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농촌에서 만난 익숙함, 연대의 힘

글·사진 백은선

앙탕시옹 농장의 청년 농부 알방 레베이에 씨(왼쪽)와 그의 초기 농업 실습 농장주이자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피에르 씨(오른쪽). ⓒ대산농촌재단

  2026년 4월, ‘미래가 있는 농촌, 지속 가능한 농업’을 주제로 유럽 4개국을 돌아보는 대산농업연수에 참여했다. 농업을 전공하지 않은 터라 농업과 관련한 연수도 처음이었고, 낯선 언어로 가득한 방문지와 생소한 키워드 앞에서, ‘과연 이 배움들을 온전히 소화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품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프랑스의 농촌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친숙함을 만났다. 공간은 낯설었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언어와 방식이 그렇지 않았다. 협동, 공동 소유, 시민 출자, 사회적 가치,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늘 다루던 키워드들이 농촌이라는 공간에서 살아 숨 쉬며 작동하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익숙함을 발견하는 경험이었고, 동시에 한국에서도 시도해 볼 만한 실험의 가능성을 느꼈다.
  그리고 현장 곳곳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한 몇 가지 제도를 만날 수 있었다. 공동농업경영체 가엑(GAEC), 농지 공동 소유조합 GFA, 시민 연대로 농지를 매입해 농부에게 임대하는 테르 드 리앙(Terre de Liens, 연대의 땅), 농기계를 함께 구매해 나눠 쓰는 부분 협동조합 큐마(CUMA) 등이 있다. 이름도 구조도 다르지만, 이 제도들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여럿이 함께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취약함을 함께 나눔으로써 헤쳐 나가는 방식, 바로 ‘연대’였다.

앙탕시옹 농장에서는 15명이 함께 생활하며 매주 공동회의와 식사를 통해 공동체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빚 없는 농촌 정착, 앙탕시옹 농장
  프랑스에서도 청년농이 농촌에 정착할 때 가장 큰 벽은 농지와 거주지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청년농업인은 결국 막대한 대출이라는 부채를 안고 영농을 시작하며, 평생 빚을 갚아나가는 고단한 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우리가 방문한 툴루즈 인근 ‘앙탕시옹 농장(La Ferme Intention)’은 시민 출자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고 있었다.
  공동생활·공동농업 공동체인 이 농장에는 현재 15명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 공동체 창립 멤버인 알방 레베이에(Alban Réveillé) 씨는 농부가 되기 전 IT 업계에서 일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18세 무렵부터 “나는 평생 내 집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안고 살았는데, 대학 5년, 직장 생활 2년 반을 거쳐 돈을 모았고, 1년간 농업 교육을 받은 뒤 실습을 거치며 지금의 땅을 구하게 되었다. 그의 방식을 지지하는 지인들과 시의원, 그리고 은행 계좌에서 잠자던 돈을 의미 있게 쓰고 싶었던 시민 주주 7명이 뜻을 모아 시작한 것이 어느덧 12년이 되었다.
  이 농장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시민 공동 출자(시민형 GFA)로 대안적 삶을 선택한 청년들에게 농지와 주택이라는 정착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과도한 대출 이자 대신 보유세 수준의 낮은 임대료만 내고 공간을 임대하는데, 농사방식은 ‘유기농업 실천’과 ‘유기인증 획득’이 의무이다. 시민 주주들은 농민들이 낸 임대료를 사적 이익으로 취하지 않고, 대안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회를 넓혀주기 위해 ‘지역의 땅’을 추가로 매입하여 공동 자산으로 묶어두는 데 사용한다. 초기 출자금으로 4ha의 농지 매입에서 시작된 이 실험은 현재 30여 명의 시민 주주와 45ha의 농지로 규모가 늘어났다. 이들은 땅을 공동 자산으로 유지하며 ‘한번 매입한 땅은 절대 다시 팔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시민 주주와 농민은 1인 1표의 평등한 권리로 연간 회의를 통해 땅의 이용 방향을 함께 결정한다.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전업 농민은 아니라는 점이다. 밀 재배, 제빵, 채소, 산란계를 맡는 영농 주체들 외에 용접사나 사회복지사 등 본업을 유지하는 이들이 어울려 공동생활을 꾸려간다. 이들이 추구하는 삶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해 보였다. 과잉 소비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것, 농한기에는 취약계층 주거환경 개선 등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에 나서는 것. 에너지 자립과 의식주 자급을 고민하며 농촌에서 건강한 자급자족을 몸소 실천하는 이들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세 명의 청년농업인이 공동 운영을 통해 가엑 라 리브 페이잔 농장을 이끌어 간다. 순서대로 조르디, 로랑, 피에르, 기욤 씨. 피에르 씨는 농장의 토지 확보를 도운 테르드 리앙의 관계자다.
가엑 라 리브 페이잔 농장의 시설 하우스. 3인의 청년농은 양사육과 양봉, 채소 재배, 곡물 가공 등 역할을 나누어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한다.
가엑 라 리브 페이잔 농장의 시설 하우스. 3인의 청년농은 양사육과 양봉, 채소 재배, 곡물 가공 등 역할을 나누어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한다.

