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답이 있다

이영규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고령지농업연구소 농업연구관
(제33회 대산농촌상 농업공직 부문 수상자)

푸릇푸릇한 여름 배추가 자라는 강릉 안반데기 고랭지 배추밭.

  강릉에서 평창으로 아흔아홉 굽이 고갯길을 넘으면,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부는 대관령이 나온다. 너른 산자락을 푸릇푸릇한 배추가 뒤덮은 모습을 보면 와, 하는 감탄이 절로 터진다. 농민이 오랜 시간을 공들여 일궈낸 눈부신 경관이다. 여유로워 보이는 풍경과 달리, 이곳을 지키는 농민의 마음은 바쁘다. 갑작스러운 병으로 배추가 시들거나 무르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영규 연구관은 이러한 농민의 옆에서 고랭지 주요 작물의 바이러스 및 병해를 진단하고 방제하는 방법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

반쪽시들음병은 잎이나 줄기의 반쪽을 노랗게 시들게 하는 토양 전염병이다.
반쪽시들음병은 잎이나 줄기의 반쪽을 노랗게 시들게 하는 토양 전염병이다.

미생물로 반쪽시들음병을 잡다
  2017년, 그는 고랭지 농가에서 ‘반쪽시들음병’ 피해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이름처럼 잎이나 줄기의 반쪽을 노랗게 시들게 하는 토양 전염병인데, 초기에 발견하기도 어렵고 치료제가 없어 그 피해가 심각하다.
  “배추를 심으면 40일까지는 배추밭이 그림 같아요. 50일 넘어서부터 배추가 조금씩 이상해지다가, 출하하기 10일 전부터 시들어서 와르르 무너지는 거예요. 날이 건조하면 일부라도 잘라서 김치 공장에 보내는데, 비가 오면 2차 감염으로 확 썩어버려요.”
  토양에 한 번 퍼진 곰팡이는 약 30년 동안 죽지 않아 더 골칫거리다. 그는 끈기 있게 연구한 끝에, 병의 원인이 되는 ‘버티실리움(Veticillium spp.)’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길항 미생물 ‘패니바실러스 폴리믹사(Paenibacillus polymyxa YKB11691)’를 발견했다. 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토양에 넣을까 궁리하다가 ‘퇴비’를 떠올렸다.
  “옛날에는 농가에서 부엽토를 썼잖아요. 그 안에 좋은 미생물이 많이 들어있으니까요. 닭똥으로 만든 퇴비에 길항 미생물을 넣어보니, 그 안에서 안정적으로 자라더라고요. 수분과 온도만 맞으면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요. 퇴비를 활용하면 비용도 적게 들고, 농가에서 쓰기도 훨씬 편하죠.”
  2023년, 강릉시와 태백시의 농가를 대상으로 현장실증연구를 진행하여 미생물 퇴비의 효과를 확인했다.
  “연구에 참여한 농가에서 배추를 90% 이상 출하했어요. 방제 기술을 도입해서 농사에 성공했다니 기분이 좋았죠. 저보고 배추 농사짓는 농민을 살렸다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치켜세우는 분도 있어요. 제가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죠.”
  특허 출원한 방제 기술은 5개 업체에 이전하여 더 많은 농민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농민에게 더 나은 방제 방법을 찾기 위해 연구 내용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토양에 반쪽시들음병 병원균 밀도가 워낙 높으니까, 수류탄 역할을 하는 토양훈증제를 같이 쓰기를 권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가격도 비싸고 환경에도 별로 안 좋아요. 그래서 처음에 한두 번만 쓰고, 그다음부터는 미생물 퇴비만으로 방제할 시스템을 갖추도록 연구하고 있습니다.”

반쪽시들음병 병원균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길항 미생물.
길항 미생물이 들어간 퇴비를 밭에 뿌리고 있다.
방제용 퇴비는 사용이 수월하고, 비용도 절약된다.

