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농정에 대한 기대와 실망의 교차점
2019년 기해년 새해를 맞이했다. 우리 나이 셈법으로 문재인 정부도 세 살을 먹었다. 임기 5년에 3년 차니 임기 말의 정리 기간을 생각하면 중반을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국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였지만, 최근의 지지율을 보면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농민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닌 듯하다.
왜 많은 국민은 문재인 정부에 그토록 큰 지지와 성원을 보냈던 것일까? 그리고 출범 당시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왜 실망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많은 국민이 ‘나라다운 나라’를 꿈꿨고, 문재인 정부를 통해서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 꿈은 요원하다는 좌절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결과에 오롯이 문재인 정부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기득권의 저항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이 그 저항을 국민의 지지와 응원으로 넘어설 수 있다고 믿어왔지만, 번번이 좌절되는 지점들을 확인하였고, 이로 인해 문재인 정부가 과거 정부와 큰 차별성이 있다기보다 오히려 유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라다운 나라’는 ‘나라답지 않았던 나라’로부터 벗어나려는 환골탈태의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국정 운영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농정 공약을 내세우면서 국가 농정의 기본 틀을 바꾸고, 농업-먹거리-환경을 아우르는 농정을 펼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흔히 들어왔던 다소 구태의연한 구호 ‘누구나 살고 싶은 복지 농산어촌 조성’ ‘농어업인 소득 안전망의 촘촘한 확충’ ‘지속 가능한 농식품 산업기반 조성’을 100대 국정 과제에 포함했다.
농정은 개혁되고 있는가?
국가 농정의 기본 틀을 바꾼다는 것은 농업을 단지 산업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농업의 다원적 기능과 공익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래서 무엇보다 농민을 중히 여기는 것이 농정 패러다임 전환의 시작이다. 농업을 화폐적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경제’라는 관점에서 봐야 농정의 기본 틀을 바꿀 수 있다. 이는 작년 12월 UN에서 결의한 ‘농민권리선언’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10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전 세계의 농민운동 조직들이 의지를 모아 만들어낸 농민권리선언은 기존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바탕을 둔 농업과 먹거리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사람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동안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등한시했던 종자, 물, 토지 등에 대한 농민의 권리와 먹거리 기본권, 특히 여성농민과 농촌노동자의 권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 논의 과정에서 한국은 UN 인권이사회 이사국 자격으로 실무그룹 논의부터 참여했지만, 단 한 번도 농민권리선언 채택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고, 작년 총회에서도 기권했다. ‘선언’의 채택으로 농민의 권리가 당장 신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농정의 기본 틀을 바꾸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결의에 대한 신뢰가 상당 부분 훼손된 것은 분명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2019년 신년사 첫 번째 약속인 “농업·농촌의 다양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 동물간호복지사, 양곡관리사, 산림레포츠지도사 등의 자격증을 신설하겠다”라는 말은 농사짓는 농민을 먼저 챙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게다가 내용도 확실하지 않은 스마트 농업을 확산하겠다는 선언은 농정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정보통신기술과 재배기술의 결합이 세계와 경쟁하는 유망 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유리온실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했던 20여 년 전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현재 농업·농촌의 위기는 생산력의 열세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확대되는 생산량과는 반대 방향으로 추락하고 있는 농가소득, 더 정확히는 농업소득 때문이다. 스마트팜 혁신밸리가 요술 방망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말리는 농민들은 신기술을 거부하던 구한말 사람으로 치부 당하고 있다. 자본에 주도되는 기술혁신이 아니라, 농민을 중심에 둔 기술혁신을 이뤄야 진정으로 의미 있는 스마트 농업이 될 수 있다. 기술을 통해서 자본이 이윤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노동과 소득이 개선되어야 한다. 농민에게는 매우 절박한 기술일지라도 자본의 입장에서 이윤이 되지 않는 기술은 시장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의 생리다. 농정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야기한다면 최소한 이런 고민이 우선되어야 한다. 청년들에게 단순히 온실 환경제어, 재배기술 심층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농장 기술자를 양성하는 과정에 불과하고, 농업의 악순환(agricultural treadmill, 기술 발달→생산량 증가→가격 폭락→신기술 도입(부채 증가)→생산량 증가→가격 폭락…)을 심화시킬 뿐이다.