연대가 만드는 안정과 여유, 가엑 라 리브 페이잔
  세 명의 청년농이 가엑(GAEC)을 구성해 운영하는 ‘가엑 라 리브 페이잔(GAEC La Rive Paysanne)’ 농장의 토지는 프랑스의 시민 참여형 농지 보전 운동인 ‘테르 드 리앙’을 통해 마련되었다. 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농지를 사고, 그 땅을 유기농 농부에게 장기 임대하여 건강한 먹거리와 농촌 환경을 지키는 운동이다. 땅이 투기의 대상이 되면 청년농에게 정착의 기회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어서, 이들이 매입한 땅은 사유화되지 않고 영구히 공공의 자산으로 보존된다. 임대료는 프랑스 농업 임대 특별법에 따라 상한선과 하한선이 법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범위 안에서 생산 시설과 실제 생산량을 고려해 농가의 실정에 맞게 책정된다.
  이 농장의 시작에는 아름다운 결단이 있었다. 땅을 물려준 은퇴 농장주는 인근 대규모 낙농가가 제시한 높은 토지 매입 대금을 과감히 거절했다. 자신이 평생 일군 농지가 자본의 논리에 흡수되지 않고, 독립적인 소규모 친환경 농가로 이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결국 테르 드 리앙을 통한 토지 신탁과 친환경 농업 실천이라는 조건 아래, 세 청년에게 경작의 기회가 돌아갔다.
  세 청년이 공동농업경영체를 선택한 이유는 거창한 철학보다 현실적 판단 때문이었다고 했다. 초기 인프라 구축 비용을 나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재정 운영이 한결 안정되었다. 채소는 수익 회수가 빠르지만, 축산은 시간이 걸린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작물의 수익 창출 시기가 상호 보완 작용을 하며 거친 초기 정착기를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또 한 가지, 이들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질, 즉 ‘휴가가 있는 삶’을 공동 노동으로 확보했다. 초기 투자 자본은 서로 달랐지만 초과분을 상환하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췄고, 급여는 똑같이 받으며 ‘1인 1표’라는 원칙과 함께 동등한 발언권을 행사한다. 농장 안에서는 양의 분뇨가 발효되어 채소밭의 거름이 되고, 수확한 밀은 직접 제분해 빵을 굽는 생태적 순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자본의 대규모화에 저항한 은퇴농의 신념, 시민 연대로 지켜진 유기농 농지, 그리고 세 청년이 함께 쌓아온 시간. 이 세 가지가 맞물려 농촌 자립의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었다.

레소르 마레셰에서 약용작물을 재배하는 실험자의 공간.
레소르 마레셰에서 약용작물을 재배하는 실험자의 공간.

