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이초원
이어짓기는 ‘다채롭게 즐기는 농(農)’을 주제로 여러 필자가 각자의 경험과 시선으로 글을 이어 쓰는 코너입니다. 이번 호는 이초원 씨가 ‘발효, 누룩, 기다림의 시간’을 주제로 농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

서울쥐가 일본 시골쥐가 되기까지
살아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하면서 산다. 이대로 취직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 일자리를 제안받아 망설이다, 딱 1년만, 내 마음대로 해보는 한 해를 살아보면 안되겠냐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렇게 졸업여행 겸 떠난 일본 홋카이도에서 작은 식당과 만나게 되었고, 돈을 안 받아도 되니 여기서 일만 좀 배우게 해달라 사정했다.
그렇게 일본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내 가게도 냈다. 운 좋게 장사는 잘 됐지만, 그럴수록 나의 부족한 실력이 부끄러워졌다. 더 배울 작정으로 가게를 정리하고 몇 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거늘, 그 사이 식당에도 변화가 있었는지 삿포로의 가게는 머지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그때 알고 지내던 지인, 훗날 나의 남편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인물이 ‘바쁘지 않으면 농사를 도와주러 오지 않겠냐’며 연락을 해왔다. 고속버스로 4시간 30분 거리. 나는 그렇게 ‘몬베츠’라는 난생처음 듣는 곳의 땅을 밟게 되었다.
그는 50년이 훌쩍 넘은, 다 쓰러져가는 집을 제 나름대로 고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였을까. 이 땅에 들어선 순간, 이 집을 본 순간 희망을 느꼈다. 발갛게 익어가는 토마토가 사랑스러웠고, 보송보송 솜털이 달린 콩이 커가는 것이 기특했다. 북한보다 위쪽에 위치한 홋카이도의 여름은 새벽 3시면 밝아지기 시작하는데, 동이 튼 새벽부터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까지 뭐가 그리 즐겁다고 밭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일본에서 배운 요리들을 한국에서 똑같이 해봐도 그 맛이 나지 않았는데, 땅에서 나는 채소들의 맛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재료의 맛이 이렇게 다른 걸까?’ 하는 질문은 더욱 농사에 빠져들게 했다. 그렇게 주말마다 삿포로와 몬베츠, 왕복 9시간을 오가며 집을 고치고, 밭일을 하고, 과자며 빵을 구워 먹었다.
오직 여섯 가구만 살고 있던 작은 마을에 웬 젊은 여자가 들락거리기 시작하니, 마을 사람들은 내가 올 때면 조용히 현관 앞에 반찬이며 그날 딴 채소를 놓고 가셨다. 다 먹은 반찬통에 구운 과자를 채워 감사를 주고받았고, 밤이면 험한 농작업으로 찢어진 그의 바지를 깁거나 집을 고쳤다. 아직 쓸만한 것들에 계속해서 생명을 불어넣고, 공생하는 삶이 좋았다. 어쩌면 거기서 ‘대단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몇 달 오가는 동안 그와 무수히 많은 대화를 나눴다. 열두 살의 나이 차이, 다른 국적. 다른 것이 더 많을 법도 한데 그 누구보다도 대화가 잘 통했고, 삶의 지향점이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 어느 쪽도 사귀자는 말 없이, 자연스레 만나는 사이가 되더니, 거창한 프러포즈 없이 조용히 혼인신고를 올렸다.
결혼식도, 결혼반지도 필요 없었다. 선하고 무엇이든 뚝딱 잘 고치는 남편과, 미싱과 오븐을 쓸 줄 아는 나는 그렇게 공방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결혼 사진 삼아 이곳에 발붙이게 되었다.

