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상실의 시대 – 예식장과 산부인과가 사라진 자리에서
글·사진 정은정
농촌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하면 어떤 공부인지 의아해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농촌에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을 만난다는 뜻이다. 농촌에 다닌다고 꼭 농민만 만나는 것도 아니고, 고집도 하지 않는다. 농업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농촌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만나는 것도 내겐 큰 의미다. 농촌지역의 흥망성쇠가 있다면 지금은 명백한 ‘쇠’의 시절이다. 올해 본 풍경을 내년에 그대로 볼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작년에 분명 과수원이었던 밭은 공장터가 되기도 하고 시설하우스가 들어서기도 한다. 하여 마음이 급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두고 간단한 인상기라도 남겨두려 한다. 같은 장소에 시차를 두고 방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쇠잔해 있다. 그러니 오늘 내가 방문한 고장의 풍경은 가장 흥한 날의 풍경이기도 하다.
며칠 전에는 경기도 화성시의 ○○면 친환경 쌀 작목반 강의에 다녀왔다. 우렁이 농법으로 벼농사를 지어 주로 학교급식에 쌀을 내는 작목반이다. 시군구, 읍면동리 단위로 보자면 면 단위에 해당하는 강의였다. 강의 장소는 농협이었다. 면에서 가장 큰 건물이자 강의가 가능한 시설을 갖춘 곳은 농협이거나 면사무소다. 이런 강의는 강의비와 상관없이 일단은 무조건 출강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럴 능력도 안 되거니와 그 몫은 전문 연구자들이 훨씬 더 잘 해내는 일이란 깨달음도 있다. 다만 풍경 스케치에 가까운 일을 하러 돌아다니는, ‘글쟁이’ 차원에서 일을 주로 맡곤 한다.
이날 강의 장소는 친언니가 20여 년 전 이맘때, 결혼식을 올린 예식장이기도 하다. 농민의 딸인 언니가 농민의 며느리가 되던 날이다. 농촌의 기초 경제단위인 작목반은 농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농촌의 경제 중심은 농협이다. 농협 조합원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자녀들의 결혼식을 농협 예식장에서 올리는 것이고, 부모나 본인 장례를 농협 장례식장에서 치르는 일이다. 오래도록 젖소를 길렀던 사돈댁은 우리나라 품목조합에서는 가장 큰 ‘서울우유’ 조합원이었다. 그날의 언니 결혼식은 나도 잊은 지 한참이던 농촌의 경사를 치르는 느낌이었다. 뷔페가 아니라 오랜만의 ‘국수 잔치’였기 때문이다. 사돈댁은 대형 식당을 잡아 국수를 말아내고 제철 해산물을 공수했다. 바로 지져낸 각종 전과 잡채 등 온기 있는 음식이 올라왔다. 첫 혼사에 신이 난 사돈댁에서 솜씨 좋은 아주머니들을 웃돈 주고 고용해 잔치 음식을 내어놓았는데, 아직도 친인척들은 그날 언니의 결혼식 음식이 참 맛있었노라 회상한다. 그 당시에도 이미 농촌의 애경사 풍경이 많이 바뀌어서 뷔페를 불러 정신없이 먹고 헤어지는 결혼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강의를 한 장소는 언니가 색동 무늬 카펫을 밟고 신부 입장을 한 곳이었다. 예식장 사업은 진즉 접었다 한다. 이제 농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결혼식을 하더라도 ‘컨벤션 센터’와 같은 입에 붙지도 않는 대형 예식장에 가서 올리곤 한다. 하긴 사회 전체로 보자면 예식장 사업이 휘청댈 정도로 혼인 건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추세다. 농촌은 모두 먼저 겪고 있을 뿐이다. 종종 이런 일이 있었다. 강의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플라스틱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모두 예식장이었던 곳이다. 예식장과 산부인과, 소아과 병원이 사라진 곳.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 모두 사라진 자리가 지금의 농촌이다.
그날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들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다. 마을에 꽃상여 메는 상두꾼은 진즉에 사라졌고, 자손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시로 나간 지 오래다. 고향 산천을 지키는 나무들은 ‘못난 나무’들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늙은 나무’들이었다. 그래도 꽃상여 한 번 올라타고 마지막 생을 정리하려는 그 꿈마저도 무너진 자리. 나뭇등걸처럼 거친 손들이 부둥켜안았다는 이야기는 건너 들었어도 눈물이 난다.
