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가 함께 만드는 지역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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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안에서 엄마 소를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우순이의 눈망울은 크고 맑았다. 송아지 기금을 마련하는 데 참여하고 기금 전달식에 참관단으로 제주를 방문한 한살림 조합원 정현주 씨는 축사에서 국산 사료 한우 사육을 통한 지역 순환 농업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이 함께한 얼마 안 되는 기금이 제주의 땅을 살리고, 우리 농업을 지탱하는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도시 소비자가 농민에게 보낸 송아지 선물
한살림 성남 용인에서는 2011년 가을부터 송아지 기금을 모금하고 있다. 올해로 3년 째, 소비자 조합원들이 십시일반 하여 재작년에는 12마리, 작년에는 15마리 송아지를 제주 조천읍에 있는 한울공동체 농부들에게 보냈다. 이 송아지들은 지역에서 생산된 콩깍지, 옥수수, 보릿겨 등 100% 국산사료를 먹고 자란다. 기금을 낸 소비자들은 송아지가 다 자란 몇 년 뒤 명절에 쇠고기 세트를 선물 받는다. 2011년 기금 모금에 참여한 사람들은 내년 설에 쇠고기 세트를 선물 받는다. 돈을 내고 몇 해 기다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운동에 참여하는 소비자 조합원들은 자신도 식량 자급을 위해 한몫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나라의 식량지급률은 전체 22.6%, 쌀을 제외하면 3.7% 남짓. 우리 농업을 살리는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살림에서는 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 운동을 펼치고 있다. ‘가까운 먹을거리 운동’, ‘우리보리살림운동’, 그리고 ‘국산사료 한우 키우기 운동’ 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011년에 밀 0.5%, 옥수수 1%, 콩 8.4%, 전체 22.6%, 쌀을 제외하면 3.7% 남짓. 우리 농업을 살리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살림에서는 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 운동을 펼치고 있다. 푸드마일리지와 로컬푸드를 종합한 ‘가까운 먹을거리 운동’, 정부 수매가 중단되면서 농민들이 사실상 농사짓는 것을 포기한 보리를 발아시켜 사료로 급여함으로써 보리농사를 이어가려는 ‘우리보리살림운동’, 그리고 ‘국산사료 한우 키우기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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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산사료 한우 키우기 운동’은 단순히 식량자급률 향상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송아지를 키우며 나오는 축분을 이용하여 양배추, 브로콜리, 감자, 당근 등 밭농사를 짓고, 밭농사에서 나온 부산물을 다시 사료로 이용함으로써 지역의 물질 순환을 이루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살림의 소비자 조합원들은 송아지 기금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축분을 이용한 밭농사의 생산물들을 소비함으로써 지역 순환 농업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도시 소비자가 송아지를 지원함으로써 농민들의 국산 사료 급여에 대한 부담, 밭작물 수입에 대한 걱정 등을 덜어낼 수 있는 체계를 갖춘 것이다.

소비자의 믿음으로 가능해진 지역 순환 농업
2000년 1월 21일 아산 산정리에서는 ‘아산 친환경지역농업 선포식’이 열렸다. 한살림에 참여하는 아산 지역의 농민들이 우루과이라운드와 WTO체제로 인해 농산물 수입이 사실상 전면 개방된 상황에서 우리 농업이 살 길은 ‘친환경 지역 농업’이라고, 아산에서 그 모델을 만들겠다고 야심 차게 선언한 것이었다.
이는 석유나 수입 사료 등 외부 자원에 의해 유지되는 현재 농업의 구조, 농약과 화학비료로 찌들어 있는 농촌의 현실을 친환경 농업을 바탕으로 지역 순환 농업 체계를 통해 새롭게 전환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제주의 국산사료 한우 축산과 마찬가지로 집집마다 소가 있고, 그 소가 논을 갈고, 논에서 나온 볏짚으로 쇠죽을 끓여 소에게 먹이고, 소에서 나온 퇴비를 논에 투입하는 개별 농가 단위의 물질 순환체계를 확대하여 마을 단위의 물질순환, 더 나아가 지역 단위 물질순환의 구조로 아산의 농업 구조를 바꿔 나가자는 것이었다.
이런 선언이 가능했던 것은 한살림에 참여하는 도시 소비자들의 덕이었다. 아산의 이호열 생산자가 1980년대 말 한살림에 참여할 때만 해도 한두 농가의 생활을 뒷받침하기에도 어려워 이런 구상은 꿈에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 도시 소비자들은 생명의 원리에 따라 친환경 유기농업을 사명으로 여기며 한살림에 참여하는 생산자 농민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웃들에게 한살림을 소개하면서 생산자들을 뒷받침하는 기반을 넓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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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연속 병으로 무농약 오이농사가 실패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소비자들이 회의를 통해 ‘예외로 오이농사는 농약을 쳐도 좋다’는 결정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농약 통을 지고 밭에 가서도 차마 농약을 뿌리지 못하고 돌아섰던 이호열 생산자 같은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소비자들은 전적으로 믿었다. 결국 그런 믿음은 목초액을 넣고, 퇴비를 듬뿍 넣어 기어코 무농약 오이 재배에 성공하는 토대가 되었고, 또 그 신뢰가 한살림을 성장시켜 확대된 구매력을 바탕으로 2000년 무렵 마을 단위, 더 나아가 지역 단위의 지역 농업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농민들과 함께하는 소비자의 신뢰가 지역 공동체의 꿈을 영글게 했던 것이다.

