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해소를 위한 상상력,
농민기본소득

해남군, 전국 최초 농민수당 지원 조례 제정
지난 2018년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인 12월 21일 전남 해남군 의회는 제289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를 열고 해남군이 제출한 ‘해남군 농업 보전 등을 위한 농민수당 지원 조례안’(이하 농민수당 조례)을 의결했다. 해남군으로써는 몇 년 동안 지역에서 논의됐던 농민기본소득(농민수당)이 드디어 결실을 보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농정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농민수당 조례가 제정된 것이라 의미가 더 깊다고 할 수 있다.
 해남군의 농민수당 조례 제정이 많은 의미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의미는 ‘농민수당’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법률(조례)에 명기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해남군이 농민수당 조례를 제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중 하나가 명칭의 문제였다. 해남군에 거주하는 모든 농가(임업, 축산 포함)에 일률적으로 연간 60만 원의 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 논쟁의 여지가 있어 법률적 판단이 필요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농정에서 일률적으로 농가 혹은 농민에게 일정한 수당을 지급한 예는 거의 없기 때문에, 농민수당은 농업정책보다 복지정책에 가깝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이에 따라 해남군은 농민수당 조례가 정부의 사회보장 심의 대상인지 알아보았다. 문의 결과 농민수당은 복지정책이 아닌 농업정책으로 사회보장 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즉, 농민수당은 포퓰리즘이라는 부정적 의미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각종 수당 정책의 하나가 아니라, 농업과 농촌의 공익적 가치를 증대하고 농산물 시장 개방화에 따른 농업인의 소득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농업·농촌 문제의 근본 원인은 불평등한 정책
해남군의 농민수당 조례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농민수당이 우리나라 법령에 등록된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먼저 해남군 농민수당 조례에는 “농업인의 소득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농업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농업과 농촌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공익적 기능 증진을 위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이라고 적혀있다. 농민수당의 목적은 1) 농업인의 소득 안정 도모 2) 농업인의 삶의 질 향상 3) 농업과 농촌의 지속 가능한 발전 4) 농업과 농촌의 공익적 기능 증진으로 규정했다. 역으로 말하자면 농민수당이라는 획기적인 정책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1) 농업인의 소득 불안정 2) 농업인의 삶의 질 하락 3) 농업과 농촌의 지속 불가능 4) 농업과 농촌의 공익적 기능 상실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해남군의회 ‘농민수당 조례’ 의결 후 기념 촬영. ⓒ민중당 전남농민위원회
해남군의회 ‘농민수당 조례’ 의결 후 기념 촬영. ⓒ민중당 전남농민위원회

 그동안 정부에서는 3농(농업, 농촌,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정책을 펴왔다. 농업현대화사업, 농촌개발사업, 친환경농업, 도농교류사업, 선진화사업, 창조농업, 농업융복합사업 등 선진국 농업·농촌의 좋은 정책은 대부분 차용해 실시했다. 하지만 각종 지표는 우리 농업·농촌의 현실이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황을 나타낸다. ‘가난을 걱정하지 말고 공평하지 못함을 걱정하라’라는 말처럼, 우리 농업·농촌정책에 내재한 불평등 때문이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합리성의 비합리화’처럼, 각각의 정책은 합리적이고 우수할지 모르겠지만 그 결과는 불평등하고 비합리적이다. 이런 상황이 누적되다 보니 이제는 농업·농촌의 지속 가능성을 우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놓인 것이다.

농민기본소득, 불평등의 굴레를 끊는 시작
농민기본소득(농민수당)이 등장한 근본적 원인은 농업과 농촌 내 만연한 불평등 때문이다. 농업, 농촌, 농민의 핵심 문제는 불평등에서 비롯되었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3농이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농민기본소득의 핵심 내용이다. 농민의 소득 불평등은 크게 도농 간 소득 불평등, 농업인 간의 소득 불평등으로 나뉜다.
 먼저 도농 간 소득 격차 문제다. 도시근로자 가구 소득대비 비중이 2017년 기준 63.3%인 것으로 나타났다. IMF 금융위기 당시에는 85.6%였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문제는 이러한 추세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라는 점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2027년 도농 간 소득 격차는 56.9%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도농 간 소득 불평등 못지않게 농가 간 소득 불평등도 심각하다. 농가 내 소득 불평등을 알려주는 지표는 소득 5분위 배율이다. 상위 20%와 하위 20%의 배율을 따지는 것이다. 2005년에는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 배율이 10.1이었는데 2010년에는 12.4, 2015년에는 14.5로 늘었다. 상위 20% 농가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늘어난 반면, 하위 20% 농가의 소득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증거다.

