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글·사진 양창모

심한 손 떨림으로 인슐린 주사를 잘못 놓아 주사 끝의 바늘이 휘어있다.

떨리는 손, 혼자 할 수 없는 일
  최 할머니는 이제 다시는 직선을 그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간단한 일, 예를 들면 은행 업무도 볼 수 없다. 심한 파킨슨병으로 손이 떨려 서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문진료를 나가 마주한 할머니의 손은 메트로놈의 추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아니, 이 손으로 어떻게 인슐린 주사를 놓으세요?” “벌벌 떨면서 하는 거지. 어떡해.” 한 달 전 고혈당 혼수로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던 할머니는 2주 전 퇴원하면서 하루 4회 인슐린 주사 처방을 받아왔다. 마침 점심 식전이라 주사를 놓도록 하고 옆에서 지켜보았다. 참담했다.
  인슐린 주사를 맞기 위해서는, 바늘을 ‘정확히’ 인슐린 몸체에 끼워 넣고 복부 피부를 바늘로 ‘정확히’ 직각으로 찌른 후, 주사액이 다 들어가도록 주입 버튼을 끝까지 누를 수 있어야 한다. ‘정확히’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파킨슨병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대충 해도 충분히 해냈을 과정이다. 하지만 떨리는 손은 아무리 정확히 하려 해도 정확할 수가 없다. 주삿바늘은 잘못 끼워 휘어져 있었고 주사가 피부에 들어가기도 전에 주사액이 흘러나와 뚝뚝 떨어졌으며 주사액을 다 넣지 못해 맞고 난 후에도 인슐린이 남아 있었다. 혈당을 재보니 500이 넘는다. 인슐린을 제대로 못 맞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인슐린을 맞는 사람은 하루 4회 이상 혈당 측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도 ‘정확히’가 필요하다. 검사지를 정확히 혈당측정기 몸체에 집어넣어야 하고 검사지 위에 정확히 피 한 방울을 떨어트려야 한다. 할머니는 아예 혈당 측정을 포기했다.

가족이 없는 돌봄의 자리
  할머니를 퇴원시킨 대학병원 의사는 할머니가 집에서 인슐린을 제대로 맞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그가 상상한 ‘정상 가족’은 할머니를 돌보는 자녀가 함께 생활하면서 도와주는 거였을까. 하지만 할머니의 정상 가족은 할머니 혼자다. 도와줄 수 있는 가족이 옆에 없다. 지금은 가족이 더는 식구가 아닌 시대다. 식구란 먹을 식, 입 구를 써서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이다. 여든이 넘는 아픈 부모와 매일 식사를 같이하는 자식이 얼마나 될까. 아픈 부모 집에서 식단을 차려주고 화장실 갈 때 따라가며 돌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제는 돌봄 서비스 종사자가 우리 부모의 식구가 된 시대다.
  다행히 할머니에게는 두 명의 돌봄 종사자가 와 있었다. 한 분은, 퇴원 후 한 달 동안 가사 지원을 하는 생활지원사였다. 시내에서 파견 온 그는, 정작 돌봄의 핵심인 건강 문제(당뇨 관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보였다. 할머니가 인슐린 주사를 맞을 때 확인해야 할 것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어차피 2주 후면 서비스가 끝나서 여기에 올 일이 없는데’라는 표정이었다. 다른 한 분은 소양강댐복지관에서 파견한 ‘이웃복지사’였다. 말 그대로 최 할머니와 한동네에 사는 이웃분이다. 소양강댐복지관은 내가 일하는 방문진료센터와 댐수몰지역 지원사업을 함께 해나가고 연계도 되어있다. 이분도 할머니 집에 파견되기 전 우리 센터가 진행한 강의와 실습에 참여한 덕분에 혈압, 혈당 측정을 능숙하게 해냈다. 인슐린 맞을 때 확인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잘 알겠다고 확답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웃복지사 활동은 주로 오전 시간으로만 한정되어 있었다. 파견된 이웃복지사도 오후에 다른 일을 해서 저녁 인슐린 맞을 때는 와 볼 수 없다고 했다. 난감했다. 시청의 통합돌봄과에 연락을 했다. 할머니 사정을 설명하고 오후 시간에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기나긴 대화를 했지만 결국 방법이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건 당연히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진료실 안의 나’를 떠올렸다.

할머니가 측정한 혈당 수치는 측정을 잘못해서 88이라는 오류화면이 나왔지만(왼쪽), 최 간호사님이 측정한 수치는 518이라는 높은 수치가 나왔다.