농약 통을 지고 밭에 가서도 차마 농약을 뿌리지 못하고 돌아섰던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소비자들은 전적으로 믿었다. 결국 그런 믿음은 목초액을 넣고, 퇴비를 듬뿍 넣어 기어코 무농약 오이 재배에 성공하는 토대가 되었다.

친환경 지역 농업의 꿈, 지역공동체의 실천
친환경 지역 농업 선언을 구체화하는 계획들이 하나 둘씩 실천으로 옮겨졌다. 아산은 제주 조천보다 규모 면에서 훨씬 크고 종합적인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쌀과 잡곡 농사를 중심으로 유기농 채소와 버섯 등 특용작물, 과수 재배 등을 기반으로 하여 2003년 두부를 생산하는 식품 공장과 2007년 친환경 미곡종합처리장이 세워지면서 친환경 지역 농업의 본격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지역에서 생산된 콩을 원료로 두부를 생산하고 남은 콩비지와 미곡종합처리장에서 나온 쌀겨 등을 가축 사료로 사용하고, 가축의 배설물은 퇴비로 만들어 농작물 생산에 사용하는 자연 순환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2007년 부도 위기에 처한 지역의 사료공장을 인수하여 친환경 유기사료 제조 공장으로 전환하고 육가공 공장까지 설치하여 2008년부터는 유기 한우 사육에 들어감으로써 친환경 지역 농업의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식품 공장을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원료를 생산하는 농민들에게 수익을 보장함으로써 안정적인 농업 생산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아산의 한살림 생산자공동체에는 350명의 농민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논 350ha에서 벼를
재배하고 70ha의 노지와 20ha의 하우스에서 배, 가지, 감자, 오이, 토마토, 피망, 버섯류, 울금 등 50여 가지 1차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600두의 유기 한우와 유정란을 위한 1만 2천 수의 닭 사육을 통해 논밭을 기름지게 하는 퇴비를 조달한다. 미곡종합처리장에서는 1년에 4천 톤 가량의 쌀을 정미하고, 식품 공장에서는 하루 1만 모의 두부를 비롯하여 두유, 콩국물, 양파즙, 배즙, 콩나물 등 가공품을 만들며 그 부산물을 축산 사료로 재활용한다.

이런 순환체계를 바탕으로 생산된 농산물과 가공품은 전국 21개 지역한살림생협 35만 명의 소비자들에게 공급되고 있다. 또한 이들 생산품은 한살림뿐만 아니라 아산 지역 학교에 친환경 급식 재료로 제공된다. 앞으로는 친환경 급식 공급을 충남 전역으로 확대할 계획을 하고 있다. 또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복지재단 설립을 꿈꾸면서, 베트남, 태국 등 개발도상국 농촌 지원에도 나서고 있다.

