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일하고, 배우는 농(農)

유럽의 농업·농촌은 유럽연합(EU)의 공동농업정책을 바탕으로, 농업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변화하고 있다.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현장에서 만난 다양한 주체들의 연대와 협력,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의 힘, 그리고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 정책 등을 2025년 대산농업연수에 참여한 연수자의 시선으로 담아냈다. [편집자 주]

발몬더르호프 재단의 아네터 하버링크 사무국장이 실습농장을 안내하고 있다. ⓒ이지현

농업 교육, 사회와 삶을 배우다
  농학을 전공하고 농업 관련 기관에서 일하다가 준비 없이 귀농한 지 3년. 지난봄, 나는 대산농업연수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공자 농부로서 유럽의 농업 교육이 가장 궁금했다. 유럽에서 만난 농업 교육은 단순한 이론과 기술 습득이 아니라,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된 배움이었다.
  네덜란드의 발몬더르호프 재단(Warmonderhof)과 독일 켐프텐 농업직업학교(Staatliche Berufsschule III Kempten)에서는 배움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고, 생활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발몬더르호프 재단의 생명역동농업(Bio Dynamic Agriculture) 교육은 ‘살고, 일하고, 배우는’ 교육 철학 아래, 네덜란드의 정규 교육과정(MBO)으로 국가 공식 학위를 인정한다. 생명역동농업은 농장을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자연의 순환과 생명력을 최대한 살리는 엄격한 형태의 유기농업이다. 오랜 시간 사회적·역사적 인정을 받아왔고, 생태농업과 공동체적 삶을 중시하는 유럽의 교육 철학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공동체 농장에서 함께 생활하고 일하며, 실천을 통해 그 원리를 체득해 나간다. 수업과 실습의 구분이 크지 않고, 생활 자체가 교육의 연장이 된다.

켐프텐 농업직업학교. 왼쪽부터 교장 선생님, 플로리스트 선생님. ⓒ진정은
켐프텐 농업직업학교. 왼쪽부터 교장 선생님, 플로리스트 선생님. ⓒ진정은

  켐프텐 농업직업학교에서는 작물 재배와 축산, 기계 조작뿐 아니라 회계, 법률, 유통까지 포괄하는 커리큘럼이 운영된다. 학생들은 주 1일 학교에서 이론을 배우고, 주 4일 농장에서 실습하며 ‘현장의 감각’을 기른다. 농업 교육이 실천 속에서 이론을 재확인하는 구조로 짜여 있다.
  그곳에서 미카엘 페겔레(Dr. Michael Vögele) 교장 선생님이 연수자들에게 “한국 사람들은 농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나요?”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 어려웠다. 이어서 “농업이 사랑받지 못하면 식량은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농업이 과연 한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농부로 살아가는 나 자신은 어떤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한국에서 ‘농업은 생명이다’라는 문구는 농과대학이나 농업기관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곳은 자신감 있는 농부를 키워내고, 농부의 자격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나의 현실을 돌아보니 그저 부러웠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독일과 네덜란드 모두에서 농부를 ‘사회가 함께 길러내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농업학교 졸업생들은 농장을 직접 운영하거나, 공동체 농장에 참여하고, 농업 교육이나 환경 관련 분야에서 활동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농업계에서 활약한다. 이들은 단순한 노동 인력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농업 생태계 안에서 자기 역할을 찾아가는 시민으로 성장한다.

발몬더르호프 재단 온실. 생명역동농업으로 다양한 채소들을 재배하고 있다. ⓒ이지현
발몬더르호프 재단 온실. 생명역동농업으로 다양한 채소들을 재배하고 있다. ⓒ이지현