농가당 연평균 소득 5분위별 변화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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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농가 내 소득 불평등이 심각한 것은 농업재정 투자가 중대농 위주로 편중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불평등 정책은 ‘농업직불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농업직불금은 농가소득을 보전하고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증진하는 훌륭한 정책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가, EU와 같이 면적에 비례하는 직불금 방식으로 지급하는 본질적 한계로, 면적이 큰 중대농은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면적이 작은 영세소농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국가마다 다르겠지만, EU의 농가당 평균 농지 면적은 대략 40~50ha에 달한다. 따라서 1ha당 100만 원의 직불금이 지급될 경우 농가는 연간 평균 4,000~5,000만 원의 농업직불금을 받는다. 이것은 기본 직불금이고 여기에 환경 보존, 경관 보존, 문화 보존, 생물종 다양성 유지 등의 조건을 이행할 경우 추가적인 직불금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소농 직불금을 통해 작은 농가들에는 면적에 상관없이 일정한 금액의 직불금을 지급한다. 그래서 EU의 농업직불금은 농가의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문자 그대로 기본 소득이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의 농가당 평균 경지 면적은 1.5ha에 불과하다. 따라서 논농사 경우 이 면적으로 받을 수 있는 직불금은 150만 원 정도고, 친환경 농업을 하더라도 연간 200만 원 안팎을 받는다. 이처럼 적은 농업직불금으로 우리나라 농가들이 농촌에서 지속적인 삶을 유지하기는 극히 어렵다.
 더 큰 문제는 농가 간 농업직불금 수령액의 격차다. 2017년 쌀 농가 기준 전체 농가의 45%를 차지하는 0.5ha 미만 소농은 전체 직불금의 12~13%를 받았다. 반면, 전체 농가의 12%를 차지하는 2ha 이상 농가가 받는 직불금은 약 50%를 차지했다. 혹자는 농사를 많이 짓는 농가가 농업직불금도 많이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현재 소농에 대한 소득 보장 장치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농업직불금마저 중대 농가들이 독식한다면 농촌에서 영세소농은 존속할 수 없다. 농민기본소득, 농민수당은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극약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좋다는 정책’은 다 써봤지만, 약효를 기대하기 어려워 농민기본소득 같은 혁명적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경기도는 여주시, 양평군을 시작으로 농민기본소득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경기도
경기도는 여주시, 양평군을 시작으로 농민기본소득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경기도

농민기본소득, 또 다른 불평등을 경계해야
전남 강진군, 해남군에서 시작된 농민수당은 맑은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전북 고창군, 충남 부여군, 경기 여주시가 농민수당(농민기본소득)을 올해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외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농민수당(농민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기초자치단체뿐만 아니라 광역자치단체에서도 농민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전라남도는 2020년 농민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연구 용역을 발주했고, 전라북도는 올해 준비해서 2020년도에 농민수당을 실시할 예정이다. 충청남도는 농민수당 방식으로 실시되고 있는 농업환경실천사업을 점차 확대할 계획이다. 경기도는 도지사의 강력한 의지로 여주와 양평을 중심으로 농민기본소득 도입을 확대할 방침이다.
 이렇게 빠르게 확산되어 가는 농민기본소득(농민수당)에 대해 농업계 대다수는 환영하고 있지만, 일각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쟁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명칭의 문제이다. 현재 학계와 농민 단체 간에는 이견을 보인다. 학계에서는 ‘농민기본소득’을 선호하지만, 농민단체와 지자체에서는 ‘농민수당’을 선호한다. 학계에서는 기본소득의 개념을 바탕으로 농민의 자유와 존엄성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 농민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반면, 농민단체에서는 시장 개방으로 어려움을 겪는 농업인에 대한 소득을 보장하고 농업·농촌의 공익적 가치의 증진을 위한 농민수당을 선호하고 있다.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취지는 비슷하나 두 용어 간에는 여전히 간극이 존재한다.
 둘째는 지급 대상의 문제다. 강진군, 해남군, 부여군에서 실시하는 농민수당은 사실 농민수당이 아니라 농가수당이다. 이는 농가별로 지급하기 때문에 애초 농민기본소득이 추구하고자 하는 개별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농가에는 남성 가구주뿐만 아니라 여성농민, 청년농민 등 여러 구성원이 존재하지만 현재와 같이 농가 단위로 지급하면 농가주 이외에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 특히 농민수당이 실질적으로 농가수당으로 추진되면서, 농가의 공동 주체인 여성농민이 소외되고 있어 이들의 상실감이 크다.
 셋째는 지급 범위의 문제다. 농촌에는 농민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과 농촌을 유지하는 다양한 직업군이 함께 존재한다. 또한, 평생 농사를 지어왔지만 힘에 부치거나 몸이 불편해 농사일을 거의 하지 못하는 은퇴농도 많다. 농민수당을 실시하면서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 윤리적으로 옳은지 판단해 볼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타 제도와의 중복성 문제다. 사실 농민기본소득(농민수당)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농민기본소득은 현재의 농가소득 불평등 문제, 농업·농촌의 가치 증대 및 지속 가능성 보장 등과 같은 굵직한 문제뿐만 아니라 도시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있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농민기본소득을 시행한다고 해서 다른 사회보장 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농민의 의료와 문화적 소외 문제, 농촌지역의 복지와 교육 기회 확대는 정부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정책의 영역이다.

농민기본소득, 풀뿌리 민주주의와 사회적경제의 토대
농민기본소득이 시행되면 농가소득 증대뿐만 아니라 추진 과정에서 여러 긍정적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먼저 풀뿌리 민주주의가 복원될 것이다. 농민수당(농민기본소득)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각 지자체의 농민수당(농민기본소득) 추진위원회가 시·군 단위를 넘어서 읍·면 단위, 나아가 마을 단위까지 조직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지역의 농민이 누구인지, 혹시 누가 부정한 방법으로 농민수당이나 농업직불금을 받는지 감시하고 견제할 것이다. 농민수당의 이행 조건이 있기 때문에 상호 견제와 협력으로 농업 환경을 지키고 농민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 시작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대되는 것은 농민의 공익적 활동 증진이다. 농민들이 농민수당을 활용해 다양한 사회적 경제 활동을 전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농민기본소득은 지역에서 필요한 사업을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불평등을 해소하고 농촌에 온기를 돌게 하는 것, 이것이 필자가 견결히 농민기본소득 도입을 주창하는 주된 이유다.

16※ 필자 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대산농촌재단 대산장학생 2기로 농민기본소득, 토종씨앗, 농민인권, 마을공동급식 등 우리 농업·농촌의 ‘기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3농을 매개로 한 한·중 학술교류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