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교체를 공약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시대교체란 무엇인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한 새 시대를 여는 것을 말한다. 박근혜 당선인은 국민행복과 대통합을 약속하고 이를 위해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힘쓰겠다고 한다. 5년 전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재임 기간 5년 동안 연평균 7%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경제 강국을 달성하겠다고 한 이른바 747을 공약하고 친재벌 정책을 쓴 것과는 사뭇 다르다. 뿌리가 같은 새누리당과 한나라당 후보가 5년 사이에 서로 다른 공약을 낸 것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747 공약과 같은 경제성장 제일주의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박근혜 당선인은 ‘행복한 농어촌’을 농정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5년 전 이명박 후보가 ‘돈 버는 농업’, ‘수출 농업’을 농정 비전으로 제시하고 네덜란드와 덴마크에 배우자고 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새로운 시대교체, 새로운 농정 패러다임의 설정
박근혜 당선인이 말하는 ‘행복한 농어촌’은 어떤 농어촌이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박 당선인은 우선 선거 때만 되면 각 정당과 대선 후보들이 ‘돌아오는 농어촌’, ‘돌아오고 싶은 농어촌’, ‘미래를 열어가는 농어촌’, ‘살맛나는 농어촌’ 등 장밋빛 비전을 제시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다른 정부의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박 당선인의 ‘행복한 농어촌’도 불행한 농어촌으로 끝날것이다. 지금까지의 정부에서는 농정은 가장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농정은 그와 같은 경제성장 정책으로 발생하는 농어업·농어촌 문제를 뒤치다꺼리하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 농정은 시장개방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 있는 농업만이 살 길’이라는 경쟁력 지상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였다. 이는 경제정책의 기조가 세계화를 통한 경제성장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다. 이명박 정부가 대규모 유통회사 및 기업농 중심으로 농업구조를 재편하여 ‘세계화와 경쟁하는 농업’, ‘돈 버는 농업’, ‘수출농업의 육성’을 추구한 것은 경쟁력 지상주의 농정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박 당선인의 새시대 농정은 과거의 잘못된 농정 패러다임인 경쟁력 지상주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농정 패러다임을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유럽연합은 1990년대부터 농업보조금 정책을 생산주의적 농업 지원에서 점차 다기능적 농업·농촌을 장려하는 농촌개발로 전환하고 있다. 농업생산의 효율화와 규모 증대를 통한 농가 수익 창출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에로의 참여에 의한 농가경영의 다각화를 통해 농가 수익을 늘리는 관점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성(생산성) 중심의 시장 지향적 농업으로부터 다기능성을 중심으로 한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농정 패러다임 변화 _ 다기능성 중심,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이러한 변화는 유럽에서도 대표적인 농산물 수출국인 네덜란드와 덴마크의 농업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는 이러한 농정 변화의 선두에 서 있다. 네덜란드는 농업정책을 담당하는 부서인 ‘농업자연식품품질부(Ministry of Agriculture, Nature and Food Quality)’ 산하에 2008년 ‘다기능농업(Multifunctional Agriculture) 태스크 포스(Task Force)’를 설립하고 다기능농업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다기능농업을 6개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노인, 장애인, 문제 청소년에 대한 치유 및 돌봄(Green care), 교육(Education), 자연 및 경관의 보전(Agricultural nature conservation), 어린이 돌봄(Child care), 농촌관광(Agro-tourism), 농장 직판과 인터넷 등을 통한 지역농산물 판매(On-farm selling and regional products) 등이 그것이다. 네덜란드의 다기능농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2011년에는 매출액이 5억 유로에 달하였는데 이는 2007년에 비해 50%가 성장한 것이다.
네덜란드 수출의 약 20% 그리고 무역흑자의 약 70%를 차지하고, 농업부문의 부가가치와 고용의 약 2/3를 수출에 의존할 정도로 글로벌 먹거리 체계(Global food system)에 깊숙이 편입된 네덜란드 농업에서 다기능농업이 주목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글로벌 먹거리 체계가 지닌 한계 때문이다.