의사는 경로를 말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만 보여줄 뿐 경로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어떨까? 당장 수리를 맡기든가 아니면 갖다 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할만 하는 데도 버림받지 않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있다. 바로 ‘진료실 안의 나’다. 진료실 의사인 나의 몫은 목적지만 보여주면 되었다. 내가 환자에게 하는 말 대부분은 ‘해야 한다’로 끝났다. 살을 빼야 한다, 싱겁게 먹어야 한다, 운동해야 한다 등. 나의 몫은 ‘해야 한다’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떻게’는 환자의 몫일 뿐 의사인 나의 몫은 아니었다. 목적지만 보여주는 내비게이션. 그것이 내가 진료실에서 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방문진료를 가보면 거기에 멈출 수 없다. 환자가 어떤 곳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기 때문이다. 목적지로 가는 경로가 막혀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노인이 너무 많다. 어떻게든 인슐린 주사를 맞으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주삿바늘을 끼우는 할머니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라는 말을 하고 돌아설 수 있는 의사는 없다. 어떻게든 주사를 맞게 하고, 혈당 모니터링을 할 수 있게 하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방문진료 의사란 결국 ‘해야 한다’를 말하는 의사가 아니라 ‘어떻게’를 고민하는 의사다. 방문진료는 목적지로 가는 경로를 보여주는 내비게이션이 되어야 하고, 때로는 그 길에 동행하기 위해 의사 본연의 길에서 경로 이탈을 하기도 한다.

의사의 ‘역할 문턱’을 넘다
  돌이켜보면 환자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일은 약 처방과 주사, 검사로 한정되지 않는다. ‘의사의 역할’과 ‘환자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일’은 당연히 같은 말이어야 한다. 하지만 진료실에 갇힌 의사는 이 둘을 쉽게 다르게 느낀다. 최근 몇 달 동안 방문진료 의사로서 내가 한 일, 그러니까 화장실 전구를 바꾸고, 전등을 켤 수 있도록 줄을 매달고, 금이 쩍쩍 가 있는 집의 보수를 의뢰하는 일과 환자의 건강을 지키는 일은 과연 다른가. 장작 때우는 집에 일산화탄소 경보기를 설치하는 일은 과연 환자의 폐 건강을 지키는 것과 다른 일인가. 그것은 왜 의사의 역할이 아닌가.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의사들은 왜 그것을 의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는가. 물론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 일은 의사가 아닌 사람도 할 수 있다고. 맞는 말이다. 예를 들면 권 할머니의 집 안에서 화장실로 가는 통로가 껌껌할 때 그 조명을 밝혀주는 일은 분명 의료진이 아니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그럼 그걸 누가 하고 있는가. 아무도 없다. 혼자 사는 권 할머니는 허리가 굽어 더는 펼 수가 없다. 그러니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백열등의 전구를 바꿀 수가 없다. 권 할머니 집에서 그 ‘아무나’는 누가 되어야 하나. 방문의료진인 우리가 마주하는 질문은 그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의료진인 우리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돌아와야 할까.
  진료실 안에서는 고민할 필요 없던 일들이 진료실 밖에서는 절실해진다. 한 사람의 건강을 지키는 데 필요한 의료진의 역할은 진료실 안에서는 단순하다(물론 그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진료실을 벗어나는 순간 삶의 맥락 속에 놓인 건강이 자신의 민낯을 드러낸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도 ‘나는 의사다’라는 생각에 충실하면 제대로 된 진료를 할 수 없다. 남의 집 문턱을 아무리 넘나들어도 ‘의사란 원래 이런 것’이라는 의사 역할을 고집하는 한, 자신의 역할 문턱은 넘지 못하는 의사로 머물게 된다. 제대로 된 방문진료 의사가 된다는 것은 의사 역할을 잘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할머니 팔의 연속혈당측정기. 한 번 부착하면 10일 동안 5분 간격으로 혈당이 자동 측정되어 그 수치를 휴대폰으로 볼 수 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두 사람
  최 할머니는 결국 연속혈당측정기를 구해서 달아드렸다. 부착한 다음 날 저녁, 인슐린을 제대로 맞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 찾아간 할머니 집에서 뜻밖에도 이웃복지사를 만났다. 그는, 일하는 시간을 조정했다며 매일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와보겠다며 웃었다. 그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본 것이다. 할머니의 휴대폰 전원이 꺼져 다시 측정기와 연결해야 할 때마다 부랴부랴 할머니 집에 가서 연결해 준 것도 그였다. 정작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던 행정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을 때, 할머니의 복지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이웃이 자신 생업의 시간을 조율하면서까지 할머니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을 보며 이웃이란 말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덕분에 매일 혈당 수치를 모니터링하면서 나와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통화를 했고, 적절한 인슐린 용량을 결정할 수 있었다. 10일 후 혈당 모니터링이 끝날 즈음에는 그나마 전보다 혈당 변동이 줄어들어 있었다.
  지금 통합돌봄을 위해서 가장 시급히 만나야 함에도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방문의료진과 돌봄 종사자이다. 최 할머니의 혈당이 500 이상 치솟은 점심 무렵에 할머니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김치 한 종지를 옆에 두고 설탕물에 국수를 말아 드시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의 식단을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은 요양보호사뿐이다. 요양보호사의 새로운 식단 없이는 어떤 명의가 와도 할머니의 혈당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의료진이 아직도 요양보호사의 연락처를 모른다.
  고혈압 환자와 저혈압 환자의 식단이 같을 수 없고, 당뇨 환자와 통풍 환자의 식단이 같아서도 안 된다. 그런데도 요양보호사의 서비스는 자신이 돌보는 환자에 맞추어 개별화되어 있지 않다. 자신이 돌보는 환자에 대해 상세한 의료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정보의 결핍은 결국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효능감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의료진과 돌봄 종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함에도 만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다.

