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큐멘터리 <동굴, 더 비지터>를 제작하며
글 김효진

농부의 흙이 건넨 첫 질문
새내기 PD 시절, 〈6시 내 고향〉을 연출하며 만난 농부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이 동네는 흙이 좋아.” 땅이 좋아 과육이 달고 향이 깊다는 그 투박한 자랑 속에는, 땅 위의 결실을 가능케 한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때는 농부의 자부심이라 생각했던 그 말이, 동굴을 촬영하게 되면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생명과 환경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 세계, 아주 오랜 지질의 시간 위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가 쓴 미래 예언서, 동굴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다. 오래전 바다에서 살던 생물들의 흔적과 암석이 풍화되며 쌓인 퇴적물, 그리고 비와 바람이 반복해 다듬어 온 이야기다. 동굴은 바로 그 시간의 단면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장소다. 스며들고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가 석회질을 남기고, 그 흔적이 수천 년 동안 쌓이면 종유석과 석순이 된다. 나무의 나이테가 시간을 기록하듯, 석순의 단면에는 과거의 기후가 층층이 새겨진다. 과학자들은 그 미세한 층을 분석해 수만 년 전 지구의 기온과 강수량을 읽어낸다. 기상 이변이 잦고 농업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지금, 동굴 속 기록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미래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예언서가 된다. 어둠 속에 쌓인 시간이 결국 지상의 삶, 땅을 일구는 사람들의 미래와도 연결된다.

동굴의 숨 쉬는 아카이브
전국의 동굴을 찾아다니는 촬영은 도전이었다. 2km가 넘는 화산석 구간을 지나야 만날 수 있는 제주 용천동굴, 목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지하수를 건너야 하는 단양 온달동굴, 산꼭대기에 숨어 있는 강릉 옥계굴까지 접근 방식도 환경도 모두 달랐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동굴에서 느낀 공통점은 ‘숨을 쉰다’는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외부와 기압 차에 따라 느린 바람을 내뱉고 들이마시며 쉴 새 없이 숨을 쉰다. 그리고 그 숨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생’을 만나게 된다. 텅 빈 것 같았던 동굴 안에는 이미 작은 생태계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빛과 소리가 통제된 극한의 환경에서 거미와 노래기, 동굴새우 같은 생명들이 박쥐의 배설물인 ‘구아노’를 중심으로 생태계를 이루는 모습을 보며, 동굴이 밖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어둠 속의 다크나이트, 박쥐
그 연결의 정점에는 동굴의 방문자이자 지상의 수호자인 박쥐가 있다. 미국 앨라배마의 소타 동굴에서 수만 마리의 박쥐가 검은 물결처럼 쏟아져 나오던 장면은 보이지 않는 생명의 순환을 목도한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불과 몇 해 전 곰팡이 질병(흰코증후군)으로 박쥐가 급감하자 해충이 범람해 농촌이 초토화되었던 북미의 사례는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린다. 현장을 누비며 모자 위가 박쥐 똥으로 뒤덮였던 그날의 기억은 고약한 오물이 아니라, 자연의 자정 능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준 영광스러운 훈장으로 남았다. 동굴 생태계를 지키는 일은 곧 우리가 일구는 들판을 지키는 일과 다르지 않다.

연출을 내려놓고 얻은 이름, 방문자
동굴은 제작자에게 거대한 벽과 같다. 빛과 소리가 완벽히 차단된 그곳에선 제작 노하우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인간의 부주의였다. 수만 년의 시간이 빚은 연약한 생성물은 몸짓 한 번에 부서질 수 있고, 무심코 남긴 발자국 하나가 영원히 박제되어 동굴을 오염시킨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했던 연출자의 오만을 내려놓았다. ‘좋은 그림’을 위해 조명을 밝히기보다 야행성 생명체의 안녕을 위해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법을 배우며, 다큐멘터리 제목을 〈동굴, 더 비지터〉로 지었다. 우리는 수만 년 전부터 동굴을 찾아온 인류의 후손이지만, 그 시간은 동굴의 지질학적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방문에 불과하다. 정복자가 아닌 예의를 갖춘 ‘방문자’의 태도로 임했을 때야 비로소 대지는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우리에게 허락했다.
영원회귀의 시간 속에서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시간을 직선이 아니라 반복되는 순환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를 ‘영원회귀’라고 불렀다. 동굴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물은 암석을 녹여 길을 만들고, 그 빈 공간은 다시 광물로 채워진다. 그리고 또 다른 물길이 그 형상을 천천히 침식시킨다. 이 숭고한 반복 속에서 동굴의 풍경은 끊임없이 변주된다. 인류는 이 거대한 순환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일 뿐이다. 농촌의 흙을 일구는 마음이 그러하듯, 동굴의 어둠을 대하는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오래된 시간을 이해하려는 겸허한 태도.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도 여전히 이어질 긴 시간을 위해 조금 더 조심스럽게 대지를 대하는 것, 그것이 자연 앞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사진 제공: KBS 다큐멘터리 <동굴, 더 비지터> 스틸컷(©KBS)
필자 김효진: KBS 청주총국 프로듀서
주로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고 있다. 특히 생태와 환경, 지역사회의 실존적 문제에 주목해 왔다. 대표작으로는 학대 사자 구출기 〈안녕, 바람〉, 생태교란종 문제를 다룬 〈거북이의 집은 어디인가〉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지역의 소외된 현실을 기록한 〈충북인의 고독사〉 쓰레기처리의 불평등을 밝힌 〈쓰레기 블루스〉 등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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