소비자들은 농민들이 만드는 가공 공장에 함께 출자하여 참여하고, 기금을 만들어 송아지를 선물하기도 하고 급작스런 기상 변화로 인한 생산 재해를 보상하는 생산 안정의 체계도 마련하였다. 도시 소비자들은 농민들과 함께 ‘생산하는 소비자’, ‘공동 생산자’가 되었다.

공동 생산자인 소비자가 함께 살리는 지역공동체
우리 사회가 도시화, 산업화, 근대화되면서 농업과 농촌은 우리 삶으로부터 멀어졌다. 산업화와 근대화로 가난에서 벗어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면서 값싼 외국 농산물을 수입해 먹을 것도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먹을거리가 흘러넘치는 데도 아토피, 천식, 비염 등 면역결핍질환과 비만, 고지혈증등 생활습관병,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등 아이들은 아프고, 수명은 길어졌지만 우리의 노후는 병들어 버렸다.

이런 현실의 배후에 식생활과 농업의 분단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소비자들이 등장했다. 먹을거리가 우리 삶의 근본이며, 우리 농업이 살아야 우리의 건강한 삶도 보장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농촌과 도시는 둘이 아니고, 생산과 소비는 하나라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농업은 이윤 창출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뿌리이기에 친환경 유기농업이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식량자급률을 높여 우리 농업을 살려야 하며,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농민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 또한 지당한 일이었다.
농업의 가치를 공감하기 위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이해하고 알아가는 교류가 필요했다. 소비자들은 생산 현장을 찾아 농사짓는 농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손수 농사일을 해보는 현장 체험도 하고 일손을 도우며 농민들의 노고를 알 수 있었다. 두레나 품앗이처럼 농업은 서로 돕는 협동적 삶이라는 것을 일깨웠고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이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농업의 의미를 알아가면서 행복을 농업에서 찾으려는 귀농자들도 늘었다. 농사 절기에 맞추어 단오잔치를 열고 한해 농사의 수확을 감사하는 가을걷이 행사 등을 통해 자연 순환의 이치도 깨달았다. 때로는 소비자들의 초청으로 농민들이 직접 생산물을 가지고 도시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만남을 통해 신뢰가 쌓였다. 생산에 대한 신뢰는 지역 농산물 구매로 연결되어 생산자인 농민들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었다. 개별 농민들의 생활을 넘어서 지역의 자립과 식량 자급을 지향하는 친환경 지역 농업으로 농업의 구조를 바꿔나갔다. 아산의 경우처럼 논밭 농사와 축산을 병행하는 지역 복합 농업과 1차 농산물을 가공하는 식품 공장, 사료와 퇴비 공장 등을 통해 물질 순환이 완결되는 지역공동체를 일궈나갔던 것이다. 소비자들은 농민들이 만드는 가공 공장에 함께 출자하여 참여하고, 기금을 만들어 송아지를 선물하기도 하고 급작스런 기상 변화로 인한 생산 재해를 보상하는 생산 안정의 체계도 마련하였다. 도시 소비자들은 농민들과 함께 ‘생산하는 소비자’, ‘공동 생산자’가 되었다.
제주의 한울공동체와 아산처럼 한살림의 지역공동체 구상이 현실화할 수 있었던데는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지고,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정신이 있었다. 한살림에는 현재 35만 명의 소비자 조합원들이 2천여 농민이 속한 100여 개 지역공동체를 뒷받침하며, 여기서 생산하는 친환경 유기농산물과 가공품을 이웃들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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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들은 농업이 서로 돕는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농민과 함께하는 공 동생산자가 된다.
소비자들은 농업이 서로 돕는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농민과 함께하는 공동생산자가 된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는 농업이 건강해야 하고,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공동체가 튼튼히 자리 잡아야 한다. 건강한 농업을 위해서는 농업이 더 이상 농민들만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도시 소비자들의 착한 소비, 더 나아가서 농업 생산에 대한 참여가 우리 농업을 살리고 지역공동체를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17-3※필자 윤형근: 한살림 성남 용인 상무이사.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한살림 모임에서 일했다.
이후 소비자협동조합중앙회를 거쳐 (재)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프로그램부 간사, 계간 《대화》 편집장, 바람과물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했고, 2002년 한살림으로 돌아와 공생과 협동, 나눔의 연대를 화두 삼아 일하고 있다. 저서로 『협동조합의 오래된 미래 선구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