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오늘을 지키며, ‘밥값하는 중’

글·사진 최 별

2024년 지방소멸대응기금으로 다시 살아난 죽산면 죽산양조장.

  농사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평야를 바라보며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 싶었건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24개월 된 아이가 혹여나 벌써부터 소외되는 자리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며 터미널 옆 상가주택에서 월세를 산다.
  전직 MBC PD, 서울의 모든 것을 때려치우며 김제로 내려올 때의 멋졌던 패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8개월 전의 초심을 더듬으며 이 글을 쓴다.

Long long time ago
  2020년, 모두가 상상도 못 한 팬데믹으로 일상이 흔들리던 때였다. 더 망가질 게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김제 평야 위 파란 지붕 폐가를 샀다. 지어진 지 115년 된 집이었다. 가격은 4500만 원. 대출로 집을 사고, 하루하루 집 고치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집을 고치고 나니 어느새 인기 유튜버(?)가 되어 있었고, 받아본 적 없는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느냐고. 그럴 때마다 어리둥절함 반, 민망함 반으로 대답했다. “용기가 아니라, 이제 될 대로 되라는 포기였어요.”
  열심히 하려고 할수록 서울의 삶에는 자꾸 정이 떨어졌다. 어느 날은 예쁘게 꾸며놓은 주방에서 짜장라면을 끓이다가 화가 치밀었다. 고작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나를 위해 차리는 한 끼. 그것도 라면인데 물 버리는 걸 깜빡하고 수프를 넣어 망쳐버린 것이다. 울컥 눈물이 났다. 도대체 왜 이러고 사나.
  그날 서울에서 세 시간을 내리 달려 만난 폐가, 나의 집. 이상하게도 무서움보다 포근함이 먼저 왔다. 마루에 걸터앉아 한참 광합성을 했고, 낯선 처녀가 신기했던 옆집 이웃과도 얼굴을 텄다. 그렇게 집을 만난 지 5년째 되던 2025년, 잘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김제로 내려왔다. 영영 평야를 보고 살고 싶어서.

사람이 어디서든 밥값은 해야지
  평야를 보고 살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연을 구구절절 펼쳐보자면 조금 복잡하다. AI가 도래한 세상에서 내가 속한 업계의 수명이 불안하게 느껴졌고, 어여쁜 아이를 낳아 엄마라는 정체성을 만나고 보니 조금 덜 전투적으로, 조금 더 평화롭게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은 가장의 책무를 다하며 성실히 직장을 다니고 있던 터라, 육아휴직을 1년만 해보자며 살살 꼬드겨야 했다.
  원하던 삶은 단순했다. 폐가를 고쳐 만든 서점, ‘책밭’을 계속 운영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로망보다 현실이 먼저 들이닥쳤다. 남들 하듯 서울에서 대기업을 다니는 맞벌이 부부가 되어, 남들 하듯 집값이 더 오르기 전에 경기도에 아파트를 마련했고, 남들 하듯 신혼집 인테리어도 했다. 그렇게 빚이 생기고, 계획에 없던 아이가 생기고, 퇴사까지 했으니 책방에 앉아 한적하게 시간 보내며 텃밭을 가꿀 여유가 있을 리가.
  당장 삶의 방식부터 바뀌어야 했다. 더 이상 월급쟁이가 아니었으니까. “나 이제 뭐 해서 먹고 살지?” 5년 전부터 나를 보고 모여든 마을 청년들에게 하루가 멀다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참 한심했다. 나란 사람, 참 일관성 있게도 정말 아무 생각이 없구나.
  그렇게 전전긍긍 탐색을 하던 어느 날, 정부 지원 사업 공고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그동안 내가 별생각 없이 해오던 일들이 대부분 ‘로컬’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들에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지역의 문화를 콘텐츠로 만들고, 농촌의 가치를 도시와 연결하는 일. 나는 이미 그 일을 계속 해 오고 있었는데. 유레카. 그길로 나는 나에게 ‘로컬 기획자’라는 말을 갖다 붙였다.
  그때부터는 눈에 보이는 게 다 아이템이었다. 책방 앞에 펼쳐진 논을 보며, 이 평야의 느낌을 어떻게 도시에 전달할 수 있을까, 이 마을에 얼마나 좋은 자원들이 많은데 왜 이렇게 평가절하될까.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머리가 계속 돌아갔다. 지난 5년간 동네 사람들이 해준 수만 가지 말 중에 필요한 말만 쏙쏙 떠올랐다. 그중 하나, 마을 정미소 아드님의 말이 머리를 울렸다. “우리 정미소에서는 막 도정되어 나온 쌀로 바로 밥을 해 먹는데, 갓 도정한 쌀로 밥을 해 먹어보면 밥맛이 정말 달라요.”
맞다. 나도 도시에서는 이 맛을 모르고 살았지. 찾아보니 정말 쌀은 도정 후 2주만 지나도 맛과 향, 영양이 떨어진다고 했다. 내친김에 일본에도 가보았다. 웬걸, 일본의 마트에는 10kg, 20kg 포대 쌀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장 큰 포장 단위가 해봐야 3kg, 5kg.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유통 방식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그때부터 쌀 구독 서비스를 준비하는 한편, 콘텐츠를 다시 시작했다. 이제 또 이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싶은 말이 생겼으니까. 채널 제목은 ‘밥값하는 중’. “그래, 이게 내 할 일이다. 내 밥값이다.”

