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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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범 (사)여민동락공동체 대표
(제32회 대산농촌상 농촌발전 부문 수상자)

  벼 이삭이 되알지게 익어가는 논 자락을 따라서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여민동락공동체’라고 벽면에 큼직하게 적힌 건물 앞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니, 부지런히 재가노인복지센터로 향하는 몇몇 어르신이 보였다. “오셨어요, 어르신!”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사회복지사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남 영광군 묘량면 여민동락공동체의 아침 풍경은 그렇게, 활기차고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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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군 묘량면에 위치한 여민공락공동체. ⓒ여민동락공동체
전남 영광군 묘량면에 위치한 여민동락공동체.
여민동락공동체는 ‘더불어 행복한 농촌’을 꿈꾸는 농촌복지공동체다.

시골 마을에 온 도시 청년들
  여민동락공동체는 ‘더불어 행복한 농촌’을 꿈꾸는 농촌복지공동체다. 총 4개 사업단이 재가노인복지센터, 마을가게(점빵), 사회적농장, 마을교육공동체를 각각 운영하고 있다. 권혁범 씨는 창립부터 쭉 함께해 온 구성원이자, 현재 공동체를 총괄하는 대표이다.
  “2004년 겨울,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도시에서 기간제교사로 일할 때였어요. 대학 선배가 우리 부부를 찾아와 시골행을 제안했어요. 소박한 삶, 생태적인 삶이 참 멋있잖아요. 낭만적이고요. 뜻 맞는 젊은이들끼리 공동체를 이룬다니까, 같이 살면 얼마나 재밌을까 싶었죠. 우리끼리 잘 사는 게 아니라 지역에 보탬이 될 거라고 하니까 더 좋았어요.”
  2007년 2월, 그는 묘량면으로 귀농·귀촌한 5명의 동료와 함께 협동조직을 설립했다. 그들은 각자의 재능과 역량으로 삶을 꾸리고, 농촌사회에 보탬이 되는 활동을 펼치기로 했다.
  “1년 2개월 동안 지역사회에 뭐가 필요한지 조사하고 논의한 끝에, 재가노인복지센터를 직접 운영하기로 했어요. 치매, 중풍 등 중증 질환으로 일상생활이 어렵고, 마을이나 가족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어르신들에게 주간보호, 방문요양, 방문목욕 등 전문적인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죠. 지역에 꼭 필요한 일이자,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2008년 6월, 여민동락공동체는 영광군 8개 면 최초로 노인복지시설을 세우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묘량면으로 귀농한 권혁범 씨 부부. ⓒ여민동락공동체
2007년 2월, 묘량면으로 귀농한 권혁범 씨(오른쪽)와 김강선 씨 부부. ⓒ여민동락공동체

묘량면의 ‘홍반장’이 되다
  재가노인복지센터는 전문적인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지역복지팀을 두고 지역사회 조직화와 농촌 활성화 활동도 추진했다. 첫 번째로 시작한 것이 ‘방역’이었다.
  “시골에서는 소독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 일을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돈 되는 일도 아닌데 민원은 제일 많거든요. 우리에게는 지역주민을 만날 좋은 기회였어요. 트럭을 한 대 사서 방역기를 싣고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소독약을 빠짐없이 뿌렸죠. 어르신들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제가 운전을 잘한다고 ‘후진 100㎞’라는 별명도 얻었죠.”
  그는 2008년부터 7년간 방역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주민의 삶에 밀접하게 다가갔다. “어르신, 어떻게 지내셨어요?” 말을 걸면 “TV가 고장 났다”든지, “형광등이 나가서 불편하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때면 자식 역할, 기사 역할을 자처했다.
  “차편이 없는 어르신을 목적지까지 모셔다드리거나, 고장 난 물건을 가져다가 직접 고치기도 했어요. 지인들에게 의료봉사활동을 부탁하고, 행정리 별로 작은 축제를 열기도 했죠. 도시에서 후원물품, 중고물품을 실어 나르는 일도 많이 했네요.”