농사, 그리고 발효와 만나다
남편은 약 10년 전, 인간관계에 지쳐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자신의 길을 찾다 한 양조장에서 일을 도우며 미소와 간장, 누룩 띄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언젠가 직접 농사를 지으며 미소 공방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마침 지역의 새로운 특산품을 만들고 싶었던 몬베츠시와 남편의 뜻이 맞아, 연고 없던 이 땅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함께 농사를 짓고 부부의 연을 맺으며 우리의 미소 공방도 시작되었지만,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처음엔 시에서 빌려준 폐쇄된 어린이집의 작은 주방을 공방으로 삼았다. 하지만 발효실이 필요한 누룩의 특성상 그 공간은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시내까지 10km는 나가야 하는 산골짜기에 살다 보니 어딜 가나 거리가 멀었고, 와중에 집의 지붕에서는 빗물이 새기 일쑤였다. 집 고치랴, 농사 지으랴, 공방의 체계도 만들어가랴 모든 것이 시행착오였던 그때, 손 내밀어준 것은 다름 아닌 옆집 어르신이었다.
집에서 걸어서 2분이면 가는 거리에, 사람의 손을 떠난 지 10년이 넘은 축사가 있었다. 어르신이 낙농업을 그만두며 창고로만 쓰던 곳이었는데, 우유를 가공하던 주방은 아직 수도와 전기시설이 남아 있으니, 고쳐서 쓸 수 있으면 한번 해보라며 등을 밀어주었다. 돈은 없지만 전기며 목공 기술은 있는 우리에게 아주 걸맞은 기회였다. 보일러실이었던 곳을 발효실로 만들고, 이곳에서 2톤이 넘는 미소를 만들며 공방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연고 하나 없는 일본 시골에서 땅을 일구다
미소에 들어가는 콩은 토종으로 모두 직접 키우고 있다. 우리가 사는 몬베츠시의 작은 마을 우츠츠는 일본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가장 북쪽의 경계에 있다. 5월까지도 눈발이 날리고, 10월 말이면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경작을 할 수 있는 시기가 고작 5개월 남짓이다. 더불어 이곳은 95% 이상이 낙농업 지대라, 농사의 조언을 구할 사람도 많지 않았다.
남편도 인연이 닿아 몬베츠라는 곳을 알게 되었을 뿐, 처음부터 이 추운 곳에서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마다 더워지는 기후는 역으로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매년 더 나은 콩과 밀을 수확하고 있다.
남편이 생각하는 ‘농의 원점’이란, 화학비료에 기대지 않는 농업이다. 화학비료를 쓰면 크고 모양새가 좋은 작물이 나지만 동시에 땅이 척박해진다. 작물이 땅의 영양으로 크는 것이 아니라, 화학비료에 기대게 된다. 그 땅은 지력이 떨어져 이듬해 또 화학비료를 넣지 않으면 작물이 온전히 자라지 못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화학비료도 농약도 값이 나간다. 여유가 많지 않은 우리는 더욱이 화학농업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농업에 특정한 이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농사를 짓는다. 농사의 이치란 사람을 키우는 것과 닮아 있다. 유아기엔 밥 먹이랴, 기저귀 갈아주랴, 부모가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청소년이 되면 부모의 역할이 점차 줄어드는 것처럼, 농사도 마찬가지다. 파종 후 자연에 모든 것을 맡기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생육 초기에는 주변의 잡초를 뽑아주고, 새나 동물에게 먹히지 않게 관리해야 작물이 자란다. 작물이 어느 정도 크면 스스로의 힘이 생긴다. 그 때부터 우리는 한 발 뒤로 물러난다. 바로 그 힘이 생길 때까지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종자는 신기하게 그 땅의 기후를 기억한다. 처음엔 수확량이 많지 않았던 콩들도, 매해 살아남은 종자를 다시 심다 보면 그곳의 기후에 적응한 것들만 점차 남아 강해진다. 생육이 아슬아슬할 정도로 추운 날들도 있지만, 오히려 극명한 기온차는 콩을 더 진하고 달게 만들어 준다. 그뿐이랴, 강수량이 그리 많지 않으니 물을 더 빨아들이기 위해 열심히 뿌리를 뻗는다. 살아 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노력이 줄기를 두껍고 강하게 만든다. 만약 이 종자를 들고 한국에 심는다 한들 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기후가 달라지면 종자는 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 이 콩이 아니면 우리 미소의 맛이 나지 않는다.