  네덜란드의 그린 교육(Green Education)은 농업, 원예, 환경, 자연, 식품, 지속가능성 등 그린 섹터(Green Sector) 전반을 포괄하는 실무·현장 중심 교육 체계다. 농업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농부가 사회적 지지 속에서 전문성을 갖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작물 재배뿐 아니라 농장 경영, 회계, 기획, 인력 관리 등 농업에 필요한 다양한 역량을 교육하며, 농민을 다면적 기술과 지식을 갖춘 전문가로 양성한다.
  이런 구조가 가능한 것은 사회 전체가 농업 교육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교육기관, 지역사회가 함께 협력하며, 농장은 식량생산뿐 아니라 교육과 돌봄, 공동체 회복의 공간으로도 기능한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이어지는 유기적인 교육 체계는 국민 모두가 자연과 생태를 이해하게 하고, 농업을 사회가 함께 지켜야 할 삶의 기반으로 자리 잡게 한다. 이러한 교육과 사회 구조 속에서 자란 농업인들은 소득을 넘어 사회적 인정과 존중을 받으며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이어간다. 이것이 네덜란드가 세계적인 농업 강국으로 성장한 배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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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켐프텐 식품농업청 부설 가정경영과 실습 공간에서는 농장과 가정에 필요한 기술을 배운다. ⓒ이지현

  여성 농업인으로서 독일 켐프텐 식품농업청 부설 가정경영과 방문도 기대되었다. 도시 여성의 귀농을 돕는 좋은 프로그램이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첫인상은 고등학교 가사 수업의 심화 과정 같았다. 하지만 실습장을 돌아보고, 독일 여러 곳에서 보았던 사례들과 유기적으로 연결해 보니 의미가 새로웠다. 삶의 기술을 체계적으로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에서 역할을 넓혀갈 수 있도록 설계된 교육이었다. 그곳은 학습 공간을 넘어, 여성들이 함께 배우고 서로를 지지하는 커뮤니티로도 의미 있는 기능을 한다.
  가정과 살림 역시 배움을 통해 사회적 역량으로 전환될 수 있는 분야로 존중받는다. 정원 관리, 음식 조리, 재정 운영, 환경보호 같은 일상적 활동이 교육을 통해 전문 기술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과정은 가정경영에 관한 ‘전문가’를 길러내며, 농업이 3차 산업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어 높은 완성도를 가능하게 한다. 독일 곳곳에서 마주한 감각적인 실내외 공간과 섬세한 장식은 생활 기술이 어떻게 삶을 더 풍요롭고 주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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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 호프 농장에서는 농약 없이 다양한 작물을 혼작하여 땅의 순환율을 높이고 생태다양성을 이루어낸다. ⓒ이지현

시민이 농업을 만나면
  농업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시민 교육이다. 농업이 우리 모두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힌트는 유럽에서 만난 일상 속 참여와 공동체 실천에서 찾았다.
  네덜란드의 위스 호프 농장(Ús Hôf)은 퍼머컬처 철학을 바탕으로 지역민과 함께 운영되는 공동체지원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CSA) 농장이다. 이곳은 생산과 소비의 경계를 허물고, 지역에서 기르고, 나누고, 먹는 문화를 회복하려는 실천의 장이기도 하다. 회원들은 농사에 직접 참여하고 농산물을 수확하는 과정에서 소속감을 느끼며,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농업의 현실을 자연스럽게 체험한다. 흙을 만지고, 작물을 돌보는 과정에서 음식 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손길과 시간이 담겨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런 경험은 자연과 먹거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이며, 농업이 우리 삶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몸으로 익히는 시간이다.
  위스 호프 농장의 교육은 교실이 아닌 농장에서 이루어진다. 주민들은 함께 밭을 일구고, 마을 행사와 음식 만들기, 어린이 체험활동에 참여하면서 농업의 본질을 배운다. 친환경농업을 지원하는 아발론 재단(Avalon Foundation)의 설립자인 마르틴 란케스터(Martien Lankester) 씨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건강한 토양에서 건강한 식재료가 나오고, 그것이 건강한 음식을 만든다.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지키고 병을 예방하는 것이다.”
  독일의 카를스루에 클라인가르텐(Karlsruhe Kleingarten)은 도시민들이 스스로 작물을 기르고 가꾸는 작은 정원이다. 여기서 작물을 재배하는 활동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식물을 기르며 이웃과 교류하고, 아이들은 흙을 통해 생명의 감각을 배운다. 이곳은 도심 속 농업 교육장이자 커뮤니티 공간이다.

‘우르슬라의 정원 – 흙을 만지고, 휴식을 취하며, 꿈꾸는 공간’이라고 적혀 있다. 클라인가르텐은 단순한 텃밭이 아니라 개인의 쉼과 치유의 공간이다.

