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눈이 없다면

글·사진 윤석원

 

  과수원의 사계는 뚜렷하다. 봄이 오면 온갖 풀과 곤충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깨어난다. 사과나무는 뿌리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끌어 올려 꽃눈과 잎눈을 부풀려 기지개를 켠다. 봄·여름을 거치면서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잘 익은 열매로 풍성해진다.
  그러다 한겨울이 오면, 한 해 동안 힘겹게 열매를 키워낸 사과나무는 그동안 수고한 이파리를 다 떨구고, 벌거벗은 채 찬바람을 맞으며 모처럼 3개월여의 긴 휴식에 들어간다. 풀과 곤충도 동면에 들어간다. 과수원은 모든 생명체가 숨죽인 듯 고요해지고, 사과나무 가지 위로 하얀 서리와 눈이 켜켜이 쌓인다. 칼바람과 냉기만이 과수원을 엄습한다.
  이때쯤이면 농부도 한숨 돌릴 수 있다. 이른 봄부터 부단히 바쁘던 과수원 일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다. 농기구를 씻어 말리고, 동력분무기와 전지가위는 깨끗이 닦아 기름칠한다. 지하수가 얼지 않도록 수도꼭지를 싸매고 호스 물기도 뺀다.
  사과 농부는 1년간 과수원의 모든 생명체와 함께 대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사과나무가 열매를 잘 키우도록 돕는다. 자연이 키워낸 사과를 수확하고 판매한 고단한 농부는, 얼마 안 되는 전리품을 보듬어 안고 그 역시 대지와 함께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겨울, 삭막해 보이는 과수원에는 농부의 휴식과 자연의 침묵만 있는 게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분명히 ‘꽃눈’이라는 희망이 잉태되고 있다. 사실 나무는 오뉴월 초여름부터 열매를 맺으며 내년의 열매를 위해 어린 꽃눈도 함께 키운다. 꽃눈은 여름과 가을을 거치면서 조금씩 도톰해진다. 매끈하고 예쁜 꽃눈은 겨울이 되어 앙상해진 나뭇가지 위에서 몽우리가 되어 수줍은 듯 조용히 엎드려 겨울을 난다. 나무는 한 해 열매를 맺고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계라는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스스로 내년을 준비한다. 그 준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꽃눈이다. 꽃눈이 없다면 사과나무는 내년에도 사과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과는 자연의 위대한 섭리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인간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자연의 섭리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농부는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이론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잘 알지 못해도 온몸으로 느끼며 산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 앞에서 늘 겸허하다. 자연을 거슬러서는 안전한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여 지금은 사과밭이 황량해 보이지만, 꽃눈이 있기에 봄이 오면 과수원은 다시 살아 숨 쉬게 된다는 사실을 농부는 마음속으로 그리며 희망을 품는다.
  조금만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면 이 겨울의 과수원처럼 황량하기 그지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수원으로 치자면 봄, 여름, 가을을 거쳐 겨울에 다다른 느낌이 든다. 자연 앞에 오만하고 인간 앞에 거만하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존엄성은 내팽개쳐진 지 오래되었다. 도시와 농촌지역의 격차는 날로 벌어지고 있고, 수도권 인구 집중은 심각하다. 출산율은 OECD 국가 중 가장 낮고, 노령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청년들의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고, 빈부격차는 심각하다. 물신주의가 팽배하면서 인간은 소외되고 있다. 존경받는 지도자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황량해 보이는 겨울 과수원에는 꽃눈이라는 희망이 있는데, 우리 사회에는 도무지 희망의 꽃눈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희망의 꽃눈을 농부에게서 찾는다. 농부는 인간과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며 순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필자 윤석원: 양양로뎀농원 농부,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강원 양양군에서 2016년부터 유기농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현역 농민이다. 2024년 6월, 《한국농정신문》에 8년간 연재한 ‘농사일기’를 엮어 책 《농사로부터의 사색》(한국농정)을 펴냈다. 농민이 되기 전에는 중앙대학교에서 30년 이상 교수로 재직했다. 중앙대 산업과학대 학장, 한국농업정책학회 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