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민으로 사는 일
왜 행복할까?
봄이 오는 소리에 씀바귀, 쑥, 달래, 냉이를 캐고 오가피순, 두릅, 옻순, 표고를 따고 머위와 고사리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수십 가지 작물의 씨를 뿌린다. 개복숭아, 매실, 오디, 앵두 등 갖가지 열매로 효소를 담고 감자를 캐고 나면, 밤꽃이 지고 오이넝쿨이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여름부터 9월까지 찰옥수수를 수확한다. 참깨를 털고 김장 배추 무를 심고 나면 환상적인 풍요의 날들이 이어진다. 땅콩, 서리태, 들깨, 호박, 생강, 수수, 팥, 토란, 고추, 호박고구마, 밤, 도토리… 그리고 추수한 벼까지 곳간에 그득 쌓이면 심정적인 부자에서 물질이 더해진 진짜 부자가 된다. 가을바람에 호박, 가지, 토란대, 아주까리, 고추부각을 말리고 항아리마다 장아찌를 담고 메주를 쑤고 김장을 하고 시래기를 널고 곶감까지 깎아 널면 이제 겨우내 놀 일만 남는다. 놀고먹으며 엿기름을 기르고 조청을 고고 강정을 만들고 집간장에 채수 섞어 맛간장도 만들고 들기름 참기름 짜고 가래떡 두어 말 뽑아 먹으며 마을 주민들과 노닥거리다 보면 어느새 파릇한 새봄이 찾아온다. 또다시 대동소이한 농부의 한해살이가 시작된다. 매년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한 번도 지루하지 않고 할 때마다 새롭고 다르다. 해마다 찾아오는 비, 바람, 구름, 달, 해, 별, 흙, 눈, 안개, 서리, 이슬, 나무의 이야기가 매번 다르기 때문일까.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앞둔 2000년 어느 가을날
나는 농부가 되었다.
이성적인 선택이었다기보다는 뜨거운 호르몬 작용의 결과였다. 젊고 건강했고 사랑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도 홀시아버지 모시고 살기가 버거울 때도 처음 해보는 시골살림이 낯설고 힘겹고 외로웠던 모든 순간마다 나는 농장에 있었다. 농장이 나에게 있었다.
시아버지께서 농장 일을 은퇴하고 우리 부부에게 전적으로 맡기면서 우리의 농사법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2006년 제초제 대신 우렁이와 참게를 논에 방사해 짓는 벼농사를 마을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것도 우리 논의 일부만 시험 삼아 해 본 것이다. 결과가 나쁘지 않아 다음 해에는 면적을 늘리고 우리 논과 친구하고 있는 옆 논의 농부들에게 조심스럽게 권유도 했다. 1년에 4번이나 심고 뽑기를 반복하던 총각무도 봄, 가을 두 번만 심고 여름동안은 호밀을 뿌렸다가 수확하지 않고 베어서 밭에 녹비綠肥로 넣었다. 제철도 아닌 여름 무를 재배하면서 무수히 쏟아붓던 농약도 사라지고 땅도 나도 쉼을 갖게 되었다.
열 집이 함께 못자리하면 하루에 최소 10명의 사람이 못자리를 들여다보러 왔다 갔다 한다. 어린모는 10배의 관심 속에 자란다. 급한 일이 생겨 집을 며칠 비우더라도 내 못자리를 관리해 줄 사람이 9명이나 있는 것이다. 돈을 주고 산 일꾼들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주인이기에 내 일처럼 정성을 다하고 서로의 존재가 고맙고 소중하다. 모내기할 이앙기나 추수할 콤바인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머니들은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농촌에서 당당히 농부의 자리를 지킬 수 있고 우리는 농약 치지 않는 이웃이 생겨 진짜 유기농을 꿈꿀 수 있었다.
수천만 원에 달하는 고액의 농기계를 모든 농가가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할 필요도 없는데 특히나 홀로 되어 아주머니 혼자 농사짓는 농가들은 작은 면적의 밭에서 기계 일을 해줄 사람이 늘 아쉽다. 아쉬움과 부족함은 협동을 낳는다. 우리는 공동으로 하는 못자리, 모내기, 추수를 제안했다. 트랙터, 지게차, 트럭을 이용해 힘든 일을 빨리 끝내면 아주머니들은 섬세한 밭일로 대신해주신다. 한 논에 공동의 못자리를 만들었더니 관리도 공동으로 되었다. 예를 들어 열 집이 함께 못자리하면 하루에 최소 10명의 사람이 못자리를 들여다보러 왔다 갔다 한다. 어린모는 10배의 관심 속에 자란다. 급한 일이 생겨 집을 며칠 비우더라도 내 못자리를 관리해 줄 사람이 9명이나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젊고 면적이 큰 농가들은 독립적으로 진행하고 작은 농가들을 모아 우리 집에서 공동으로 못자리를 만든다. 돈을 주고 산 일꾼들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주인이기에 내 일처럼 정성을 다하고 서로의 존재가 고맙고 소중하다. 이리저리 전화해서 모내기할 이앙기나 추수할 콤바인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머니들은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농촌에서 당당히 농부의 자리를 지킬 수 있고 우리는 농약 치지 않는 이웃이 생겨 진짜 유기농을 꿈꿀 수 있었다. 관행으로 농사지을 때보다 수확이 줄고 인공지능 알파고 우렁이가 아닌 이상 알아서 모든 잡초를 먹어주지 않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이 생겨 벼들이 말라갈 때 불평과 원망의 소리도 있었지만 밥맛이 끝내주게 좋아지고 농약 냄새 맡으며 일하지 않아도 되고 공동으로 일하는 재미를 다시 알게 된 어르신들은 세상사 모든 일에 일장일단이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평생 소외받았다 생각한 농부의 길이 농사관련 체험행사의 할아버지 선생님이 되면서 초롱초롱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긍심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제값을 받고 벼를 팔 수 있다는 것, 안정적인 판로가 있다는 것이 유기농을 지속 가능하게 한 힘이었다. 우리는 유기농 쌀의 안정적인 판로를 위해 학교급식으로 공급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현물급식센터를 제안하고 납품자격을 얻어냈다.