농업을 실험할 수 있는 땅, 레소르 마레셰
  프랑스 타른주 가이약에 위치한 ‘레소르 마레셰(L’Essor Maraîcher)’를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미지는, 찢어진 셔츠에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올려묶은 채 손수레를 끌고 가는 여성 청년 농부였다. 꾸밈없이 소탈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이었다.
  레소르 마레셰는 농업에 진입하려는 청년들이 최대 3년간 자신의 농업 계획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2012년 지자체, 농업회의소, 민간협회와 교육기관 등 4개 단체가 설립한 협회로, 토지·기계·온실 등 인프라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청년농의 재무 관리와 보조금 행정 지원까지 맡는다.
  레소르 마레셰는 농업 교육기관은 아니다. 참가자들은 각자 제출한 작물 경작 계획서에 따라 본인의 노동으로 농산물을 직접 생산하고, 이를 로컬푸드 매장 등에 판매하며 전업농으로서의 자립 가능성을 스스로 시험한다. 생산과 판매라는 농업의 전 과정이 지역 기반으로 촘촘하게 이루어지다 보니,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역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단골 고객도 생겨난다. 실험을 마친 농부들이 지역을 떠나지 않고 안착하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도 그 덕분인 듯했다. 현재까지 이 과정을 마친 이는 57명, 이 중 50명이 지역에 정착했다. 전체 성비는 남녀 5:5로 균등했지만, 방문 당시에는 프로젝트 참여자 9명 중 8명이 여성이었다. 창업농의 여성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 추세라고 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여성 농부는 2024년 인류학 박사과정을 마친 뒤 농업에 뛰어든 경우였다. 혼자 농사를 짓다 보면 체력적 부담과 작업의 어려움이 적지 않지만, 공동 인프라 덕분에 초기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점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이 현장을 보며 내가 거창에서 기획하고 운영 중인 ‘시골언니프로젝트’와 국내 지자체들의 청년농 실험농장 모델들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청년 여성의 귀농 귀촌을 돕는 국내 프로그램들도 단순한 단기 체험을 넘어, 지역 안착과 안전한 관계망 형성이라는 단계적 성과를 내기 위해 늘 현장에서 깊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 진입농이 혼자 농장을 꾸릴 때 겪을 수밖에 없는 시행착오와 위험을, 지역의 실험농장이 완충재가 되어 함께 나누는 것. 이는 개인이 홀로 감당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지역사회의 연대적 자산으로 분산하는 구조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 지역 거창에서 몇백 평의 밭을 인큐베이팅 농장으로 바꾸는 실험을 당장 시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민이 연대의 주체로 함께한다면
  프랑스 연수 현장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단연 시민들이 생각하는 ‘농지의 가치’,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자본과 행동이었다. 투기적 자본이나 기후 위기에 역행하는 무분별한 개발로부터 농지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직접 나서는 것. 농촌의 위기가 결국 공동체 전체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먼저 깨달은 이들의 선택처럼 보였다. 땅을 사유재산이 아닌 공공자산으로 전환해가는 과정, 그리고 유기농업 실천을 조건으로 청년농들에게 기회의 땅을 내어주는 선순환이 프랑스 농촌 곳곳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청년들은 무리하게 땅을 사기 위해 빚을 지지 않아도 된다. 시민들이 연대로 마련해 준 토지라는 안전망 위에서, 청년들은 오롯이 생태적이고 지속 가능한 농업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이곳의 시민 주주들이 기대하는 보상은 사적인 재무적 수익(ROI)이 아니었다. 내가 투자한 돈이 지역의 농지를 건강하게 살리고, 청년들의 삶을 지탱한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사회적 수익(SROI)을 나누는 연대 금융의 사례였다.
  한국 안에서도 유사한 풀뿌리 행동들이 분명히 있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속 가능성의 한계에 부딪혀 온 이유는, 농지가 지닌 공공재적 가치가 농민과 일부 정책가들만의 영역에 머물며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이 땅에서 자라난 먹거리를 소비하는 도시 시민들의 삶에까지 그 가치가 닿아야 한다. 시민들이 농촌의 가치에 공감하고 연대의 주체로 함께할 때, 한국 농촌에서의 대안적 실험들도 더 넓게, 더 오래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필자 백은선: 그라운드스토리 농장 대표
2020년 고향인 경남 거창군으로 귀농했다. 현재는 가족농의 형태로 사과 농사를 지으며 농촌문화기획사 ㈜로컬로우의 대표를 겸하고 있다. 지역에서 정례형 농부시장 ‘농부시장 이음’을 운영하며 지역의 농부와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재미로 살아간다. 귀농 전에는 사회적연대경제 영역에서 크라우드펀딩 매니저, 사회공헌사업을 기획하는 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