현재 농업·농촌의 위기는 생산력의 열세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확대되는 생산량과는 반대 방향으로 추락하고 있는 농가소득, 더 정확히는 농업소득 때문이다. 스마트팜 혁신밸리가 요술 방망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말리는 농민들은 신기술을 거부하던 구한말 사람으로 치부 당하고 있다. 자본에 주도되는 기술혁신이 아니라, 농민을 중심에 둔 기술혁신을 이뤄야 진정으로 의미 있는 스마트 농업이 될 수 있다.
먹거리 선순환 구축과 푸드플랜
물론 문재인 정부의 농정이 과거 정부의 농정과 차별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농업과 먹거리, 환경 등을 통합적으로 고민하는 농정을 펼치려는 노력이나, 공익형 직불제 확대 등은 현재의 농업 문제를 풀어내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먹거리의 생산과 소비를 과거처럼 분절적으로 보지 않고, 생산·유통·가공·소비·재활용 등의 과정을 통합적으로 보는 푸드플랜(Food Plan, 먹거리를 지역 단위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해 분절적 체계에서 소외되었던 중소가족농과 먹거리 빈곤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도 있다. 선순환의 먹거리 체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전의 정부가 실천하지 못했던 통합적 먹거리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력 지상주의를 내걸고 효율 중심의 생산 정책으로 매진하던 정책에서 벗어나서 순환과 상생의 정책을 고민하는 것은 의미 있는 전환이다. 중소가족농이 먹거리 생산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이를 더욱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이들 중소가족농과 지역의 먹거리 수요를 연결 짓는 작업, 더 나아가 지역의 먹거리 빈곤층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통합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이전 정부에서 분산적, 분절적으로 이뤄졌던 정책에 비하면 큰 진전이다. 공공 급식을 확대하고자 하는 노력이나, 군대 급식의 질 향상을 지역 농업과 연결 지어 해결하려는 의지, 시장에 내팽개쳐 놓았던 공공 기관 등의 단체 급식을 지역 상생의 고리로 만들려는 시도는 새롭게 지역을 살리는 농정, 포용과 배려의 농정이라고 할 수 있다.
먹거리 선순환의 구축은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되는 농업과 먹거리, 환경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려는 조처이기도 하다. 지속 가능성의 토대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원활한 신진대사에 의해서 이뤄질 수 있다. 자연과 생태, 환경을 고민하는 농업이어야 물적 생산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실천되고 있는 것이 유기농업, 친환경농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유기농업의 철학과 가치가 먹거리 선순환 구축의 자양분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먹거리 선순환에서는 이 부분을 크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 안전한 먹거리를 이야기하면서 관리·감독 중심의 안전, 인증 중심의 안전만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서너 달 만에 터진 살충제 계란 사건이 있다.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기도 전에 관리·감독의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식약처 주장이 농정과 먹거리 정책을 ‘안전’이라는 프레임 속에 선점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아쉬운 지점이다.
