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사진 황금비
수목원의 여름은 오감이 열리는 계절이다. 가지 끝 이파리들은 더욱 짙은 초록빛으로 물들고, 장맛비로 축축해진 화단에서는 유기물이 부패하는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귀가 찢어질 듯한 매미의 울음소리는 더운 바람을 뚫고,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짙은 해무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면 당장이라도 헤엄을 칠 수 있을 것처럼 습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충남 태안의 서쪽 끝에 자리한 천리포수목원은 1970년 문을 열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사립 수목원이기도 하다. 이곳은 같은 위도상에 있는 내륙 지역보다 온화한 기후를 띤다. 여기서 ‘온화하다’라는 건 겨울이 비교적 따뜻하고, 여름은 비교적 시원하며, 일교차가 크지 않다는 뜻이다. 소금기가 가득한 바닷바람과 척박한 토질로 인해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 해안가 땅이 56년이 지난 지금 1만 7천여 분류군 식물들의 보금자리가 된 데에는, 바다가 만들어준 해양성 기후가 가장 큰 몫을 했다. 덕분에 수목원에서는 가을에 잎을 떨구는 낙엽수뿐만 아니라 먼나무, 후박나무, 돈나무 등 중위도 내륙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다채로운 상록수가 겨울을 난다.


다양한 식물종을 보전하며 지구 생태계를 지키는 수목원은 기후위기를 온몸으로 실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 5월, 이른 새벽부터 가드너들과 방제업체 직원들이 수목원 입구로 삼삼오오 모였다. 솔바람길부터 시작해 후문까지 이어지는 곰솔 위로 소나무재선충 확산을 막기 위한 방제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정확하게는 약제를 뿌리는 드론을 띄워 소나무재선충의 매개충인 솔수염하늘소, 북방수염하늘소를 방제하는 작업이다. 지역 전체 산림의 70%가 소나무로 이루어져 있고, 크고 품질 좋은 소나무인 안면송 군락지를 보유한 태안군은 현재 소나무재선충 피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태안읍에서 수목원으로 넘어오는 길가마다 솔잎이 붉게 말라 죽은 피해목을 맨눈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소나무재선충의 확산 속도는 기후위기와 관련이 깊다. 이상기후로 온도가 상승하면 소나무의 수세가 약해지고, 병을 옮기는 매개충의 활동 기간이 길어진다. 정원사들은 “나무를 지켜주고 주인 노릇은 하지 말라”고 했던 민병갈 설립자의 유언대로 나무에 약제 살포는커녕 가지치기조차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태안의 소나무재선충의 확산세가 너무 빨라지자, 설립 후 처음으로 소나무재선충 매개충 방제를 시작했다. 습하고 무더운 여름이 되면 소나무재선충 외에도 미국선녀벌레, 미국흰불나방처럼 식물의 잎과 줄기를 흡즙하는 외래 해충 피해가 극심해지기도 한다. 피해 가지를 잘라주거나 피해가 심한 구역엔 국소적으로 약제를 치기도 하지만, 무더운 습기를 타고 화단에 번지는 외래 해충을 완벽하게 방제하기란 쉽지 않다.

서늘한 기온을 자랑하는 바닷가임에도 최근에는 한여름이 되면 폭염 기준을 넘는 일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수목원의 식생 자체도 아열대성 기후에 적응할 수 있는 식물로 조금씩 바뀔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기후위기가 초래하는 여러 문제 가운데에서도 수목원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생물다양성의 손실이다. 생물종의 멸종 위험도를 평가하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적색 목록(Red List)을 보면, 현재까지 평가한 172,600종 생물 가운데 28%에 달하는 48,600종 이상이 멸종 위기에 직면한 것으로 나타났다.
길어진 장마, 산책로가 패일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무더위와 열대야… 기후변화를 체감하면서 생물다양성을 보전하는 수목원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쉽지 않은 환경에서도 여름이 되면 약속한 듯 꽃을 피워내는 여름 식물을 보면 기특한 마음마저 든다. 이 시기 피는 꽃은 계절을 닮았다. 6월 초부터 화려한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노루오줌 군락을 보면 비로소 여름의 초입에 들어왔음을 실감한다. 수목원 곳곳에서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꽃을 피워내는 아이리스, 막대사탕처럼 길쭉한 꽃대 끝에 꽃을 피우는 니포피아는 마치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이겨내려는 듯 더욱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수목원의 주요 5속 식물 중 하나이자 우리나라의 상징인 무궁화도 여름에 꽃을 피우는데,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실감이 날 정도로 한 그루 안에서 쉴 새 없이 꽃을 피우고 떨군다. 정원사들의 꼼꼼한 손길이 닿은 10년생 무궁화 한 그루는 여름철 2천 송이에 달하는 꽃을 피운다. 우리나라의 토종 무궁화인 ‘황근’도 여름철 수목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노란 꽃잎과 붉은 단심을 자랑하는 황근은 과거 환경부가 지정하는 멸종위기 야생식물이었다가 복원 사업을 통해 개체군이 회복되었고, 2023년 멸종위기 야생식물 리스트에서 해제된 고마운 식물이다.
올여름에는 주변의 공원이나 수목원에서 반가운 여름 식물을 찾아보면 어떨까? 밖에 나가기 두려워지기도 하지만, 계절의 한가운데에서 피고 자라는 식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름을 지내고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더위 속 작은 위안과 생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 황금비: 천리포수목원 나무의사
일간지 <한겨레> 기자로, 콘텐츠 기업 홍보팀 직원으로 일했다.
말 없는 나무가 좋아 나무의사 공부를 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숲으로 출근합니다》(한겨레출판, 2026)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