꽃상여가 진 자리
농촌경제연구원 김정섭 연구원이 자신이 자란 고향에서 해마다 열리는 큰 마을 회의에 참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는 이제 더는 마을의 장례식에서 꽃상여를 쓸 수 없다는 결정이 난 것이다. 올해부터는 돌아가시게 될 노인들을 인근의 장례식장으로 모시겠다는 결정이었다. 그날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들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다. 마을에 꽃상여 메는 상두꾼은 진즉에 사라졌고, 자손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시로 나간 지 오래다. 고향 산천을 지키는 나무들은 ‘못난 나무’들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늙은 나무’들이었다. 그래도 꽃상여 한 번 올라타고 마지막 생을 정리하려는 그 꿈마저도 무너진 자리. 나뭇등걸처럼 거친 손들이 부둥켜안았다는 이야기는 건너 들었어도 눈물이 난다.
고향을 지켰던 큰아버지는 마을의 상일꾼이었다. 특히 상례가 벌어지면 큰아버지는 더욱 바빠졌다. 대처로 나간 고인의 자손들은 우왕좌왕하기 마련이고, 결국 고향을 지키던 큰아버지에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장례를 치르곤 했다. 농촌에서 먹고살기 힘들어 도시로 나간 자손들의 형편도 빤해 겨우 종산에 묏자리 하나 잡아 두었을 뿐, 병원 영안실에 가서 치르는 장례는 엄두도 못 내기도 했다. 두부 두 판, 계란 열 판, 콜라 다섯 박스. 동리 사람들이 이런 물목을 추렴해서 치러내는 가난한 장례도 많았다. 그럼 큰아버지는 염장이 역할도 하셔야 했다. 고인이 품을 팔아 겨우 마련해 놓은 수의를 입힐 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어머니 말씀으로는 자기(큰아버지) 머리가 희어지기도 전에 동네 시신을 만졌다며 질색을 하시곤 했다. 사촌 언니들과 조카인 나도 큰아버지가 염을 하고 온 날은 옆에 가지도 않으려 했다. 지금은 부모상도 치러본 처지여서 그 일이 얼마나 고맙고 거룩한 일인지를 잘 알지만, 어릴 때는 그저 ‘시체’를 만지고 온 큰아버지 손이 무서웠을 뿐이다. 그런데 정작 몇 년 전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읍내의 농협 장례식장으로 모셨다. 상조회가 오고 정해진 매뉴얼대로 장례가 치러졌다. 고향 사람들의 장례를 진두지휘하던 큰아버지의 장례식은 정작 그 자손과 마을 사람들이 이리하라면 이리하고, 저리하라면 저리하는 객식구가 되어버린 쓸쓸한 장례 풍경이 되고 말았다.
청년농민들은 외제차도 타지 말아야 하고 명품백도 사면 안 된다는 발상은 또 얼마나 폭력적인가. 농민들은 모두 순박하게 ‘몸뻬’나 입고 트럭이나 몰고 다녀야 한다는 뜻인가. 이 또한 도시인들 머릿속에 박힌 ‘상상된 농촌’일뿐이다. 어쩌면 한태웅 군의 순박한 말투와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는 ‘농촌성’에 열광하는 것이야말로 도시민들의 전형적인 농촌 이미지 소비일 뿐이다.
‘태웅이’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농업계는 ‘농민 홀대론’까지 거론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농정에 대한 강한 불만을 여기저기 쏟아내 왔다. 그러다 2018년 12월 27일에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과 농업계가 간담회를 했다. 농민과 농업 관계자,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여당 의원 등 150여 명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렇게 성사된 만남에서 현실적인 농정에 대한 진단이나 제언이 쏟아지기보다는 덕담 수준의 이야기들이 오갔기에 알맹이가 없었다는 혹평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야 각자의 입장에서 오갈 수는 있지만, 이날 농업인 간담회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은 것은 엉뚱하게도 ‘태웅미米’였다.
