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농업·농촌은 유럽연합(EU)의 공동농업정책을 바탕으로, 농업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변화하고 있다.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현장에서 만난 다양한 주체들의 연대와 협력,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의 힘, 그리고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 정책 등을 2025년 대산농업연수에 참여한 연수자의 시선으로 담아냈다. [편집자 주]
– 유럽 현장에서 작동하는 구조
글 추수진
참 신기한 일이다. 흔히 선진국을 이야기할 때는 미국을 가장 먼저 언급하지만, 농업 선진국을 이야기할 때는 미국뿐 아니라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가 모두 등장한다. 선진 사례를 탐색하려는 농민, 정책 담당자, 농업·농촌 연구자의 눈은 늘 유럽을 향해 있다. 미국, 호주와 같이 넓은 면적을 활용하는 조방농업(Extensive Farming) 대신 네덜란드, 덴마크와 같이 좁은 면적에 노동력과 자본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집약농업(Intensive Farming)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여건상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유럽 농업을 동경하는 사람이 많다. 어딘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 한국에는 없는 어떤 특별한 시스템이 그곳에는 있을 거라는 믿음이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사실 유럽의 농업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 속에는, 어떤 ‘결핍’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어떤 제도, 문화, 철학을 이미 실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유럽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단순한 결과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가진 정책의 작동 방식, 즉 제도가 사람, 공동체 그리고 환경을 움직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2025년, 대산농업연수를 통해서 그 작동 방식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잘 알려진 사례들이었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것은 사례의 외형이 아니라 ‘정책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였다.
감시보다 신뢰로, 규제보다 설계로
네덜란드 북부의 프리슬란트 자연경관보존협회(Vereniging Noardlike Fryske Wâlden, NFW)는 정부가 지정한 자연보호구역 내 농민들로 구성된 민간협회다. 이곳은 유기농 인증이나 강제적 규제 대신 자발적 협약과 일정한 규칙, 성과 점검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 협회에 속한 농가는 자연보전 목적의 경관형 농법을 실천할 경우, 유럽연합 공동농업정책(EU CAP)을 통해 목적형 보조금을 지원받는다. 보조금은 작물 생산이나 수익 사업이 아닌 자연경관 보존 활동에만 사용할 수 있으며, 관리·인증·성과 점검 등은 협회가 자율적으로 운영한다. 정부는 일일이 농민을 규제하지 않는 대신 단체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지원의 구조를 설계했다. 농민들은 공공재인 자연과 경관을 보존하고 개선하는 역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으며, 이들에게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강한 동기로 자리 잡고 있다.
같은 네덜란드의 위스 호프 농장(Ús Hôf)은 민간이 자발적으로 환경 기반의 농업을 재설계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농장은 토양 건강을 중심으로 한 퍼머컬처(Permaculture) 농업을 실천하고 있는데, 유럽의 대표적인 공동체지원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CSA) 모델과도 연결되어 있다. 퍼머컬처 농업의 가치를 공감하는 소비자들은 이 농장의 회원이 되어 원하는 작물을 직접 수확하고, 요리 행사, 토론, 공동 식사 등 공동체 활동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친환경농업의 실천을 확산하고 있다.
또한,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아발론 재단(Avalon Foundation)은 국제 유기농업과 친환경농업을 활성화하는 조직으로 정책 자문, 시범농장 운영, 농민 교육 등을 통해 지속가능한 농업 전환을 지원한다. 아발론 재단은 정부가 설계한 조직은 아니지만, 이들이 설계한 환경 중심 농업 모델은 오히려 공공보다 앞서 있고 생명력이 느껴진다.
