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4500송이, 기적이 아닌 땀의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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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현 도덕현유기농포도원 대표
(제31회 대산농촌상 농업경영 부문 수상자)

  빗방울이 토도독, 비닐하우스를 두드리는 여름날이었다. 도덕현 씨를 따라 포도덩굴 속으로 들어가 고개를 드니, 녹색 잎사귀로 엮어진 조각보가 드넓게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그 틈새로 머루포도, 샤인머스캣, 알렉산드리아, 블랙사파이어 등 갖가지 포도가 보석처럼 조롱조롱 달려 있었다. 포도나무가 힘껏 손을 뻗어 선물을 건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포도알을 한입 깨무는 순간, 달큼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아내 홍일순 씨는 부지런히 포도를 수확하고 깨끗하게 손질해서 소비자에게 보낸다.
아내 홍일순 씨는 부지런히 포도를 수확하고 깨끗하게 손질해서 소비자에게 보낸다.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
샤인머스캣.
샤인머스캣.
블랙사파이어.
블랙사파이어.

치열하게 이뤄낸, 농민이라는 꿈
  “친구가 과수원집 딸이었어요. 우리는 비싸서 먹지도 못하는 사과를 날마다 먹고 있으니까 너무 부러운 거예요. 내가 크면 과수원 주인이 되어서 맛있는 사과를 실컷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읍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도덕현 씨는 ‘먹고살기’ 위해서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했다.
  “동네에서 우리 집이 제일 가난했어요. 상이용사인 아버지는 농사짓기 어려운 상태였고, 식구들은 밥을 굶다시피 하고 살았죠. 한 10살부터 스스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아이스께끼 장사도 했어요. 어깨에 통 메고 다니면서요. 중학생 때는 냇가에서 뱀장어, 미꾸라지를 잡아서 팔기도 했고요, 고등학생 때는 망에다가 사과를 넣어서 팔았어요.”
  성인이 된 그는 고창에서 과일을 유통했다. 맛있는 과일을 찾아서 10여 년간 전국을 다니면서도, 그는 농민이 되겠다는 오랜 꿈을 잊지 않았다.
  “1994년에 사과나무가 심어진 과수원을 샀어요. 처음부터 유기농을 하고 싶었는데, 사과나무에는 농약을 많이 쳐야 했어요. 들어가는 돈에 비해서 남는 것도 별로 없는 거예요. 사과밭 옆에 있던 조그만 감밭을 키우는 게 낫겠더라고요. 그래서 사과나무를 싹 없애고, 그 자리에 감나무를 심었죠.”
  당시에는 저농약인증제도가 있었다. 그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기준치의 절반 이하로 줄인 저농약으로 감을 재배하면서, 전국친환경농산물품평회에서 두 차례 상을 받기도 했다. 감밭 한쪽에는 포도나무를 키웠는데 열매가 500송이씩 열리는 것을 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2005년 4월에 심은 포도나무 4그루가 약 3300㎡(1000평)를 차지하고 있다.
2005년 4월에 심은 포도나무 4그루가 약 3300㎡(1000평)를 차지하고 있다.

거목으로 키우는 진짜 비결
  “포도나무가 가진 힘이 너무 좋은 거예요. 이것을 억제하지 않으면 더 큰 나무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쯤 일본에 있는 포도나무에 열매가 3000송이 달렸다는 뉴스를 들었어요. 다른 사람도 하는데 내가 못 할 이유가 없겠다 싶었죠.”
  2005년 4월, 그는 번식력이 강한 야생 머루포도 묘목을 구해서 새로 심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찰이고, 교감이거든요. 애정을 가지고 다가가서 이파리나 줄기를 보고 아픈지, 안 아픈지 살피는 거죠. 봄철에 나무에 귀를 대면 줄기에서 물이 올라오는 소리가 시냇물 흘러가는 것처럼 들려요.”
  그는 나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도록 도왔다. 가지를 길게 늘어뜨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뿌리를 최대한 뻗을 수 있도록 일부러 멀찍한 곳에 물을 줬다.
  “나무가 살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힘이 세지는 거예요.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능력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진짜 약이에요.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해서 키운 것은 과일이 아니고 독이라고 봐야 해요.”
  20년 가까이 정성껏 가꾼 포도나무는 해마다 포도 4500송이를 농민에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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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현 씨는 “농민 스스로 자신감 있게 권할 수 있는 농산물을 생산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덕현 씨는 “농민 스스로 자신감 있게 권할 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땅을 살리기 위한 끝없는 노력
  도덕현 씨 농장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현수막이다.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하기 싫은 사람은 구실을 찾는다”, “보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라” 등 그가 평소 지니고 있는 철학과 열정을 담은 글귀는 그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처음 농사지을 때는 아기 우윳값도 못 벌었어요. 농약을 치면 수확량이 좋아질 텐데 끝까지 안 쳤어요. 대한민국에 유기농 잘하는 분들을 많이 찾아다녔죠. 그분들이 가진 경험과 기술을 내게 맞게 접목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했어요.”
  그는 “오염된 토양은 깨끗하게 씻어라”라는 선배 농민의 한마디에,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서 물길을 내고, 스프링클러로 물을 뿌려서 한곳에 모이도록 했다. 오염된 물을 퍼내는 작업을 두 달 정도 진행했다.
  “사람도 병이 나면 금식해서 독소를 다 빼고, 미음부터 먹어서 체력을 보강하잖아요. 토양도 마찬가지예요. 제일 먼저 숯을 깔아야 하는데, 반드시 백탄을 써야 해요. 옛날에 시골 어머니들이 부엌에서 쓰던 하얀 재요. 검탄이나 훈탄은 타르 성분이 많아서 식물 뿌리에 장애를 줄 수 있어요.”
  백탄 위에는 토양에서 올라오는 유익균을 흡수할 수 있는 ‘대나무 톱밥’을 깔았다. 그 위에 ‘버섯 배지’를 20cm 이상 두툼하게 펼쳐서 미생물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석 달 정도 지나면 땅이 쩍쩍 갈라지거든요. 메주가 갈라지면서 곰팡이가 피듯이, 땅에서 미생물이 증식되는 거예요. 밑에 있는 흙이랑 섞은 다음에, 뭐든 심으면 병도 안 걸리고 맛도 좋아요.”

  도덕현 씨는 자신과 같이 땅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농업을 이어갈 후배들이 늘어나기를 꿈꾼다.
  “복숭아 농사를 짓는 후배가 있는데, 올해 최고가를 받았어요. 토양을 잘 만드니까 복숭아 맛이 너무 좋은 거예요. 형태만 예쁘게 갖춘 농산물이 아닌, 건강에 도움이 되는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더욱 많아지면 좋겠어요.”
  정성 들여 키운 포도나무에 열매가 그득히 맺히는 것처럼, 그와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이 주렁주렁 들어서기를 기대해본다. 

글·사진 이진선

도덕현 씨와 홍일순 씨는 부부이자, 30년 가까이 함께 농사지어온 오랜 동지다
도덕현 씨와 홍일순 씨는 부부이자, 30년 가까이 함께 농사지어온 오랜 동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