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농업·농촌은 유럽연합(EU)의 공동농업정책을 바탕으로, 농업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변화하고 있다.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현장에서 만난 다양한 주체들의 연대와 협력,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의 힘, 그리고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 정책 등을 2025년 대산농업연수에 참여한 연수자의 시선으로 담아냈다. [편집자 주]
글·사진 안정화
농사란 무엇일까
철 따라 씨앗을 심고 거두며 농사의 의미를 생각한다. “곡류, 과채류 따위의 씨나 모종을 심어 기르고 거두는 따위의 일.” 사전적 의미의 농사는 단순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에서 농사는 직업이고, 식량생산이라는 사회적 책임이 되기도 하며, 돈을 버는 방법이었다가,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되기도 한다.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텃밭 농사가 재미있었다. 땅에서 내 삶에 필수적인 것을 생산하는 충족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땀을 흘리는 즐거움, 낯설었던 채소를 요리하며 내 삶의 영역이 조금씩 넓어지는 기쁨. 그리고 우리 삶의 더 많은 부분을 농사와 연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짝꿍 신범의 말처럼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땅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작물을 돌보는 일이다. 아무리 멋진 말로 표현해도, 본질적으로 농사는 몸으로 하는 고된 노동이다. 몸을 써서 흙을 일구는 직관적이고도 본능적인 노동. 그럼에도 그것이 사람에게 주는 기쁨과 만족은 그 노동의 직접적인 결과를 웃돈다. 어째서일까.
대산농업연수에 합류하다
짝꿍과 함께 종합재미농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농사를 지은 지 9년째. 소농, 토종, 다품종 소량생산. 우리의 농사를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즐거움이 경험이 되고, 경험이 쌓이면 자신감이 생길 줄 알았는데, 답답함은 늘어가고 갈증이 생긴다.
운 좋게도 2025년 대산농업연수에 함께하게 되었다. 가족농, 소농의 키워드를 가지고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를 다니며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농사를 짓는 농부들을 만났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환경, 다른 역사 안에서 만들어가는 농부들의 공동체와 농장 운영 방식을 보며 놀라고 감동했다. 그 중 사람들과 꼭 이야기 나누고 싶었던 공동체 농장 세 곳을 소개해본다.
지속가능한 농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위스 호프 농장
네덜란드에서 만난 위스 호프 농장(Ús Hôf)은 퍼머컬처 방식으로 디자인한 2ha 규모의 작은 농장이다. 퍼머컬처는 ‘퍼머넌트 어그리컬처(Permanent Agriculture, 영속적인 농업)’의 줄임말로 자연과 인간이 지속가능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식을 제안하는 생태적 디자인 시스템이다. 퍼머컬처에선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의 방식을 모방하여 농지나 삶의 방식을 설계한다.
위스 호프 농장을 운영하는 부부는 촘촘한 점토질 토양과 변화하는 기후에 적합한 농사 방식을 찾아 여러 시도를 해본 후, 현재는 밭의 물 빠짐을 위해 인공적으로 높이차를 크게 만드는 네덜란드 전통 방식인 에커(Eker) 형태로 밭을 만들었다. 에커는 둔덕 모양의 넓은 두둑으로, 양쪽 끝과 가운데의 높이차로 인해 물이 자연스럽게 고랑으로 흘러내린다. 농장에는 여러 개의 에커가 줄지어 있다. 그 중 일년생 채소를 심는 구역이 있고, 옆의 구역에는 산딸기나 베리류 덤불이 있었다. 구역이 나뉘는 경계에는 나무를 심었다. 이러한 조합을 반복하여 농장에 생물다양성을 증가시켰고, 이러한 다양성으로 인해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병과 해충이 줄어든다고 농부는 말했다.
농장은 공동체지원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CSA)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회원들은 농사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한다. 농장 행사에도 참여하고, 농사일도 함께 하고, 매주 받는 채소 꾸러미를 직접 수확하기도 한다. 1년을 함께 보내며 농사가 잘되면 잘 되는 대로, 이상기후로 수확이 별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 결과물을 함께 나눈다. 농부는 회원들이 내는 회비를 통해 안정적으로 농사를 계속해나갈 수 있다.