마을에서 아이를 위한, 우리 가족을 위한 가업을 짓기로 다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게 스펙?
  사업이 자리를 잡아갈수록 발목을 잡는 것은 매일 밤만 지나면 쑥쑥 커버리는 아이였다. 자고 나면 자라는 아이를 보며 매일 밤마다 앞으로도 이 마을의 인프라에 앞으로도 만족하며 살 수 있을지 고민이 찾아온다. 만약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면? 지방 출신인 남편은 내게 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것도 스펙이야.” 서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시골도 ‘선택해서’ 살 수 있는 것이라는 그 말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아이에게 다른 건 못 물려줘도 그런 건 물려줬어야 했던 걸까. 혹시 나 때문에 이 아이의 출발선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 것은 다름 아닌 ‘가업’을 짓는다는 마음이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은 나 말고는 다 농사지을 땅이 있고, 망해서 돌아와도 뭐라도 할 게 있는 집이 있었다는 점이다. 동네 어르신들은 겉모습은 군색해 보여도 무엇을 살 때 빚을 지는 건 상상도 안 해본 건강한 마인드를 가지고 계셨고, 할부와 대출에 찌든 노멀한 나의 삶이 점점 초라하게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이곳에서 우리 아이를 위한, 우리 가족을 위한 가업을 짓기로 했다. 이게 얼마나 잘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잘되면 잘되는 대로, 잘 안되면 안되는 대로 숭고해지리라. 언젠가 이 터전이 아이가 숨 쉴 틈이 되리라는 마음이다.

요즘 우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시골 마을 방송국을 만들어가고 있다.

결국 또 ‘방송국’이라니
  요즘 우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시골 마을 방송국을 만들어가고 있다. 작년에 시작한 콘텐츠와 쌀 구독 서비스를 하나의 사업 형태로 묶어내다 보니 결국 ‘방송국’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방송국을 퇴사했는데, 결국 또 하고 싶은 게 방송국이라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나. 그런데 살아보니 방송국이 정말 필요한 곳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다.
  2025년, 로컬 기획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 농촌의 실상을 너무 모르니 다짜고짜 주민 심층 인터뷰부터 시작했다. 우리 지역은 논을 10필지, 20필지 이상 가진 대농이 적지 않은 곳이지만, 생산 이후의 모든 과정은 여전히 도시에 의존하고 있었다. 생산자들의 절박함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누구는 배춧값을 떼였고, 누구는 콩값을 떼였다. 어느 해에는 정부가 쌀은 그만 지으라 했다가, 이제는 콩도 많다고 그만 지으라 한다. 점점 농사의 재미와 보람보다는 의존적인 구조에 지쳐가고 마음은 메말라간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 것은 결국 ‘유통 자립’, ‘우리 마을만의 브랜드’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어, 저 그거 할 수 있는데요?’ 그저 먹고사는 기술 중 하나였던 나의 콘텐츠 제작 기술이 비로소 빛을 발할 타이밍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제대로 해보겠다며 뛰어다닌 것이.
  덩달아 함께하는 PD들도 바빠졌다. 추수철 논으로 새참 배달 다니는 중국집 어머님을 따라다니다 하루 종일 멀미와 체기에 시달리던 PD는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고, 누군가는 논바닥에서 우리 마을만의 색다른 잔치를 만들어보겠다며 맨손으로 짚단을 나르다 지문이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