글로벌 먹거리 체계는 산업화된 농기업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이것은 지역의 생산이나 서비스와 직접 관련이 없다. 따라서 글로벌 먹거리 체계에 편입된 농업은 사회적 혹은 공간적 연계가 없다. 글로벌 먹거리 체계는 대규모의 고도로 기계화된 단일 작물 생산 및 화학비료 집약적 생산방식이며,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시장에서의 판매를 목표로 한다. 따라서 글로벌 먹거리 체계는 식품 생산뿐 아니라 운반에도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낭비한다. 글로벌 먹거리 체계에 의존한 농업은 농약비료의 대량사용과 대형기계, 장거리 수송 등에서 보듯이 대단히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인 농업으로 이는 다수의 소농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글로벌 먹거리 체계는 환경적 지속성과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소규모 가족농과 소상인의 몰락을 가져오고, 도시화를 촉진하고 농촌 공동체를 파괴한다. 네덜란드의 다기능농업은 글로벌 먹거리 체계로부터 지역먹거리체계(Local food system)로의 전환을 의미하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가능한 좁히고, 사회적·공간적 연계를 강화함으로써 지역공동체의 회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글로벌 먹거리 체계에 깊숙이 편입된 네덜란드 농업이 전면적으로 지역 먹거리 체계로 전환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네덜란드의 다기능농업에서 보듯이 전 세계의 농정 패러다임이 종래의 효율성 중심의 시장 지향적 농업에서 지속가능한 농어업·농어촌의 실현, 글로벌 먹거리 체계로부터 지역 먹거리 체계로 전환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농어업·농어촌사회’의 실현을 위한 농정 목표와 과제
농정의 새로운 비전인 ‘도농이 더불어 사는 지속가능한 농어업·농어촌사회’의 실현하기 위해서는 농어민과 국민의 지지를 동시에 받는 농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하고, 둘째, 농어민(농어촌 주민)의 인간다운 생활권이 보장되고, 셋째, 순환과 공생의 도농공동체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과 농어민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도농공동체를 파괴하는 무분별한 자유무역협정(FTA)의 체결은 더 이상 추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농정목표 1.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의 보장
모든 국민은 안전한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소비할 권리(먹거리 기본권)를 지니고, 국가는 이것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먹거리 기본권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가식품계획’(가칭)을 작성하여, 국내의 안전한 농산물 공급 능력을 확대하고, 국민 모두가 질 좋은 식품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야 한다.
우선 가장 시급한 과제인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을 20%대에서 중장기적으로 50%대로 끌어올리는것을 포함한 ‘국가식품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쌀, 보리, 밀, 콩 등 국민 기초식량에 대한 직불제(고정 및 변동 직불)를 확대 실시하여 농가에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여야 한다.
‘국가식품계획’은 국내 농어업생산체계를 친환경적으로 전환하고, 농산물 유통에서 로컬푸드(얼굴있는 농산물, 근거리 농산물)의 비중을 높일 프로그램을 담아야 한다. 친환경 유기농업의 생산기반확대에서 중요한 것은 지역적 관점이다. 즉 유기농산물의 수요를 기본적으로 지역에서 찾고, 유기농업에 필요한 유기비료, 종자, 천적 등을 농업 생산자가 직접 조달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먹거리의 양극화를 해소할 방안을 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과 빈곤은 많은 사람들의 건강한 삶을 위협하고 있다. 빈곤층과 저소득층, 소외계층에 대한 보편적인 식량지원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농정목표 2. 농어업인의 인간다운 생활권 보장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먹거리의 생산자인 농어업인의 인간다운 생활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농가소득의 증대’이다. 실질농가소득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도시와의 격차도 확대되어 2010년 기준 농가소득은 도시근로자의 60%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농가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소득 5분위 배율(하위 20%의 평균소득에 대한 상위 20%의 평균소득의 배율)은 12배까지 증가하였다.
