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 충북 고추명예연구소 소장
흔하디흔한 고추로 ‘농민 발명왕’이 되다
이종민 씨(62, 충북 고추명예연구소 소장)를 처음 만난 건 2000년, 13년 전 제9회 대산농촌문화상 시상식에서였다.
당시 농업 발전에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낸 사람에게 수여하는 첨단농업기술진흥 부문(지금의 농업기술부문)은 당연히 대학교수나 전문연구원이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해는 ‘흔하디흔한’ 고추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민이, 유수한 석학들을 제치고 ‘첨단농업기술진흥’부문을 수상한 것이다.
이종민 소장은 농민 발명가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로 고추 비 가림 재배기술을 개발해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늘렸고, 태양열과 자갈, 하우스 내 가온 등 3열을 이용한 건조법과 고추세척기를 개발해 에너지를 절감하고 고추 품질을 한층 높였으며, 여기에 가격을 미리 결정, 한번 결정한 가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농산물 가격 안정화에 이바지한 것이 그의 수상공적이었다.
13년이 흘렀다. 이종민 소장은 여전히 고추농사를 짓는다. 흔한 ‘양념 채소’ 중 하나였던 고추는 ‘청결 고추’라는 브랜드로 충북 음성군의 특산품으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 600g 한 근에 6천 원이었던 고추가격은 2011년부터 1만 5천 원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이 소장의 삶과 고추 이야기가 실렸고, 또 산업 훈장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다. 반면 두 차례 폭설과 태풍 매미로 하우스가 주저앉거나 날아가 큰 피해를 보았다. 지금도 그 흔적을 찬찬히 지우는 중이다.
대산농촌문화상 수상 당시 한국농업전문대학을 다니던 둘째 아들 신호(33) 씨가 함께 고추농사를 짓는다. 집은 예전 그대로지만 집안 곳곳을 점령(?)한 손녀들 사진으로 평범하지만 더 따뜻해졌다. 그리고 그의 아내 신영길 씨(58)는 여전히 분주하다. 13년 전처럼.
그렇게, 뜨거운 햇볕 아래 고추가 열심히 익어가는 7월의 음성은 무덥고 또 평화로웠다.
새로운 발상, 농업을 바꾸다
“군대 갔다 와서 바로 농사를 지었어. 다른 덴 뭐 별 관심이 없었지. 큰 기술이 뭐가 필요해. 인삼
농사를 했는데, 여름엔 일하고 겨울엔 놀잖아. 그래서 비닐하우스를 지었어. 뭘 심을까 하다가 고추를 심었는데 생각보다 아주 잘 된겨. 노지보다 5배 이상 수확을 했지. 그래서 한 2년 고민하다가 고추에 더 잘 맞는 고추 전용 비닐하우스를 만들었어. 그랬더니 수확량이 또 확 늘더라고.”
이 소장이 개발한 광폭형 고추 전용 하우스는 일반 하우스보다 넓고 높다. 한 동의 크기가 약 300평, 넓이는 12m, 높이는 5m에 달한다. 하우스가 크면 연료비가 많이 들지만 수확량이 많고 품질도 좋다. 천장이 높으니 하우스 안의 고온현상이 줄어들고 수확기도 늘어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수확이 가능하다.
건조 방식도 특별하다. 이른바 3열 건조법.
“한 열 살 땐가 그땐 비닐도 없었어. 어머니가 고추를 마당에 말리다가 비가 오면 온돌방에 말리던 게 떠오르고. 그리고 여름에 햇볕을 받으면 돌이 뜨끈뜨끈하고 해가 넘어가더라도 따뜻했던 게 생각나. 그래서 하우스 안에 자갈을 깔고 고추를 말리고 밤에는 보일러 열을 쓰는 3열 건조법을 생각한 겨.”
고추는 잘 말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 빨리 바싹, 고추도 바삭바삭하게 말려야 한단다.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간단한 원리고 특별할 것도 없단다. 여기에 고추 세척기까지 개발해 고추생산과 가공에 필요한 설비를 다 갖춰 놓았다.
비 가림 재배가 좋은 이유는 고추에 흔하게 오는 병이 잘 오지 않고, 물만으로 매운맛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어서 다양한 소비자의 요구에 응할 수 있다.
100% 직거래, 한정 판매
배짱 좋은 농민
“그때(1980년대 말)만 해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때였잖어. 그래서 이런 고추가 흔치가 않았지. 그냥 줬어. 먹어보라고. 그게 맛이 특이했던 모양이야.”
비 가림 고추를 생산한 첫해는 판로를 찾지 못해 고민했지만, 그 이듬해 고추 맛을 본 사람들이 다시 농장을 찾았다. 지인들과 함께. 또 그다음엔 그 지인들이 또 다른 지인을 끌고 왔다. 그렇게 입소문이 문턱을 넘어 빠르게 번졌고, 고추를 미처 말리기도 전에 주문이 밀려들었다. 넘치는 수요 때문에 한정판매를 할 수밖에 없었다. 1인당 20근. ‘이종민 깔끔초’를 살 수 있는 양이다. 아직도 그는 한정판매를 한다. 다만 최근엔 소비자의 항의가 많아 30근으로 늘렸다고 했다.
소비자와의 약속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종민 소장은 ‘얼굴 있는 농사’를 고집한다. 시중 고춧가루가 2만 원일 때도, 1만 원일 때도 그는 3년 전에 정해놓은 1만 5천 원을 고집한다. 농산물 가격의 안정은 농민이 안심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가 직거래를 고집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소비자가 지지하는 농업을 키우며
지난 6월, 음성군에서는 도시 소비자를 위한 특별한 행사를 했다. 이 소장이 한 달 동안 정성스레 키운화분 4,300개를 도시의 소비자에게 나눠 주었다. 물만 주면 재배가 가능하도록 만든 고추 화분은 소비자의 집에서 자라며 소비자의 믿음을 키운다. 그리고 가을 고추 축제가 한창일 때 음성을 찾아 정직하고 배짱 좋은 농민의 고춧가루를 고맙게 사 갈 것이다.
“특별한 기술은 없어. 생각한 걸 남보다 먼저 했다는 거지. 내가 살 길은 품질 좋게 만들어서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 소비자가 믿게 하는 거, 바로 그거여.”
투박한 농민이 지켜온 40년의 약속, 그것은 정직하고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고집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농민을 믿고 가격으로, 마음으로 지지하는 똑똑한 소비자가 함께하기에 지켜질 수 있다.
글·사진 / 신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