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

김규호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였던 2020년 4월에 이른바 ‘코로나19발 식량위기론’을 검토하는 짧은 보고서를 쓴 적이 있다. 당시 일부 국가가 발동하기 시작했던 식량 수출 제한 및 중단 조치 동향과 국제기구의 권고 사항 등을 주로 다룬 글이었는데, 그 끝에 덧붙인 말이 이랬다.
  “끝으로 한 가지 짚어볼 만한 유의미한 사실은, 이 모든 논의를 우리 사회가 차분하게 검토하고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의 근저에는 주곡 생산의 안정성과 충분한 재고량이 있다는 점이다.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이는 더욱 가치 있는 사실로 드러날 것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24개 품목의 국제가격동향을 모니터링해 5개 품목군(곡물·유지류·육류·유제품·설탕)별로 매달 발표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가 최근 몇 개월간 상승 추세를 보이는가 싶더니, 급기야 2021년 11월 지수는 134.4포인트로 이른바 ‘애그플레이션Agflation¹’ 분위기가 강하던 2011년 2월(137.6) 이래 10여 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곡물가격지수는 한술 더 떠 141.5포인트로 나타난다. 생산량의 감소와 공급망 차질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탓으로, 이는 코로나19 사태의 전 지구적 장기화와도 관련이 깊다. 어쩌면 세계적으로 식량수급에 적어도 ‘노란색 경고등’ 이상이 켜졌다고 할 수도 있는 이러한 사태를 우리는 물론 아직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더욱 가치 있는 사실, 주곡 생산의 안정성과 충분한 재고량 덕분이다. 요소수 대란이 발생하고 ‘미래 먹거리’라는 희유금속을 확보하고자 국가의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우리는 지금의 실제 먹거리를 걱정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의식 못 하지만 실상은 모두가 안다. 그럴 필요가 없음을.
  그러나 그 가치가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점심때 손님이 오거나 약속이 생기면 여당 당사 앞을 지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벌써 며칠째 거기에 적재되어 있는 쌀포대를 보게 된다. 쌀 변동직불제 폐지에 대한 이해를 구하며 정부가 일찍이 농업인에게 약속하였고 법률에도 명시한 ‘쌀 자동시장격리’의 발동을 검토할 요건이 충분히 되었음에도 요지부동인 농정당국에 항의할 자리와 방법을 누군가 나름대로 찾은 결과가 그 어디쯤에 쌀포대를 부려놓는 것이었으리라. 수많은 여의도 직장인들이 밥 먹으러나 밥 먹고서 무심히 지나치는 거기서 역설적으로 더는 밥이 되지 못하는 쌀, 돈이 되지 못하는 농사의 모습으로 빌딩 사이 불어닥치는 칼바람을 맞고 덩그러니 섰는, 아니 포개진, 쌀포대를 보면 그게 무슨 하 수상한 시대의 상징만 같아 마음이 시리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게는 희소한 것의 아쉬움에 대한 감각은 있어도 충분한 것의 고마움에 대한 감각은 사라진 듯하다. 사라져 희소해진 그 감각은 왜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가.
  쌀이 이렇게 늘 넘쳤던 것은 아니다. 우리 영화사에 해방 후 첫 극영화로 기록된 <똘똘이의 모험>(1946년 작)이란 작품이 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똘똘이와 복남이라는 용감한 두 어린이가 쌀을 훔쳐 가는 도둑들을 신고하고 쫓아가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이야기라 들었다. 영화 마지막에 두 친구가 상을 받는 장면에는 실제 초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출연했다고도. 이 작품의 문화사적, 혹은 영화사적 의의 같은 건 잘 모르겠다. 아마 ‘반공영화’라는 카테고리나 ‘동원 체제 아래 문화 선전물의 어린이 활용’ 같은 시각으로 분석하기도 용이하리란 생각이 든다. 다만 스토리 그대로를 담백하게 받아들이건대 그만큼 이 나라 사람들에게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것이었다, 쌀은. 똘똘한 아이(똘똘이)와 복된 아이(복남이)는 결국 집안의 ‘쌀’을 지켜낼 아이였던 것이다.
  그 지혜와 복은 이제 천덕꾸러기의 대명사가 되었다지만, 새해에도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더는 똘똘하지 않고 복되지 않아 천덕꾸러기인 것인가, 여전한 똘똘함과 복됨을 정작 우리가 망각한 탓에 옳게 호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말하라 세월이여 이제 그대의 말을 똑바루 하라’(이용악 詩, ‘새해에’의 일부).

1) 애그플레이션Agflation: 농업을 뜻하는 영어 ‘애그리컬처agriculture’와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경제 현상인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로 곡물 가격 상승에 따른 일반 물가 상승 현상을 가리킨다.

* 글이 작성된 이후인 2021년 12월 28일, 여당과 정부는 당정협의를 거쳐 이른 시일 내에 쌀 20만 톤을 시장격리하기로 뒤늦게 결정하였다. 본래 시장 안정을 위하여 법에 명시된 쌀 수급안정대책의 수립·공표 기한은 매년 10월 15일이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2개월 이상 지체된 셈이며, 아직 나머지 7만t의 쌀에 대한 추가적 대책도 필요한 상황이다.

김규호※ 필자 김규호: 국회입법조사처 농업·농촌 정책 담당 입법조사관.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환경농업단체연합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자료 조사와 분석 등을 통해 여야 국회의원의 입법 및 정책개발을 돕는 것이 주 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