유럽이 한국과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는 점은 공공이 직접 개입하기보다 실천을 유도하고 촉진하는 다층적 협의 구조를 설계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신뢰와 협약 기반으로 프리슬란트 자연경관보존협회를 통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위스 호프 농장에서는 정부의 제도 밖에서 철학적 농업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중간조직 기반의 실행 구조가 작동된다. 한국에도 친환경농업 직불제, 로컬푸드 직매장·공공급식 연계 사업 등 여러 지원 제도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정부 주도의 일률적 기준과 사후 보상에 의존하고 있어 농민의 자발성과 지역의 차이를 반영한 실천 구조로 나아가기에는 제도적 설계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즉, 정책은 있으나 제도적 설계가 부족하다는 점이 유럽과의 가장 큰 차이다. 자연을 보존하고 환경친화적 농업을 유도하는 정책은 신뢰와 자율적 구조를 통해 훨씬 강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진입 장벽을 낮추는 ‘정책적 구조화’
독일 바이에른주 켐프텐시에는 3년제 공립 직업고등학교인 켐프텐 농업직업학교(Staatliche Berufsschule III Kempten)가 있다.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는 ‘듀얼 시스템’으로 운영되며, 학생들은 2년 차부터 마이스터 농가에서 실습 교육을 받게 된다. 국가에서 교육비를 전액 지원받으며, 실습농장에서 소정의 임금을 제공받는다. 졸업 후에는 ‘농민 자격증’을 획득하여 전문 농장 경영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는 농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직업군으로 제도화하는 정책적 기반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남부 가이약의 레소르 마레셰(L’Essor Maraîcher)는 유기농 실습농장이다. 유기농업을 희망하는 신진 농업인들이 마음껏 배우고 경험할 수 있도록 지역 행정조직(코뮌, Commune)과 커뮤니티(Galliac-Graulhet)가 농지와 보조금을 제공하고, 농업회의소와 중간지원조직인 아데아르트(ADEART)는 기술과 종자를 지원하며, 프랑스 공동체지원농업 모델인 아맙(AMAP) 네트워크는 유통과 판매를 연결해 준다. 유기농업에 관심 있는 누구에게나 1~3년간 직접 작물 생산과 직거래까지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창농 지원이 아니라, 공공이 농업으로의 진입 경로를 설계하고 기회를 제공하여 위험을 완화한 구조다.
프랑스 캉탈 지역의 가엑 소농장(GAEC des Prairies)에서는 농부 3명이 공동으로 236ha의 초지를 관리하며 소와 돼지를 방목 사육하고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협동조합 모델인 공동농업그룹 가엑(GAEC)은 농민 2~10명이 토지, 노동, 자본, 농기계 등 핵심 투입재를 지분 투자의 개념으로 공유하고 농장을 공동으로 운영하여 수익을 나누는 구조이다. 우리가 방문한 농장도 기존 멤버가 은퇴하면서 젊은 청년이 새로운 가엑 멤버로 들어오게 되었다. 기존 멤버들은 신규 멤버의 지분 인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소유하고 있던 농기계를 농기계공동이용협동조합(CUMA)에 처분하여 농장의 자본 크기를 축소시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세대 전환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누가 세대 전환이 가능한 구조를 설계했는가’이다. 유럽 교육 정책, 프랑스 커뮤니티와 협동조합 체계에서 정부는 소농과 청년농의 농업 진입과 승계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전면에 나서는 것은 농민과 커뮤니티다. 한국도 청년후계농 영농정착 지원사업을 통해 일정 기간 동안 생활 자금과 시설 지원을 제공하고, 청년농부사관학교를 통해 농업 교육과 현장 실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귀농귀촌종합센터는 다양한 정책 정보를 제공하는 창구 역할을 하지만, 각각의 부처와 지자체별로 흩어져 있다는 점이 아쉽다. 정보 접근성과 정책의 차별성이 부족하고 비슷한 지원 제도들이 많아 혼란스럽다는 평가도 있다. 유럽에는 ‘진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입을 구조화한 제도 설계가 있다.