발효와 제철의 리듬을 삶에 들인다는 것
입에 단 것은 누구나 좋아한다. 그러나 살이 찔까, 건강에 해로울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먹거리이기도 하다. 한때 잘못된 다이어트로 폭식증에 몇 년을 고생했던 적이 있다. 먹지 않고 운동을 하며 단기간에 살을 뺀 것이 원인이었다. 목표하던 체중을 달성했음에도 살이 찔까 두려운 마음과 보상 심리가 엉켜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를 마구 쑤셔 넣고는 뱉거나 토하기를 반복했다. 그때가 먹는 것이 마음 상태와 연결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몸은 물론, 마음까지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고 싶어진 계기였다. 그런 먹거리를 찾아 식물성 디저트를 만드는 일을 해보니, 이번에는 설탕과 기름을 생각보다 많이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라리 달걀 한 알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정도로 많은 양의 기름과 설탕을 넣은 것들을 구우면서, 나는 다시 이 길이 맞는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남편이 누룩 띄우는 일을 하니 자연히 쌀누룩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처음엔 ‘이걸 디저트에 쓰면 설탕을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연구를 하다 보니 웬걸, 신기하게도 누룩 발효액을 식물성 베이킹에 활용하면 달걀처럼 폭신한 질감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직업 특성상 디저트를 많이 만들고 먹어봐야 하는데, 예전과 달리 헛배가 부르지 않고, 속이 불편한 일이 없었다.
쌀누룩은 설탕처럼 중독성이 강하지 않은 데다 풍미도 있다. 그러면서도 충분한 만족감이 있다. 쌀누룩을 활용한 발효 디저트는 일본에서조차 연구 자료가 아직 많지는 않지만, 지금은 이 분야에 푹 빠져 시제작과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발효는 미련한 기다림 같아 보일지 몰라도, 사실 영리하고 지혜로운 방법이다. 누룩으로 잼을 만들면 대량의 설탕을 넣을 일도 없고, 뜨거운 불 앞에 서서 눌어붙을까 계속 저어주지 않아도 된다. 그저, 누룩과 원하는 과일을 섞어 발효기에 넣고, 효소가 일할 수 있는 온도를 맞춘 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동안 나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거나 밭에서 일을 할 수 있다.
쌀을 누룩으로 만드는 데는 꼬박 3일이 걸리고, 이를 디저트에 쓰기 위해선 찹쌀밥과 물을 섞어 최소 8시간을 더 발효시켜야 한다. 설탕을 쓰면 30초도 걸리지 않을 걸 3일하고도 8시간이나 준비해야 겨우 같은 출발선상에 선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이 있게, 쌀누룩은 충분한 단맛을 내줄 뿐 아니라, 영양도 풍부하다. 그저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 실제로 해야 하는 것은 가끔가다 저어주는 일 말곤 없다.

기다림은 미련함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제철’이란 본래 알맞은 시기, 과일·채소가 한창 맛이 들었을 때를 뜻하는데, 요즘은 사시사철이 제철인 세상이 되었다. 언제든 원하는 재료를 대부분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제철 채소를 찾고, 철이 되면 김장을 하고, 매실청을 담근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진정 찾고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시기뿐인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 아닐까?
향긋한 매실로 우메보시며 천연발효종을 만들다 보면 온 주방이 산뜻한 매실향으로 가득해진다. 매실청을 사다 먹으면 느낄 수 없는 행복이다. 시린 입김이 피어오르는 겨울이 되면 새벽같이 공방에 가 미소 담글 준비를 한다. 그해 수확한 콩을 폭폭 찌고 잘 익었나 먹어보면 밤처럼 달콤한 콩의 맛에 웃음이 지어진다. 발효를 생활에 들이면 삶의 모습이 바뀐다. 그게 발효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라 부르고 싶은 까닭이다. 10년은 고사하고 1년 만에 강산이 변하는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도 발효를 마음에 품고 살면 조금 더 계절을 즐겁게 기다리며 살게 된다.
그러니 많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몸과 마음이 안녕한, 발효가 깃든 삶을.
필자 이초원: 발효 디저트 연구가
‘우시오’라는 활동명을 쓴다. 바다 얼음이 떠내려오는 홋카이도 오호츠크해의 작은 산골짜기에서 남편과 농사 지으며 발효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 비건카페와 수업을 운영했던 경험으로, 현재는 누룩디저트를 개발해 전세계를 대상으로 온라인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