위스 호프 농장에서는 2ha 땅에서 전일제 농부 1명과 반일제 농부 1명이 회원 200명의 농산물 꾸러미를 생산하고 있다. 규모를 생각하면 매우 집약적이며 생산성이 높은 농장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다. 두 농부는 가족의 노동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작은 규모로 시작해서 조금씩 농장을 늘려갔다. 그 과정에서 유기농 농부와 자원봉사자를 연결하는 우프(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 WWOOF)를 통해 만난 사람들도 큰 도움이었다고 한다. CSA 회원들도 자원봉사자로서 농사일을 함께하며, 회원 중 일부는 직접 농장에 와서 자신의 꾸러미를 수확해 간다. 물론 이미 포장된 꾸러미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농장에 와서 수확하는 사람들은 정말 이 농장을 자신의 농장이라 생각한다”라는 브레혀 하멀링크(Bregje Hamelynck)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농장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처음에는 농부를 믿어주는 소비자 회원에게 감탄했고, 그다음에는 회원을 믿는 농부에게 놀랐다. 함께하는 관계는 서로에 대한 믿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농부가 되기까지
위스 호프 농장을 운영하는 부부가 그랬듯이, 경험이 없는 사람이 지역에 이주하여 농사를 시작할 때는 많은 시행착오가 일어난다.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위기 속에 더욱 예측할 수 없는 어려움이 나타난다. 그뿐인가. 농지의 가격은 점점 올라가고, 인구가 감소하는 지역의 인프라는 점점 줄어든다. 돈을 벌기 위해선 더 큰 규모의 농사를 지어야 하고, 기계와 시설, 전문 지식의 필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들을, 우리를 농사로 이끄는 것일까.
사람이 혼자 살아갈 수 없듯이 농부도 그러하다. ‘농부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며 동시에 농부가 아닌 사람들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포함한다. 농장을 지지하는 200명의 회원과 농장을 오가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이 질문의 대답 같기도 하다. 위스 호프 농장의 두 농부가 만들어내는 신뢰의 공동체를 보며 농사 그 너머를 상상해본다.
시민들이 말하는 우리의 땅, 란트 판 온스
네덜란드어로 ‘우리의 땅’이라는 의미의 란트 판 온스(Land van Ons)는 환경보호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모토로 2019년에 설립된 시민협동조합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조합이 아니라 “시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농장을 함께 운영한다”라는 말은 조금 낯설다. 농장의 공동생산자도, 소비자도, 유통업자도 아닌 시민들은 농장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란트 판 온스는 네덜란드의 농업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1950년 이후 ‘규모화’라는 엄청난 변화를 통해 네덜란드에서는 농부의 수가 줄어들고 농지의 단위 면적이 커졌다. 농축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기계화와 자본집약화의 결과로 현대 네덜란드 농업은 면적당 생산성이 굉장히 높다. 하지만 농업으로 인한 환경오염과 대규모 단작으로 인해 생물다양성이 감소하고, 네덜란드의 고유한 자연경관이 사라지는 등 농업이 초래하는 환경 문제들이 발생했다. 란트 판 온스에서는 더 이상 이런 방식의 관행농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농업의 변화를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대부분의 농지는 소유주에 의해 농사 방법이 정해진다. 란트 판 온스에서는 여기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아냈다.
“시민들이 직접 농지를 소유하여 그 땅으로 무엇을 할지 직접 결정한다.”
란트 판 온스의 조합원들이 매해 내는 30유로의 회비 중 10유로는 1㎡의 농지를 구입하고, 20유로는 마케팅, 전문가 자문, 토종씨앗 구입 등의 활동비용으로 쓰인다. 즉, 조합원이 되면 1㎡ 땅의 소유주가 되는 셈이다. 조합은 농지를 소유하고 그 땅의 생물다양성을 살리기 위해 관리한다. 농지는 유기농을 원하는 농부에게 빌려준다. 란트 판 온스에서는 농지의 생물다양성을 지지하며 자연을 활성화하는 방식으로 영농 계획을 세우고, 땅을 빌린 농부와 조율하며 실천한다.
2025년 현재 조합원 수는 3만 명이 넘으며 보유한 농지는 340ha가 넘는다. 330명가량의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로 조직의 실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나열된 숫자만으로도 대단한데, 소유한 토지의 생물다양성을 구체적으로 측정하여 조직의 성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설명을 들은 후, 란트 판 온스와 함께하는 하셀트 목장을 방문하였다. 자신의 농장을 친환경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넘기고 은퇴하고 싶은 농부, 돈이 없어 농지 구입은 어렵지만 친환경농사를 짓고 싶은 젊은 농부가 이 협동조합을 통해 연결되었다. 대개 농촌 지역에는 농사를 물려받을 젊은이가 부족하고, 농사를 짓고 싶은 젊은이는 땅을 구입할 돈이 부족하다. 란트 판 온스는 그 둘의 중간 역할을 하며 생태적인 가치를 녹여낸 시스템을 만들고 있었다.
목장을 이어받은 노벌트 씨는 기존에 그 땅에서 농사짓다 은퇴한 프레디 씨에게서 농사를 배우기도 하며, 두 가족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연수단이 농장을 방문했을 때 두 가족 모두가 나와서 반겨주었다. 두 농부가 함께하는 모습을 보니 한국에도 이런 중간 역할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농부, 두물뭍농장의 친구들
신범과 함께하는 종합재미농장 외에 일주일에 두 번 다른 농장에 간다. 농사를 시작할 때부터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농사로 돈을 벌기는 힘들 것 같아 양평 지역에서 돈을 버는 다른 일을 조금씩 해왔고 6년 전부터는 두물뭍농장에서 농사 안내자로 일하고 있다.