7년간 방역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주민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여민동락공동체
7년간 방역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주민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여민동락공동체
마음에는 공경을, 손발에는 나눔을. ⓒ여민동락공동체
마음에는 공경을, 손발에는 나눔을. ⓒ여민동락공동체
람, 지역사회, 자연이 조화로운 좋은 삶터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여민동락공동체
사람, 지역사회, 자연이 조화로운 좋은 삶터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여민동락공동체

노인 일자리는 예방적 복지 활동
  지역에 깊숙이 들어가 주민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니, 농촌의 어려운 현실이 더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에 살러 왔는데, 농촌 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이대로면 10년, 20년 뒤에 지역을 떠나야 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다녔죠.”
  그렇게 시작한 것이 저소득 노인을 대상으로 한 ‘노인 일자리’ 사업이었다. 경제 활동에서 제외된 노인들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중증 질환에 걸리는 경우를 줄이고자 하는 ‘예방적 복지 활동’이었다.
  “2009년 9월, 솜씨 좋은 어르신들을 모셔서 모싯잎송편공장을 운영했어요. 어르신들이 떡을 얼마나 예쁘게 빚었는지, 어느 날은 떡공장에 민원이 들어온 적이 있어요. 기계로 만들지 않고서야 떡 모양이 이렇게 똑같을 수 없대요. 어떻게 사람을 속일 수 있냐면서 환불을 요구한 사람이 있었어요. 하하.”
  모싯잎송편이 인기를 얻자, 주변에 기계로 송편을 찍어내는 공장들이 늘어났다. 이 사업은 참여하는 노인들의 만족도는 높았지만, 다른 공장과의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2021년 문을 닫게 되었다. 공장에 원료를 공급하던 사회적농장에서는 모시, 동부 재배량을 서서히 줄이고 야생화, 새싹보리, 쌈채소 등을 키웠지만 적절한 판로를 찾기 쉽지 않았다.
  “농촌에 일손이 워낙 부족하니까 쉬고 있던 어르신들도 마을에 일하러 가시거든요. 그러니까 저희랑 일하는 어르신들의 평균 연령이 계속 올라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72세였는데 2023년에 78.5세까지 올라갔어요. 이분들과 함께할 새로운 일자리를 계속 고민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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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일자리는 예방적 복지 활동이다. ⓒ여민동락공동체

사람과 사랑을 잇는 마을가게
  2010년 5월, 면 소재지에 유일했던 구멍가게가 사라졌다. 지역주민들은 간단한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기 위해 읍내까지 나가야 했다.
  “2011년 행정안전부에서 시행한 ‘마을기업’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새롭게 점빵을 열게 되었어요. 마침 그해에 여민동락공동체에 합류한 귀촌인 두 명이 운영을 맡아서 열심히 일했고, 2012년에 매출 1억 원이 넘는 기적을 만들어냈어요.”
 화물차를 구입해 ‘이동 점빵’도 함께 운영했다.
  “이동 점빵을 이용하는 고객 99% 이상이 70대 이상 노인이에요. 담당 사회복지사가 매주 목, 금요일에 묘량면에 있는 18개의 행정리, 42개의 자연마을을 천천히 돌면서 식료품, 생필품을 팔아요. 이문이 남지 않는 농촌형 사회 서비스죠. 지역주민들이 이용하는 점빵의 수익금 일부로 이동 점빵을 운영하는 거예요.”
  2014년 8월, 점빵은 지역사회 주민들이 참여하는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재탄생했다. 지역순환경제를 지지하는 약 400명(묘량면 실질 인구의 약 40%)의 조합원이 점빵이 계속 운영될 수 있도록 지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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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랑을 잇는 마을가게, 동락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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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식료품, 생필품이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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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점빵은 매주 2회 묘량면 18개 행정리, 42개 자연마을을 돌면서 식료품, 생필품을 판다. ⓒ여민동락공동체