현장으로 눈을 돌리다
  이영규 연구관은 어떻게 바이러스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을까. 어릴 적에 과학 백과사전을 여러 번 읽을 정도로 과학을 좋아했던 그는, 농과 대학에 진학하면서 바이러스의 세계에 눈을 떴다.
  “전자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면 미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바이러스를 찾는 것도 신기하고, 저마다 특징이 다르니까 진짜 재밌는 거예요. 한 번 빠지니까 헤어 나올 수가 없더라고요.”
  식물병리학 박사 과정을 밟던 시기에, 그는 어느 농민과의 통화를 계기로 연구자로서 목표를 명확히 잡게 되었다.
  “전라도에서 수박 농사짓는 분에게 전화를 받았어요. 바이러스 때문에 농사를 다 망쳤다고, 이걸 어떡하면 좋겠냐면서 울더라고요. 아,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요. 농민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법이 뭘까 고민했죠. 바이러스를 쉽고 빠르게 진단할 방법을 찾고, 나아가서 치료제까지 개발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2002년 6월, 그는 고랭지농업을 연구하는 유일한 국가농업연구기관인 ‘고령지농업연구소’에 부임하여, 씨감자 바이러스를 진단하고 관리하는 연구를 맡았다.
  “검사요원들이 씨감자밭에서 바이러스 검사를 하고 합격, 불합격 판정을 내리거든요. 검사요원은 바이러스에 걸렸다, 농민은 안 걸렸다, 이렇게 싸우는 경우가 많았어요. 검사 결과가 정확하지 않았거든요.”
  이러한 분쟁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도록 식물체에서 바이러스 유전자를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유전자를 어떻게 추출하냐에 따라서 진단 결과에 차이가 나요. 식물체 안에는 식물체 유전자가 99%고, 바이러스 유전자는 1%도 안 되거든요. 그것만 쉽고 빠르게 뽑아내는 방법을 찾은 거예요. 길게는 2일 정도 걸리던 시간이 30분으로 줄었죠.”
  ‘새로운 형태의 식물 바이러스 유전자 분리키트 개발’은 2008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되었다.

이영규 연구관은 금지병인 감자걀쭉병 박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8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된 식물 바이러스 유전자 분리키트.

감자걀쭉병을 박멸하다
  2008년 5월, 국내의 한 농장에서 ‘감자걀쭉병’이 검출되었다. 이 병은 감자가 기형적으로 길쭉해지고 수확량이 40%까지 감소하는 식물방역법상 금지병이다.
  “이게 고추, 토마토 등 가지과 작물에 영향을 주는 병이거든요. 우리나라가 발생 국가로 지정되면 관련 작물을 수출하지 못하는 거예요. 당시 검역본부에서 추산한 피해액이 2900억 원이에요.”
  감자걀쭉병이 발생한 나라에서 감자를 들여오게 되는 것도 문제다.
  “중국은 가깝잖아요. 맛도 좋고 저렴한 감자를 손쉽게 들여오면 우리나라 감자 산업 자체가 흔들려요. 식량 작물인 감자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면 식량 주권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우리 역사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무서운 병이에요.”
  그는 5년간 전국에 있는 씨감자밭을 돌면서 감자걀쭉병이 있는지 살폈다. 첫해에는 농가를 방문하면 첫마디가 “왜 왔냐”는 반응이 많았다.
  “바이러스 검사라고 하면, 자신의 밭에 문제가 있을까 걱정되잖아요. 농민들은 우리가 시료 채취하는 걸 언짢게 봤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농가 컨설팅을 시작했어요.”
  감자에 관한 일대일 컨설팅을 받은 농민들의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씨감자 생산에 필요한 여러 교육을 했어요. 신품종이 나오면 추천하기도 하고요. 특히 경상도, 전라도 농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거든요. 처음에는 서너 명만 나오다가 언제부턴가 밭 주인들이 우르르 나와요. 5년 지나고 그만 올 거라니까, 그런 게 어디 있냐고, 꼭 다시 오라더라고요.”
  전국 300여 씨감자 농가, 약 500ha 현장을 다니며 보낸 5년. 드디어 감자걀쭉병 박멸을 선언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는 청청국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영규 연구관은 농민과 연구자가 힘을 합치면 기술이 더 쉽고 빠르게 도입 된다고 강조한다.

결국, 답은 현장에 있다
  2024년 9월, 이영규 연구관은 고랭지배추연구실의 초대 실장이 되었다.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여름 배추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더는 ‘금배추’, ‘똥값배추’라는 말이 안 나오게 해야죠. 배추가 안정적으로 생산되어야 수확량을 예측할 수 있거든요. 배추가 건강하게 자라려면 토양을 살려야 해요. 지금은 기계가 박살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갈이 소복해요. 비가 오면 흙이 쓸려가니까, 배추가 자랄 데가 없는 거예요. 화전(火田)으로 60년 동안 양분을 뽑아 썼잖아요. 이제는 팍팍 투자해서 땅을 다시 살려야 해요.”
  후배들이 연구 방향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그의 역할이다. 그는 무엇보다 농민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업 연구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최우선이거든요. 현장에 가면 연구 아이템이 너무너무 많아요. 내가 어떤 방향의 연구를 하겠다고 이야기하면, 그게 현실에 맞는지 피드백도 받을 수 있어요. 농민과 연구자가 힘을 합치면 농업 현장에 기술이 더 쉽고 빠르게 도입되거든요. 나는 나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이렇게 해서는 접점을 찾기 어렵죠.”
  이영규 연구관은 현장에서 만난 농민들에게 “배우러 왔습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묻는다며 씩 웃었다. 앞서가는 농민의 이름과 하는 일을 줄줄이 꼽으며, “그런 분들을 만나면 서로 즐겁다”는 그의 얼굴에 순수한 열정이 묻어나왔다. 농민들이 어찌 그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현장에서 ‘답’이 만들어진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