통합돌봄, 행정이 해야 할 일은
  “요양보호사가 새로 왔으니까 제가 내일 가서 그분께 인슐린 주사 놓는 거 설명해 드릴게요.” “왜? 내가 남의 배에라도 놓을까 봐. 하하. 걱정 마.” 할머니의 농담 속에 묻어나는 자신감에 왠지 나도 흐뭇하다. 지난 몇 개월간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급속히 떨어지는 혈당 때문에 밤 11시에 자는 할머니를 깨워 지금 바로 우유 한 컵 드시라고 전화한 것도 몇 번 되었다. 뒤돌아보면 그 길은, 마치 할머니의 떨리는 손처럼 우왕좌왕이었다. 너울성 파도처럼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했던 그 길이 이제는 견딜만한 파도가 되었다.
  할머니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손 떨림은 여전하지만, 그 손을 함께 붙잡고 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방문진료 가서 가장 많이 한 일은 도움을 청하는 일이었다. 가족에게, 보건지소에, 돌봄 종사자에게 기대었다. 정말 답이 없다고 느낄 때면 발에 채는 돌멩이에도 기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수없이 기대는 과정의 끝에서 ‘우리’를 만날 수 있었다. 소양강댐복지관도, 이웃복지사도 만났다.
  돌봄이란 셀프 서비스가 아니다.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아픈 노인, 의료진, 돌봄 종사자는 모두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를 통해 해내는 경험이 내겐 돌봄이었다. 그러니 통합돌봄을 구축하는 행정의 역할은, 결코 우리를 대신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가장 잘 찾아갈 수 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함께, 잘 견뎌내자고
  가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일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아픈 노인과 장애인의 처지를 매일 새로 경험하는 일이 버겁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몸 안에서 사리가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진료실이 그립다. 4평 남짓한 그 공간은 섬이었다. 세상과도 칸막이가 쳐져 있고 환자의 삶과도 철저히 분리된 그 섬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나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아픈 노인의 집으로 찾아오는 요양보호사가, 생활지원사가, 이웃복지사가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들의 가족이 나와 똑같은 감정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갈 것이다.
  시골집에서 노인을 만날 때 그들의 노년을 보면서 나의 노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그들의 현재에 화가 났고 그럴수록 나의 미래가 두려웠다. 다들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집이 사람을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집을 지키고 있는 것만 같은 홀몸 노인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온 날은 특히 그랬다. 하지만 노인과 만남이 거듭되고 그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분들의 강인함과 애틋함에 존경심이 조금씩 차올랐다. ‘아, 저렇게 살아 내시는구나. 그렇다면 나도.’라는 마음이 들면서 내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 안개처럼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희망을 말하고 싶지만 아마도 그리 말한다면 그건 거짓일 것이다. 희망을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함께 잘 견디어내자고 말하고 싶다. 그 누구보다도 시골의 아픈 노인들이 그러하듯이.

필자 양창모: 가정의학과 의사, 춘천 호호방문진료센터장
10년 넘게 해왔던 진료실 진료를 접고 7년 전부터 수몰 농촌지역의 방문진료 의사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한겨레출판, 202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