농가소득의 증대를 위해서는 직접지불 등 직접소득보조를 확대해야 한다. 그동안 정부의 농업에 대한 보조정책은 생산기반 및 유통시설을 비롯해 각종 영농비용 보조(기름값 보조, 박스 보조, 비료 보조, 농약 보조 등) 등 간접적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간접 지원은 농가보다는 시설업자나 농자재업자의 주머니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농업인의 소득증대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나마 상층농가에 혜택이 집중되었다. 따라서 간접지원보조금을 대폭 줄이고 직접소득보조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이 경우 직접소득보조는 무조건적인 보조가 아니라 식량자급률 제고, 친환경농업, 로컬푸드 그리고 농어업·농어촌의 다원적 기능의 제고라는 정책목표와 결합되어 추진되어야 한다. 또한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지역농업조직화(협동생산과 공동판매·가공 등)를 통해 영세소농과 고령농에게 일자리와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 헌법 10조(행복 추구권), 34조(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 기초하여 농어업인을 포함한 농산어촌 주민은 도시민 못지않은 경제적 소득뿐 아니라 복지 서비스, 보건의료, 주거, 교육, 문화 등 인간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서비스를 누릴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것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국가는 삶의 질 및 공공서비스에 대한 국민최소기본조건(National Minimum Requirement)을 설정하고 농산어촌의 실정에 맞는 단계적 실천 계획을 세우고 기초자치단체가 그것을 이행할 수 있는 재원을 지원함과 동시에 이행상황을 주기적으로 점검하여 계획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농정목표 3. 순환과 공생의 도농공동체 실현
순환과 공생의 도농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농어촌을 단순한 생산 공간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개방된 다양한 경제활동 공간, 삶의 공간, 경관 및 환경, 문화공간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농어업을 1차 산업이 아닌 6차 산업, 즉, 1차 산업(생산)을 기초로 하여 2차 산업(가공)과 3차 산업(유통 및 판매, 관광, 서비스 등)을 발전시켜야 한다. 6차 산업화는 네덜란드의 다기능 농업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이러한 6차 산업화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조직과 연계하여 추진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또한 사회적 경제 조직을 통해 돌봄, 보육, 의료, 교육, 주거, 문화 등 사회 공공서비스를 지역사회가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도록 지원한다면 상당한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다.
둘째, 도시민의 귀농·귀촌을 장려하고, 농산어촌을 도시민을 위한 문화, 교육, 휴양 및 휴식 공간
으로 개발해야 한다. 다양한 농어촌체험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의 인성을 개발하고, 농어촌문화를 보전·증진하고, 농어촌의 자연 및 경관을 보전하여 전국민에게 농어촌문화를 향유하며 즐길안락한 휴양처를 제공한다.
셋째, 생태환경 및 에너지 자원 위기에 대응하여 농어촌의 환경 및 생태적 자원을 보전해야 한다. 친환경 농업 및 지역 자원순환형 농업을 실현하고, 농지·수자원 등 생산기반을 보전하고, 농어촌의 자원을 활용하여 식량 및 에너지의 지역 내 자급을 추진하여 지역경제의 자립성을 높인다.
농정성공의 조건 _ 제도 혁신과 인적 혁신
이상에서 제시한 농정 비전과 목표 그리고 주요 과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제도혁신과 인적 혁신이 필요하다.
첫째, 농정 추진체계를 중앙집권적 획일적 농정에서 지방분권적 자율적 농정으로 전환하고 거버넌스 농정을 실시해야 한다. 농업은 기본적으로 지역농업이고, 농어촌문제는 지역문제이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농어업·농어촌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보다는 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권한과 재원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해야 한다. 또한 지속가능한 농어업·농어촌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경제적·사회문화적·환경적으로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정부의 역할 못지않게 민간의 주체적 참여가 중요하다. 부처별로 분산 추진되는 농정을 통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농정을 총괄 기획 조정하는 기구(농어촌발전위원회,가칭)가 필요하고, 민간이 농정에 참여할 수 있는 틀(농업회의소, 가칭)이 필요하다.
둘째, 농협개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농협법 개정으로 농협중앙회는 농협금융지주회사와 농협경제지주회사를 자회사로 거느리는 거대 지주회사로 확대 개편되었다. 농협중앙회가 출자하여 전국 단위의 금융지주 및 경제지주를 설립한 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농협중앙회는 ‘비사업적 기능’ 즉 회원조합의 연합조직체로서 농정활동과 조사연구, 회원조합 지도·교육·감독 기능을 담당하는 본연의 중앙회로 재편하고, 중앙회 독자조직인 금융지주회사와 경제지주회사를 회원조합의 신용사업연합회와 경제사업연합회로 개혁해야 한다. 이러한 중앙회 개혁을 토대로 지역농협을 개혁하여 생산·가공·유통 관련 지역농업 조직화의 주체로 육성해야 한다.
셋째, 새로운 농정을 담당할 지역의 주체를 확립해야 한다. 결국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지속가능한 농어업·농어촌 사회의 실현’도 지역의 주체 역량만큼 실현될 수 있다. 지역 만들기, 협동조합, 친환경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역리더’를 육성할 연차계획을 수립하고, 이들을 교육하고, 실천을 통한 학습((Learning by doing)의 기회가 다양하게 주어져야 한다.
※필자 박진도: 충남발전연구원 원장.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석사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경제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하버드대학, 영국 뉴카슬대학 등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연구하였고, 한국사회경제학회장, 한국농업정책학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대통령 자문 농어촌특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순환과 공생의 지역만들기』(2011), 『WTO와 농정개혁』(2005), 『그래도 농촌이 희망이다』(20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