KBS 휴먼다큐 프로그램 <인간극장>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난가을 tvN 채널에서 방영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태웅 군은 ‘소년농부’로 얼굴을 알렸다. 출연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태웅 군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서 조부모와 부모, 이렇게 3대가 사는 근래 보기 드문 농촌 가족의 구성원이다. 그는 자신의 꿈이 ‘대농大農’이라 이야기했고, 능숙하게 농기계를 다루면서 농사를 짓는 한태웅 군의 모습은 여기저기 화제가 되었다. 지금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체에서 다루곤 한다. 급기야 한태웅 군은 청와대 농업인 간담회에 초청을 받아, 자신의 집에서 직접 생산한 햅쌀 ‘태웅미’를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간담회장에서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면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기삿거리로도 괜찮았는지 많은 언론이 ‘태웅미’와 ‘소년농부’에 대해 보도를 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한태웅 군 같은 청년이 우리 농업의 미래”라며 “앞으로 청년 창농 종합지원체계를 구축하는 등 청년농의 성장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한태웅 군의 퍼포먼스는 현 정부의 농정 방향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 정부들 모두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겠다며 귀농·귀촌 장려에 이어 ‘청년농업육성’을 농정 기조로 삼아왔다. 한 소년이 농민이 되겠다는 꿈에는 박수와 응원을 하고 싶지만, 이 특이한 사례에 과연 농촌의 희망을 걸 수 있을까?
여기저기 청년농업인 육성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청년농민’이나 ‘청년농부’라는 말보다는 ‘청년창업농(청년창업형 후계농)’으로 명명하며 일종의 농촌형 청년창업을 촉진하는 양상이다. 만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출생자 중에서 농업에 뜻을 둔 사람들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정책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들의 정착지원금으로 독립경영 1년 차 월 100만 원, 2년 차 월 90만 원, 3년 차 월 80만 원을 바우처 카드로 제공한다. 그러다 2018년에 정착지원금을 받은 일부 청년창업농들이 외제차를 수리하고, 백화점에서 명품백을 샀다며 ‘부정수급’ 논란이 일면서 여론도 많이 싸늘해져있다. 하지만 청년농민들은 외제차도 타지 말아야 하고 명품백도 사면 안 된다는 발상은 또 얼마나 폭력적인가. 농민들은 모두 순박하게 ‘몸뻬’나 입고 트럭이나 몰고 다녀야 한다는 뜻인가. 이 또한 도시인들 머릿속에 박힌 ‘상상된 농촌’일뿐이다. 어쩌면 한태웅 군의 순박한 말투와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는 ‘농촌성’에 열광하는 것이야말로 도시민들의 전형적인 농촌 이미지 소비일 뿐이다. 이미 지상에 존재하지 않던 환상 속의 농촌을 그렸던 드라마 <전원일기> 속에서 없던 농촌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2016년을 기점으로 농촌지역의 농민들 중 65세 이상 고령농민이 40%를 넘어서고 있다. 유엔 기준에서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20% 이상인 사회를 초고령화 사회로 본다. 그런데 이미 한국 농촌은 40%를 넘어섰으니 ‘초초고령화’ 사회다. 해마다 초고령화 비율은 무섭게 증가해서 몇 년 안에 ‘초초초고령화’ 사회를 맞이할 것이다. 농촌 고령화의 문제는 근래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태어난 1970년대 말부터 언론에서는 ‘농촌 일손 부족’이라는 제하로 ‘농촌 고령화’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하고 있다. 1992년 4월 16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농촌인구의 고령화 문제를 이렇게 다루고 있다. “50세 이상이 인구 70%를 차지한다”며 국가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이다. 27년 전 50대였다면 현재 80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언론 기사뿐만 아니라 각종 농업 관련 문건을 보면 농촌 고령화 문제는 쉼 없이 다뤄진다. 적어도 문제의식만은 끊긴 적이 없단 뜻이다. 하지만 이렇다 할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외진 곳에 자리 잡은 과소화 마을의 경우 해마다 주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든다. 시쳇말로 삼복더위와 동장군의 계절에 초상이 이어지고 빈집으로 해마다 담장도 허물어지는 자리가, 지금의 한국 농촌이다.
특히 농촌의 고령화가 곧 ‘여성화’의 경향을 띤다는 것은 인구학에서도 상식이다. 단순히 여성들의 평균수명이 남성들보다 높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연원에 기인한다. 농업 생산만으로는 생계가 어렵기 때문에 남성 인구가 더 많이 도시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사회현상 중에서 대체로 ‘여성화’라는 현상이 갖는 함의는 빈곤과 차별의 문제와 닿아있고 농촌 고령화와 농촌 여성화 문제도 다르지 않다.