푸드플랜을 통한 농정 패러다임의 전환
거대 담론만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농정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야말로 거대한 변화를 꾀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변화는 소소한 정책적 실천들을 통해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먹거리 선순환 구축은 현재 친환경농업이 직면해 있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하나의 중요한 주춧돌로 삼아야 한다. 사실 한국의 친환경농업은 인증, 더 정확하게는 제삼자 인증에 길들어 있는 친환경농업이다. 친환경농업의 세계적인 확산에 기여해 온 IFOAM(International Federation of Organic Agriculture Movements, 세계유기농업운동연맹)조차 인증이라는 제도는 속임수에 능할 수밖에 없다며,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과정 중심의 유기농업 운동을 유기3.0(Organic 3.0)이라는 이름으로 제창한다. 이들은 제삼자 인증이 아닌 참여자인증제도(PGS, Participatory Guarantee System)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참여자인증제도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인증 제도로 근거리에서 이뤄지는 생산-소비 관계에서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지역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참여자 인증이 먹거리 선순환 체계에 흡수된다면, 이 인증 제도는 단지 지역의 인증을 넘어서 다른 지역과 제휴 푸드라는 틀 속에서 연계 고리를 확대해 신뢰를 확산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많은 농가에는 장벽처럼 느껴지는 친환경농업의 확대에도 기여할 수 있다. 농업 총조사에 따르면, 2010년과 2015년을 비교했을 때 판매 금액 500만 원 미만 농가의 친환경농산물 전문 유통업체 출하율은 낮아졌으나, 판매 금액이 높을수록 출하율은 높아졌다. 이는 친환경농업이 판매 금액이 높은 농가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부분이다. 인증 비용 부담이라는 것도 작용했겠지만, 이 또한 인증 중심의 체계가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친환경 인증보다는 느슨한 수준의 실천을 요구하는 완주의 로컬푸드 인증을 보면, 로컬푸드 인증 농가에서 친환경 인증 농가로 전환하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2017년 18농가, 2018년 25농가). 푸드플랜이 먹거리 선순환 체계를 구축하는 새로운 운동인 것과 마찬가지로, 친환경농업운동이 진정한 의미의 운동성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고민이 필요하다.
공익형 직불제의 확대도 문재인 정부가 고민하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지점이다. 공익형 직불제의 확대는 농민이 농사짓는 것 자체에 대해서 사회적 가치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시장만 바라보고 짓는 농사가 아니라, 짓고 싶은 농사를 가능하게 하고, 살고 싶은 농촌에서 만드는 공익형 직불제는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직불제는 쌀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다. 해마다 쌀 생산 농가는 줄어들어서 2005년 74%에 달했던 쌀 생산 농가는 2017년 56%로 많이 감소했지만, 전체 농업직불금(17년 기준 1조7천억 원) 중 쌀 직불금 비중은 80.7%를 차지한다. 또 전체 농가의 72%에 해당하는 1ha 미만 중소농은 직불금의 29%를 받는 반면, 상위 7%에 해당하는 3ha 이상의 농가가 직불금의 38%를 받고 있다. 쌀 직불금이 한편에서는 쌀값의 하락으로 인한 농업소득을 실질적으로 보전해주는 순기능이 있다고 치더라도, 직불제의 본래 기능인 공동체 유지와 사회적 형평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여지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공익형 직불제의 확대가 쌀값 하락으로 연결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쌀값 보장은 먹거리 선순환 체계의 구축이라는 틀 속에서 공공 급식의 확대 등을 매개로 한 공적 조달 체계의 구축을 통해서도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푸드플랜은 다른 정책들의 실현 가능성을 넓혀주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는 포괄적인 정책이고, 역으로 푸드플랜이 그런 기능을 수행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먹거리 선순환을 구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4월이 되면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일명 농특위가 출범할 예정이다. 농특위는 농업과 먹거리, 환경을 통합적으로 고민하고, 다양한 수준과 층위의 논의를 모을 수 있는 귀한 자리다. 우리 농업·농촌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 그 중심에 농민을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 바로 지금이라는 각오로 모두의 마음과 지혜가 모인다면, 먹거리를 매개로 한 사회적 통합의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작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기권이라는 방식으로 외면했던 ‘농민 권리’를 늦게나마 바로 세우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윤병선: 건국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같은 대학교 글로컬(충주)캠퍼스에 재직하고 있다. 서울시의 먹거리시민위원회와 농식품부 먹거리선순환 TF 등에 참여하고 있다. 대안농식품운동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면서, 현장의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농업과 먹거리의 정치경제학』(울력, 2015)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