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연구사
완주로 가는 고속도로엔 내내 햇볕이 넉넉했는데, 어느새 먹구름이 꾸역꾸역 몰리더니 급기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회색 구름이 덮은 어둑한 하늘, 땅에 바로 내려앉지 못하는 솜털 같은 눈. 농촌진흥청 농업과학원에서 우리를 맞이한 여수환 연구사(제25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업공직 부문 수상자)는 오늘 눈이 ‘제대로 내린’ 첫 눈이라고 했다. 이날 사진에도 ‘첫’눈이 담겼다.
사라진 자산, 발효종균을 찾다
여수환 연구사는 12년째 ‘토착 발효 종균’을 연구한다. 언뜻 낯설어 보이지만, 발효 종균은 우리가 늘 먹는 된장 고추장 같은 장류와 술, 식초 같은 발효 식품을 만들어주는 효모, 곰팡이, 유산균, 초산균과 같이 유용한 미생물을 말한다. 종균이 없으면 애당초 발효식품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 발효 종균 시장은 대부분 외국산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술인 막걸리도 마찬가지다. ‘국내산 쌀’로 만드는 막걸리도 대부분 발효 종균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백국균이나 수입 빵 효모를 사용한다. 일본산 백국균은 균일한 맛을 내고 술 만들기가 쉬워서, 수입 빵 효모는 가격이 저렴해서 찾는다. 막걸리 수요가 늘면서 종균 수입도 10년 새 2.5배 이상 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전통 누룩으로 만들던 우리 술의 다양한 풍미는 찾기 어려운 게 당연한지 모른다. 근현대사 속에서 사라진 소중한 유형무형의 자산들. 그중 하나가 ‘발효 종균’이다.
국산 종균, 발효식품 산업을 바꾸다
“토착 발효 종균을 찾아내는 일은 민간이 하기 어렵습니다. 인프라와 시설장비 등 투입비용이 많습니다. 기업체 입장에서는 로열티를 주고 쓰는 것이 더 낫지요. 국가에서 좋은 종균을 개발해 산업체에 이전하고 보급해주는 것이 개방화 시대를 대비하는 길입니다.”
여수환 연구사는 2006년부터 10여 년의 연구 끝에 토착 발효 미생물 225주를 선발하고, 특히 우수한 특성을 지닌 14종의 토착 발효종균을 발굴과 함께 언제 어디서라도 일정한 맛이 나올 수 있도록 종균 안정성을 확보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특히 과일 향과 산 생성기능이 뛰어난 발효종균을 이용해 고급 탁주와 산 생성이 9.3%로 시판 과일 식초보다 두 배 이상 우수한 초산균을 제조했다. 이 과정에서 알코올과 초산을 분리하여 고품질 발효식품을 만드는 ‘2단 발효 공정 기술’은 전통주와 농가형 발효식초를 만드는 농민과 산업체에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현재 여 연구사가 기술을 이전한 농가를 포함한 농산업체는 32개. 이들은 ㈔한국천연발효식초생산자협회와 농산업체 협의회 등 자체적으로 모임을 구성하고 농민과 소비자를 위한 정보 교류를 하고 있다.
“현장에서 필요한 연구를 하기 위해 현장 목소리를 들으려고 교류합니다. 현장 애로사항도 듣고, R&D 정보도 공유하고, 마케팅 기법 같은 것도 배우도록 합니다.”
종균 자주 독립,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길
전 세계적으로 생물자원, 유전자원에 대한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고, 자국의 생물자원을 보존하려는 노력 또한 거세지고 있다. 2014년 10월 유전자원 등 접근과 이익 공유에 관한 ‘나고야의정서’가 발효되면서, 생물자원 확보에 대한 국가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종균의 국산화와 토착 발효 종균을 발굴, 보존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또 한 가지, 고품질 발효 식초 제조기술은 오랫동안 식용으로 쓰이던 빙초산을 식탁에서 치울 실마리를 준다.
“우리가 단무지, 양파에 뿌려 먹는 빙초산은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독극물로 지정이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만 식용으로 쓰이죠. 업계 로비 탓도 있고 그 강한 신맛에 익숙해진 소비자의 입맛 때문입니다. 사실 빙초산은 세척용으로 더 적합하지요.”
결국은 3농, 사람 사는 농촌을 만든다
여수환 연구사가 바라는 최종 목표는 농민과 농촌, 농업이다. “기업이 우리 농산물 소비에 앞장서고 우리 농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것이 상생”이라고 강조하며 농업과 지역 활성화를 위한 방안도 이야기한다.
“농업·농촌·농민 3농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좋은 종균과 지역의 농산물이 함께 가야 합니다. 한집에서 술을 빚으면 그 옆집에서 식초도 생산하고, 민박과 식당도 있어 먹거리, 놀거리, 살거리의 유기적인 네트워크가 갖춰지면 지역 안에서 돈이 순환하고 경제가 활기를 띠게 됩니다. 일본의 가고시마 현 흑초단지 마을처럼, 농민이 중심이 되는 세계적인 발효마을이 만들어질 수 있겠죠.”
인류가 발견한 건 고작 1%,
미생물의 무한한 가능성
“새로운 미생물을 찾는 작업은 단순한 반복 작업이고 선발하기가 쉽지 않아 흔히 모래 속에서 보석을 찾는다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수많은 미생물이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인류가 현재까지 발견한 미생물은 전체의 1%도 안 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99%의 미생물은 앞으로 많은 산업과 환경보호 등에서도 그 쓰임새와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작은 미생물이지만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발효 종균. 여수환 연구사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빙산의 일각’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새해, 1%의 현재가치와 99%의 미래가치를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그 속에서 ‘농업’의 가치가 함께 빛날 수 있도록.
글 신수경 편집장 / 사진 김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