2018년 5월, 전남 영암군에 큰 교통사고가 났다. 총각무 수확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탄 7명의 여성농민과 운전기사가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 70~80대인 할머니들이었다. 여성농민들이 그저 손주들 용돈을 주자고 품팔이에 나선 것은 아니다. 현금을 쥐어야만 생활은 굴러가고 농촌 여성들의 중요한 생계 수단은 여전히 이런 품을 파는 일이다. 이날 사망자 중에서 최고령 할머니는 83세였다. ‘돈 욕심’으로 치부할 수 없는 절실한 생활의 문제였음을 충분히 짐작한다. 그저 자기 먹거리나 구할 요량으로 텃밭 농사나 지어서는 농촌 생활은 굴러가지 않는다. 먹고 입고 쓰는 것들 모두 돈을 주고 사 와야 하는 것들이고, 특히 ‘병원비’의 문제가 고령여성농민들에게는 절실하다. 평생 쪼그려 앉아 밭일하다 망가진 몸을 치료받자면 다시 밭에 나가 쪼그려 앉아야 하는 것이 현재 고령여성농민의 삶이다. 농민들은 국민연금이나 농지연금 가입률도 턱없이 낮아 자신의 노구를 움직여 밥과 약값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 몇몇 지자체에서 시도하려는 ‘농민수당’의 논의는 빨리 진척되어야 한다. 농가 단위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농민에게 직접 지급해야 한다. 농가 단위로 지급하면 경영 주체로 등록된 ‘할아버지’ 통장으로 들어가고 또 할머니들은 그 적은 돈도 만져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할머니들의 ‘파스값’이라도 벌충하게끔 재빠른 시행이 필요하다. 책상 위에서 펜을 굴리며 논의만 하고 있기엔 농민들은 하루가 달리 늙어간다.
청년 취업률 높이기가 국가시책으로 자리를 잡은 이때 정부의 농정 대상이 청년에게 쏠려 있는 것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다만 청년 농민들이 딛고서야 할 땅의 현실이 이토록 차갑다. 노인들이 모두 떠나가고 빈집들은 흉가로 방치된다. 이런 마을에 청년들을 밀어 넣어야 하겠는가. 이들에게 정착을 지원하는 일은 마을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돕는 일이어야 한다. 농업기술에 대한 훈련도 중요하지만, 마을의 당당한 일원으로 육성하는 일도 시급하다. 하지만 가시적 성과를 얻기 위해 농업에 진출한 청년 농업인의 머릿수 늘리기에 급급해 보인다. 이렇게 숫자만 늘린다고 한국 농업·농촌에 희망이 생길까?
존엄한 소멸을 보장하는 농촌을 바란다
농촌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군수와 면장이 직접 선물 보따리를 싸 들고 방문할 만큼 출산은 고장의 큰 경사다. 종종 파격적인 출산장려 공약도 지방선거에 내걸리곤 한다. 그런데 왜 ‘장례 지원금’에 대한 공약을 찾아보기는 어려울까? 오래도록 지역을 지킨 농민들의 마지막이야말로 융숭하게 대접해야 할 일이 아닐까. 더는 꽃상여를 탈 수 없어서 할머니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게 하지 말고, 이제 꽃상여 운영은 군이나 면에서 하겠다고 나서주면 안 될까.
평생을 땅에 붙어 농사를 짓고 먹거리를 내어 국민을 먹여 살리고 지역을 지킨 귀한 손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공공으로 표명해야만, 청년 농민도 자신의 존엄을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농민들도 언젠가는 고령농민이 될 것이다. 지금의 고령농민들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가 곧 이들을 대하는 태도의 준거다. ‘소년농부’ 한태웅 군이 이 땅에서 청년농민으로 그리고 고령농민으로 잘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청와대에 불러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태웅 군이 살아가는 현장의 고령농민들을 예우하는 일이다. 존엄한 소멸의 현장을 태웅 군에게 보여주는 것만큼 좋은 영농교육은 없다.
※필자 정은정: 농촌사회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대학에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치킨展』(2014), 공저로 『질적연구자 좌충우돌기』(2018)가 있으며, 백남기 농민 투쟁기록을 담은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2018)가 있다. 경향신문에 ‘정은정의 먹거리 공화국’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