그렇게 십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충남 서산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유기농 벼 재배단지가 있는 마을에 살고 있다.
없으니까 특별해?!
처음부터 먹거리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엄마가 되고부터 음식에 관한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임신했을 때 왜 시골은 체인점 음식이 배달되지 않느냐고 툴툴대며 남편에게 피자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흙을 열고 나오는 파릇한 새싹처럼 내 몸을 열고 나온 작은 생명체는 내게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뿌리내린 생명체를 품고 키워내고 바라보는 대지大地처럼 나도 이제 한 생명이 온전히 성장할 때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수천 수만 년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세상을 품어온 흙은 능숙한 엄마이지만 나는 초보이고 그래서 배워야 했다. 세상을 좀 더 자세히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었고 농부여서 참 다행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다른 농촌이 그러하듯 우리 집 근처에도 가게가 없다. 따라서 자연분만 모유수유로 시작된 아이들의 세상살이는 자연히 농장의 먹거리로 허기를 채워야 했다. 물이 최고지만 식혜나 수정과, 각종 효소, 과일즙을 늘 준비한다. 감자, 고구마, 과일, 밤, 옥수수 등 간식거리가 철마다 끊임없이 생산되고 현미로 만든 떡이며 곶감이 냉동실 가득이다. 물론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가공식품을 먹게 되고 때로 열광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미밥과 나물로 차려진 엄마의 소박한 밥상이 주식임을 잊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처럼 그저 평범한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는 유일하게 학원에 다니지 않고 스마트폰이 없고 TV를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별한 취급을 받기도 한다. 왜 없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있는 것이 특별하고 이유가 필요한 것이지 없는 것은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갖지 않은 것이고 필요도 없는데 남들이 다 있다고 갖는 것은 낭비이며 낭비는 대부분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도 안 먹는 우리밀
마을잔치가 있거나 체험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르신들과 옥신각신할 때가 있다. 잔치국수, 부침개 등 음식의 재료인 밀가루, GMO 콩기름, 기본 국물에 들어가는 MSG, 나무젓가락, 종이컵, 접시 등의 일회용품 사용 때문이다. 우리 땅에서 나는 농산물 먹으라고 외치는 농민이 수입밀가루 면으로 국수 끓이고, 일회용품 사용으로 땅을 오염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이미 익숙해진 것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이 일부 어르신들의 주장이다. 소수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물결이 된다고 믿는다. 사라진 우리의 토종 종자들이 다시 생명을 틔울 수 있도록 농부의 식탁부터 바뀌어야 한다.
신채봉을 먹는다
쌀값이 수십 년 전보다 유지는커녕 오히려 계속 곤두박질치는 암울한 시대임을 감안하면 우리집 쌀값은 비싼 편이다. 그런데 꾸준히 우리집 쌀을 사가는 사람들이 있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 많은 수는 아니지만, 이들은 고객이 아니라 가족이다. 대한민국에 남아도는 것이 쌀인데 뭐가 특별하다고 우리 쌀을 찾을까. 이들이 소중한 이유는 농부의 가치를 함께 먹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오직 유기농 농산물만이 최선이거나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기농을 먹어야만 건강하고 오래 사는가? 그렇지 않다. 무엇을 먹든 모든 인간은 결국 종래에는 늙고 병들어 죽는다. 유기농의 정의나 인증기준에 관한 논쟁은 차치하고, 화학과 멀어지고 자연에 가까워지기 위한 소비자와 농부의 시도와 노력은 큰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고 끊임없이 소유 약탈할 수 있는 무법자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는 평화의 과정이며 우리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협동과 나눔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부족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시간이다. 내가 떠난 뒤에도 우리 아이들이 계속 농사를 지으면서 살 수 있도록 터를 닦는 일이다.
근대화 이후 한국의 농업은 성장의 논리 속에서 끊임없이 희생당해 왔다. 개방농정으로 농산물은 팔리지 않고 작은 농가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쌀 수입 반대를 외치던 할아버지 농민은 경찰이 쏜 물대포에 의식을 잃고 농산물은 수입해서 먹을 테니 농촌은 문화를 팔아먹고 살라 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마을사업에는 진정 농촌의 가치와 철학이 있는가?
성장은 끝났다. 지구가 음식물 쓰레기로 뒤덮이고 있는 시대에 내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고 무엇을 먹고 먹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기 위해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필요 이상의 것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성장이 아닌 필요한 만큼을 조화롭게 나누는 진짜 성장을 기대한다.
※필자 신채봉: 16년 차 농부. 농사짓고 살기 전에는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지하철로 출퇴근하던 서울사람. 충남 서산에서 유기농 벼 외에 다양한 밭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는 ‘조은씨앗’ 농장의 안내자. 아이들이 자라서 행복한 농부가 될 수 있도록 터를 닦는 일이라면 물불을 안가리고 뛰어드는 용감한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