작은 학교를 살리다
  2009년 7월, 묘량면의 유일한 초등학교가 3년 뒤 읍내 초등학교로 통폐합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를 막으려면 학생 수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묘량면에 사는 모든 초등학생의 부모를 만나서 의견을 모으고, 지역사회와 동문의 지지를 이끄는 학교발전추진위원회를 꾸렸다.
  “그때 묘량면에 사는 아이들 대부분이 영광읍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어요. 학교에 통학차량이 따로 없었거든요. 후원금으로 통학차량을 구입해 제가 직접 운행했어요. 학교에 데려다주고, 학원에 데려다주고, 하루에 5번씩 왔다 갔다 했죠. 제 아이들이 졸업한 후에도 2018년 교육청 통학버스가 배정될 때까지 했어요.”
  교직원을 끝없이 설득한 끝에, 아침 일찍 출근하거나 밤늦게까지 일하는 부모를 위한 방과 후 프로그램 ‘엄마품 온종일 돌봄교실’을 학부모가 직접 기획,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초등학생은 놀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학부모들이 모였어요. 방과 후 수업에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은 전부 빠지고 피아노, 미술, 제과제빵, 탁구, 마술, 기타, 컴퓨터 등 아이들과 부모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채워졌어요. 여름방학에는 수영하러 가고, 겨울방학에는 스키나 스케이트를 타러 갔어요.”
  묘량중앙초등학교는 4년 만에 폐교 대상에 제외되었다.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을 더해 20명 남짓했던 작은 학교가 100여 명이 다니는 큰 학교로 성장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더불어 함께 행복한 마을교육공동체를 꿈꾼다. ⓒ여민동락공동체
아이부터 노인까지 더불어 함께 행복한 마을교육공동체를 꿈꾼다. ⓒ여민동락공동체
‘더불어 행복한 농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여민동락공동체 직원들. ⓒ여민동락공동체
‘더불어 행복한 농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여민동락공동체 직원들. ⓒ여민동락공동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학교 살리기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제2의 작은 학교 살리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맨땅에 헤딩하라는 시절은 이제 갔어요. 역량 있는 젊은이들이 농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공공임대주택을 조성하고, 생활급여를 지급해야죠. 물론 청년들을 제대로 육성하는 교육기관도 필요해요. 지역에서는 그 친구들을 포용하고 환대해야 하고요. 그러려면 진짜 공동체성이 살아나야 해요. 주민자치회를 만들어 제도적인 뒷받침이 되면 좋겠어요.”
  여민동락공동체에서는 2021년부터 ‘정든 묘량에서 건강하게 나이 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단계는 유럽, 일본의 노인복지시설을 참고해서 재가노인복지센터를 새로 짓는 것이었다. 2단계 핵심 과제는 유럽식 소규모 노인의료복지주택(노인공동생활과정) 설립과 의료복지사회 적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핵심 키워드는 ‘자주성(주체성)’과 ‘공생성(관계성)’이에요. 지역주민들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면서, 이웃과 더불어 살도록 하는 거죠. 그래야 우리 사회가 복지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불쌍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는 시혜적 복지는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아요. 당사자의 본성을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복지입니다.”

  권혁범 씨의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라는 쇠귀 신영복 선생의 글귀가 생각났다.
  “제가 여기 온 지 벌써 18년이나 되었어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저는 여기에서 계속 살겠죠. 우리 지역사회의 문제는 내 문제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더 많은 사람과 함께 가려고 해요.”
  더불어 사는 즐거움,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이뤄낸 수많은 기적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글·사진 이진선

혁범 씨는 정든 묘량에서 건강하게 나이 들고자 한다. ⓒ여민동락공동체
권혁범 씨는 정든 묘량에서 건강하게 나이 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