짚단을 쌓아 무대를 만들고 마을 잔치를 열었다.
김제 죽산 평야에서 열린 마을 잔치에는 2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가 만드는 마을
  처음에는 이게 되겠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우리 마을 주민들이 주인공인 유튜브 채널은 방송 섭외 작가들의 즐겨찾기가 되었고, 콘텐츠는 한 달 만에 50만, 6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맨땅에 헤딩으로 시작한 마을 축제는, 짚단으로 만든 무대 덕분에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놀이터가 되었다. 그곳에서는 마을 어머님들이 푸짐한 마음으로 전을 부쳤고, 공연 시간에는 핫팬츠로 갈아입고 나온 어머님들의 난타 공연을 시작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토크콘서트가 이어졌다. 이틀 동안 이어진 마을 잔치에 다녀간 사람만 2천여 명. 농한기면 손님이 없어 고생이던 마을 상인들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결국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해온 것은 방송국 그 자체였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같이 살아간다는 마음이 들게 만들고, 웃고 울게 하는 것. 한 사회와 시대의 맥락 안에 나라는 존재도 함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것. 서울의 방송국은 하나의 건물 안에 모든 것이 있었다. 편집실, 스튜디오, 회의실, 자료실까지, 빼곡하게.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다. 그 방송국의 기능들을 이 평야 곳곳에 하나씩 숨겨 놓으면 어떨까 하고. 논 옆 창고가 스튜디오가 되고, 마을의 식탁이 콘텐츠가 되고, 평야를 바라보는 시간이 하나의 방송이 되는 곳. 언젠가 이 평야 전체가 우리의 방송국이 되고, 방송국 마을이 되어 매일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 그게 우리가 꿈꾸는 풍경이다.
  쌀은 그런 꿈을 담아 보내는 소중한 첫 상품이다. 아직 서비스라기엔 부족한 게 많지만, 부족한 대로 시작해 보기로 했다. 현재 쌀 구독자 60명. 우리의 응원단이다. 갓 도정한 쌀로 지은 밥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만든다. 이 쌀이 많이 팔리면 결국 소포장된 고부가가치 지역 쌀이 더 많이 팔리게 되고, 그만큼 지역 농민들에게도 실질적인 이익이 돌아간다. 쌀을 팔아 남은 돈으로는 우리 콘텐츠 제작비가 나온다. 물론 지금이야 적자지만, 혹시 모르지. 우리가 농촌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지.
  그리고 지난 2월, 마을 신년회에서 또 하나의 꿈이 생겼다. 새해를 맞아 마을 청년 상인들이 모두 모였는데, 올해부터 내년까지 줄줄이 결혼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축하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했다. 혹시 다 떠나가 버리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래서 물어봤다. “결혼하면 어떻게 할 거야? 애 낳으면 결국 시내로 나갈 거지? 다 전주로 갈 거지?” 그런데 내년까지 줄줄이 결혼을 앞둔 세 커플이 뜻밖의 말을 했다. “이 마을에 집만 있으면 여기서 살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못 이긴 척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 여럿이 되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이곳이 정말 우리의 마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도, 그 자리에서, 여전히 밥값하는 중
  그래서 오늘도 새벽부터 서울 출장을 간다. 밤늦게까지 기획안을 쓴다. 보란 듯이 꾸준하고 치열하게 살아서 이 마을을 가꾸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나도 모른다. 이 글이 언젠가 나의 발목을 잡을지. 나 역시 어느 날 아이의 교육을 핑계 삼아 저 멀리 아파트 마을의 별 하나가 되어버릴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지금은 이 마을에서 내 몫을 한다. 평야를 보고, 사람을 만나고, 밥을 짓고, 이야기를 만든다. 오늘도 밥값을 한다.

필자 최 별: 로컬 기획자
2012년부터 방송계에 몸담아 왔으며, 2016년 MBC에 입사해 2024년까지 재직, 그중 5년 동안 전북 김제에서 <오느른>이라는 콘텐츠를 제작하며 한국PD대상을 받았다. 현재는 퇴사 후 브랜드 <오늘의 평야>, 유튜브 채널 <밥값하는 중>을 제작하며 로컬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방송국을 꿈꾸며 작은 마을의 긴 이야기를 기록하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