농업의 경제적 지속가능성, 구조화된 설계가 필요하다
독일 바이에른주 알고이에 위치한 히르시 휴가농장(Ferienhof Hirsch)은 조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농가민박으로, 90년대 후반 켐프텐 식품농업청이 관리하는 농가에서의 휴가 협회(Urlaub auf dem Bauernhof, MIR ALLGÄUER, 이하 협회)에 가입하여 운영되고 있다. 협회는 회원 농가에 맞춤형 교육, 인증, 안전 점검, 홍보·마케팅 패키지를 제공하며, 농가는 체험과 숙박, 농업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어낸다. 협회는 켐프텐 식품농업청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는데, 식품농업청이 제공하는 전문적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농가민박의 수준을 높여준다. 히르시 휴가농장은 협회에 가입한 이후 숙박 본연의 임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방문객 역시 다양한 체험활동과 콘텐츠를 제공받게 되어 만족도가 높아졌다. 핵심은 공공과 협회가 구조화한 플랫폼 위에서 민간이 주체적으로 운영한다는 점이다. 수익은 민간의 몫이지만, 설계는 공공이 함께한다.
라이자흐 농가(Reisach Früchtegarten)도 농가에서의 휴가 협회 회원이다. 이 농장은 친환경과일·채소 생산, 농장 체험, 농산물 가공, 로컬매장을 통한 직거래, 숙박시설, 레스토랑·카페 등을 종합적으로 운영하는 6차산업 농장이다. 주 소비자층은 인근 도시의 중산층 가족으로, 주말마다 아이와 부모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농장주는 독일의 농업직업학교를 졸업한 마이스터로, 인근 지역의 생산-소비 구조를 파악하여 전통적인 낙농업에서 과채 작물로 전환하여 안정적인 소비자를 확보하고 2차, 3차까지 비즈니스를 전략적으로 확장시킨 혁신적인 승계농이다.
유럽 농업의 경제적 지속가능성이란 단순히 ‘수익이 나는 구조’가 아니라, 그 수익이 정기적으로 보장되고, 제도적으로 보호되는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농가는 생산과 숙박시설 운영 등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고, 공공은 인증, 관리, 교육, 서비스 제공 등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실현 가능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농촌유휴시설 활용사업, 농촌융복합산업(6차산업) 인증제도, 농가민박 활성화 정책 등이 있지만, 중간조직이나 협회 중심의 구조화된 설계는 아직 부족하다. 이에 따라 정책의 파급력도 낮고, 농업의 다차원적 가치를 확장하거나 농가 소득으로 연결되는 데 한계가 있다.
정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되도록
우리는 유럽의 농업을 부러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유럽에는 한국에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부러워해야 할 것은 성과가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정책과 제도를 작동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 구조가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에도 정책은 있다. 친환경농업 육성도, 청년농 지원도, 농가민박 자금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하는 것’과 ‘작동하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있다. 유럽의 사례는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공공이 얼마나 물러나야 하고,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지속가능성은 결국 정책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정책은, 사람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완성된다.
이 세상에 나쁜 정책은 없다. 그 대상과 수단에 틈새가 있을 뿐이다. 친환경농업 정책이 더 확산되려면, 청년농 지원 정책이 더 실효성을 가지려면, 농가민박 지원 정책이 더 활성화되려면 현장 구조를 역동적으로 그려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공공과 민간의 역할을 이분법적으로 가르기보다는 이해관계자 간의 역할을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지금 한국의 농촌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농업의 지속가능성은 더 빠르게 위협받고 있다. 정책은 그 속도를 조절하고 방향을 조정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느끼는 결핍은 어쩌면 정책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작동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 유럽의 정책은 현장과 사람 속에 스며들어 있다. 사람이 먼저 움직이고 공공은 그 흐름을 뒤에서 조용히 지원한다. 그 안에는 공동체를 존중하는 문화, 느리지만 지속되는 합의, 그리고 농업을 ‘직업’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는 철학이 있다.
필자 추수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2015년부터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서 농업혁신시스템 기반의 농업 R&D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스마트농업, 식량안보, 디지털농촌, 지역특화작목 등을 주제로 R&D 거버넌스, 성과 분석, 효율성 개선 등에 대해 연구해 왔으며, 최근에는 농촌공간재생, 청년창업과 관련된 연구에도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