 무뚝뚝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무수히 만났고, 적정기술과 첨단과학이 척척 실현되는 농업을 목격하고 눈이 휘둥그레진 경험도 많았다. 농업은 이미 스마트해진 지 오래다. 그런가 하면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아찔하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경들. 그것들에 사연이 겹쳐지면 감동은 배가 되었다.
그래도 정작 마음을 움직이는 건, 어디에서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고 사소한 단서, 흔적들이었다. 오래된 집과 지붕, 밭과 논, 숲과 나무, 이것저것 촌스러운 치장을 한 자전거, 낡았지만 단정한 농기구, 귀퉁이가 떨어진 키, 깔끔하게 쓸어놓은 마당, 꽃무늬 천으로 귀와 뒷덜미를 덮은 챙모자, 먼지가 내려앉은 몸뻬 바지…. 셜록 홈즈가 아니어도 뻔히 추측할 수 있는 삶의 반경과 모양새에 오래 시선을 두고 싶어진다.
모두 한때는 꽃이었다
특히 이맘때 여름 농촌은 어떤 카메라로 담아도 아름답다. 송전탑과 전선만 피할 수 있다면, 알프스에도 뒤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군다나 그 아름다움은 ‘기껏해야’ 소들이 먹는 풀뿐이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갖가지 생명의 삶터이자, 일용할 양식이 될 곡식과 채소의 어우러짐이라는 사실에 옷깃을 공손하게 여미게 된다.
그리고 현장에서 새삼 깨닫는 것은, 모두 한때는 꽃이었다는 사실이다. 사과, 배, 복숭아, 살구만 꽃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파, 감자, 고구마, 호박, 도라지, 심지어 벼도 원래부터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 씨앗으로 싹트고 꽃이 피었다가 열매가 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 눈으로 보기 전엔 알지 못하는 ‘득도得道’의 시간.
아름답지요?
전남 곡성군에 있는 미실란 이동현 농부와 도시 소설가 김탁환 작가의 인연은, 농촌이 다양한 것들이 어우러지기에 좋은 공간임을 말해준다.
어느 날, 미실란 밥카페 ‘반飯하다’에서 인상적인 밥을 먹은 김 작가가 우연히(?) 마주친 이 대표와 인사를 나누고, 그것을 계기로 여러 차례 곡성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곡성의 농촌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런데 온갖 비인간들(벼, 우렁이, 물뱀 등등)과 대화를 나누던 이 대표가 대뜸 “아름답지요?”라고 물었단다. 논에서 연구하고 일하며 새까맣게 그을린 투박한 50대 남성에게서 나오기 힘든 ‘언어’이기도 했고,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던 순간과 장소’에서 했던 물음이었던지라, ‘비수에 찔려 숨이 막힌 사람처럼 즉답을 하지 못했’던 김 작가는 농부와 함께하면서 서서히 다양한 ‘아름다움’과 마주했고 매혹되었으며, 결국 사계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논이 내려다보이는 농촌의 폐교 2층에 집필실을 잡고 눌러앉았다.(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김탁환 저, 중 일부 인용)
아름다움은 지속될 수 있을까
문화는 라틴어로 밭을 경작한다는 뜻의 ‘cultus’에 어원을 두고 있다. 농업agriculture은 이름 속에 아예 문화culture를 담고 있다. ‘문화의 정의는 문화를 공부하는 학자의 수 만큼이다’라는 말처럼, 그 의미는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해석된다는 점에 비추면, 농촌의 ‘문화’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오랫동안 협업하고 공유해온 ‘생명체들의 협주’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협주는 지속될 수 있을까. 공유지인 농촌은 지속 가능할까. 안타깝게도 현재 농촌은 자본의 생성, 순환, 축적의 원리에 따라 변하고 있다. 사람은 없고 도시의 소비와 쓰레기 처리를 위한 시설들은 늘어난다. 자본이 지불하지 않은 폐기비용을 농촌이 그대로 떠안고 있는 셈이다. 농지가 사라지고, 산과 숲이 사라지면서 위로와 환대로 우리를 맞이하고 회복하게 했던 다양한 생명체와 문화도 소멸해 간다. 비극은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다.
글·사진 신수경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