  몇 년 전, 나는 도시농업관리사 교육을 받았다. 그때는 토양 관리, 병해충 관리, 작물 재배, 도시 양봉 등 기술 중심의 내용이 주를 이뤘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바쁘게 수업을 들으면서도, 도시에서 농업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의 도시민들이 참여하는 농업을 돌아본 후, 교육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도시민들에게 텃밭은 단순한 먹거리 자급의 공간이 아니다. 공동체를 만들고, 자연을 회복하며, 생명을 배우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도시농업은 주로 임대형 주말농장 중심으로 운영되며, 짧은 기간 채소를 심고 수확하는 방식이 많다. 이웃과의 교류나 생태적 가치를 담아내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도시농업이 단순한 체험을 넘어 교육과 공동체 형성의 장으로 확장된다면, 그 안에서 아이들과 시민 모두가 농업의 본질적 가치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도시에서 아이를 키우며 느낀 점도 그와 닮아 있다. 자연 체험은 많지만 농업에 대한 교육은 거의 없다. 토마토를 심고 수확하는 활동은 있어도, 농업이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농업은 단지 체험의 도구로만 쓰일 것이 아니라, 생명과 환경, 공동체를 이해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체험을 넘어, 지속가능한 삶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도록 교육이 뒷받침되면 좋겠다.
  먹는 데 진심인 프랑스는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농업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나라다. 특히 프랑스의 학교 급식 문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학교는 지역 농산물과 식생활 교육이 결합된 교육의 현장이다. 아이들은 한 끼 식사를 통해 농업과 지역의 관계, 먹거리의 생산과 소비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학교가 지역 생산자와 협력하는 구조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농민에게는 판로를, 지역에는 순환을 이뤄지도록 한다. 이처럼 프랑스의 농업 교육은 농사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체 사회와 지역 공동체를 엮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시민 교육들은 공통적으로 먹고, 만들고, 함께하는 일상적 활동을 통해 농업을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농업은 사람과 자연, 지역 공동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온몸으로 배우는 공간이자, 공동의 책임을 실천하는 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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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내가 귀농한 경남 고성군의 시골 풍경. ⓒ이지현

‘농민’, 존중받는 이름
  농민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먼저 농업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안 되면 농사나 짓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농업이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 고려하는 ‘차선책’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농업은 단순히 땅을 일구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날씨의 흐름을 읽고, 흙을 다루며, 생명을 기르는 이 일에는 고도의 감각과 끈기,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농업은 생계를 위한 수단인 동시에, 사람과 자연, 지역을 잇고 먹거리와 환경, 지역의 안정을 함께 지탱하는 삶의 기반이 된다. 그 무게를 온전히 바라보려는 사회의 따뜻한 시선과 관심이 더해져야 한다.
  현장에서 마주한 우리나라의 농업 교육은 다양한 시도들이 흩어져 있어, 이를 조금 더 체계적으로 연결해주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농민 스스로도 배우고 성장하려는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한다. 지금의 교육 체계 속에서는 농민 각자가 더 지혜롭게 방향을 설정하고, 기술뿐 아니라 경영과 유통, 생태적 감수성까지 아우르는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농업의 환경은 빠르게 바뀌고 있고, 농민도 그 변화에 함께 나아갈 준비가 필요하다.
  이러한 배움과 축적된 경험이 쌓일 때, 비로소 자긍심도 단단해진다. 농민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 품격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을 거창하게 꾸미기보다는, 일상의 언어로 담담히 전하고 소비자와 자주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농업의 가치를 가장 진실하게 전하는 방식일 것이다. 소비자들은 농부의 이야기를 통해 계절의 변화, 작물이 자라는 시간, 농촌의 일상을 함께 느낀다. 그런 이야기는 농부만이 전할 수 있는 삶의 기록이자, 진짜 목소리다. 그 이야기를 세상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농민에게 주어진 가장 특별한 특권이 아닐까.

5필자 이지현: 다예팜 대표
농학을 전공하고 농촌진흥청 산학연 과정을 통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농업기술진흥원에서 근무했다. 대학 시절 배운 농업의 공익적 기능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가치를 마음에 품고, 2022년 남편의 고향인 경남 고성군으로 귀농했다. 지금은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며,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실천하고자 삶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