두물뭍농장은 다양한 토종씨앗을 심고 있는 공동체 농장이다. 15명 안팎의 사람들이 모여 1년 동안 함께 손으로 일구는 제철농사를 짓는다. 이곳의 구성원들이 땅을 소유하거나 개인밭을 분양받은 것은 아니지만, 농장 운영에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농작업을 하고 있다. 두물뭍농장은 어떤 고정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함께 만드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 내게는 ‘함께’의 의미를 계속 배우게 되는 곳이다. 텃밭 경험이 있는 사람과 아예 아무것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작업을 규격화하고, 구성원들의 상태를 관찰하여 작업에 배치한다. 나와 짝꿍 둘이 하는 것이 더 빠를지라도, 다들 함께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고민한다. 힘든 작업을 해내는 뿌듯함에 더해 다양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길 바라며.
헤런부런에서는 우리 모두 농부
“함께 지속가능한 음식을 생산하자.”
헤런부런(Herenboeren)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된 더 나은 농산물을 원하는 시민들의 모임으로, 조합원들이 공동생산하고 공동소비하는 생산소비협동조합이다. 2018년에 처음 설립되어 지금은 네덜란드 전역에 23개의 농장이 있다. 우리는 그중 하나인 그로데 모더콜 농장(Groote Modderkolk)을 방문했다. 이곳은 300가구의 조합원과 2명의 전문농부가 함께하는 18ha 규모의 농장이다. 조합원들은 매주 채소 꾸러미를 받는 소비자이며 농장을 함께 꾸려가는 주체이기도 하다. 출자금을 내고 조합원으로 가입하며 경영자로서 농장을 함께 운영한다. 또, 매달 회비를 내고 채소 꾸러미를 받는데 이렇게 내는 월회비로는 농장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한다.
조합에서는 농부를 고용하여 전반적인 농사 관리를 맡긴다. 고용된 농부들은 전문 농업경영인으로 농사 계획을 세우고 조합원들에게 작업 지시를 한다. 잠깐 들어간 사무실 벽에는 작물 달력과 농장 지도가 붙어있었다. 두물뭍농장에서 공유하는 농장 지도, 작업 계획 등을 떠올리며, 정확히 지시해야 작업이 제대로 진행된다는 설명에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자들을 위한 농장 소개 또한 조합원이 진행하였다. 조합원들의 환대 속에서 그들의 주인의식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조합원들은 목공팀, 작물재배팀, 가축돌봄팀 등으로 나뉘어 농장에 필요한 물건들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농작업을 함께하며, 농장에서 키우는 동물을 돌본다. 조합의 전국 연대조직은 고용한 농부에 대한 노무 업무와 헤런부런에 대한 홍보, 마케팅 등을 맡아 진행한다.
조합원들이 돈을 내고 운영에 참여도 하고 농사일도 한다니. 한 연수자가 뒤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고 놀라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함께 만드는 이런 농장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농장이 운영된다는 것은 200~250명 내외의 농장 회원들이 매주 꾸러미를 받고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이곳에서 계속 생태적인 농업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자기가 먹는 것의 근원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으니, 생산과 소비를 직접적인 가치사슬로 연결해보자는 조합의 시작점 또한 멋진 이야기다. 누구에게서 이 농장이 시작되었는가? 다시 한 번 ‘주체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끝나지 않는 질문을 갈무리하며
네덜란드에서 만난 농부들은 농사를 통해 관계를 만들고, 책임감을 가지고 자연을 돌보았다. 소비자는 농부와 관계를 맺고 생산과 소비에 직접 뛰어들었다. 네덜란드의 시민들은 어떻게 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된 먹거리를 요구하고, 가까운 지역에서 내가 직접 먹거리 생산에 관여하자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농부들은 어떻게 소비자들을 농장으로, 그들의 삶으로 연결할 수 있었을까.
헤런부런도 그렇지만 위스 호프 농장을 보면, 사람들은 농장과의 관계를 통해서 단순히 건강하고 질 좋은 먹거리를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쓰는 공간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란트 판 온스는 어떠한가. 개인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없어도 자연을 보호하고 생물다양성을 회복시키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무엇일까. 자료를 찬찬히 들여다볼 때마다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연수 기간 내내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변화를 만들어낸 그들을 기억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우리는 어떤 농사를 짓고 싶은지, 시민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가고 싶은지. 그리고 우리가 그려낼 빛나는 변화를 다짐해본다.
필자 안정화: 종합재미농장 대표
경기 양평군에서 남편과 함께 종합적으로 재미있는 농사를 짓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두물뭍농장 친구들과 함께 공동농사를 짓는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작은 농사를 사랑하지만 소농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책 《우리가 농부로 살 수 있을까》, 《농사가 재미있어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