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병 ㈔한생명 운영위원장
전북 남원시 산내면, 마을로 접어들어 제일 먼저 다다른 마을 꼭대기의 작은 집. 집 마당에 핀 매화와 산수유꽃이 어느새 찾아온 봄을 전하고 있었다. 5년 전 산내면에 귀농해 ㈔한생명에서 산내 마을의 교육, 복지, 공동체를 지원하는 일을 이어온 윤용병 운영위원장. 그가 처음 귀농해서 이 작은 집에 살던 때를 이야기하는 얼굴에도 봄 같은 미소가 어린다.
“이 집에서는 아침에 눈을 뜨면 겨우내 얼었던 물이 다시 흐르는 소리를 듣고 봄이 온 걸 알았어요. 내가 정말 귀농했구나, 실감하며 매일 새롭고 마음 설렜죠. 이곳에서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게 감사했어요.”
삶의 전환, 나 자신과 다시 만나다
귀농을 생각하기 전까지, 윤 위원장은 서울에서 20년간 기획 일을 했다. 새벽에 출근해 늦은 밤에 퇴근하느라 매일 아이의 자는 얼굴만 보고 나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좌우 살필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을 살던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물음이 찾아왔고, 다른 길을 고민하며 귀농학교를 찾아보던 차에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불교귀농학교를 만났다.
“도시에서 급하고 바쁘게 살다가 귀농학교에 가니 낯설었지만, 그 분위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더라고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운동은 우리 삶의 결을 바닥부터 바꾸는 운동이다’라는 표어를 읽고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전까지는 마음의 창이 주로 밖을 향해 있었다면, 그곳에서 참 오랜만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 때 남은 생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귀농을 마음먹었어요. 삶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난 거죠.”
귀농학교를 졸업하고는 6년간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도시텃밭을 일구고, 양양에 빈 집을 구해 1년 내내 주말마다 가서 300평의 유기농 텃밭을 혼자 가꾸기도 했다.
“주중에는 출근하고, 주말에는 꼬박 밭일을 했지만 자연에서 계절 따라 살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즐거웠어요.”
이후에도 윤 위원장은 완주 고산산촌유학센터에서 ‘농사선생님’으로 지내며 아이들을 만나고, 마을공동체를 준비하는 지역을 찾는 등 다양한 귀농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산내면 마을공동체와 인연이 닿아 한생명에서 마을 일을 시작하게 됐다.
꾸준히 함께하며, 마을에 뿌리 내린다
남원시 산내면은 인드라망 귀농학교를 계기로 정착한 귀농귀촌인들이 농촌에서의 자립과 공생을 고민하며 활발한 공동체문화를 만들어온 마을이다. 이 문화를 바탕으로 지난 6년간 윤 위원장은 한생명의 다양한 공동체·교육·복지 활동을 통해 마을에 활력을 더하는 데 힘써왔다. 그 결과 지금 산내 마을에는 텃밭모임, 노자 읽기모임, 목공 동아리 등 자발적으로 모여 즐거운 것을 함께 하는 마을 동아리가 50여 개에 이를 만큼, 산내 귀농인들의 교류가 활기를 띠고 있다.
나아가, 한생명은 귀농인과 산내면 토착민이 어떻게 어울려 살지를 고민하며 독거노인을 위한 반찬나눔․한글교실․마을돌봄 등 귀농인들이 마을 어르신들과 만나는 다양한 재능나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재능나눔 활동에 대해 발표할 때 제 첫마디가 ‘웬만하면 이 사업 하지 마세요’ 였어요. 어르신들이 처음에는 귀농인을 경계하다가도 한번 관계를 맺으면 정을 깊이 주고 계속 기다리시기 때문에, 관계에 대한 책임이 없다면 함부로 시작해선 안 되는 일이에요. 책임이 따르는 만큼, ‘귀농인의 날’이라고 일회성 행사를 치르는 것 보다는 이런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귀농인과 토착민이 서로를 이해하고 마을에 정착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봐요.”
농부의 깨달음, 더불어 사는 삶
“마을 일이 때로는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중심을 잡아준 깨달음이 있어요. 그건 우리 중 누구도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순환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그러니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거지요. 농사를 짓다 보면 이 사실을 금방 깨닫게 돼요. 저도 텃밭농사를 하면서 이 깨달음을 몸으로 배웠어요.”
지속 가능한 마을살이를 위해서는 활발한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마음 안에 깨달음과 평화가 머무는 것,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비움과 채움의 균형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윤 위원장. 농촌에서 마을살이를 하며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그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지 물었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설렘’이라는 답을 주었다.
“아침에 눈뜨면 보이는 집 건너편의 감나무가 똑같아 보여도, 매일 다르고 매일 새로운 날이라는 것. 새로운 사람과 일, 무엇보다도 자연을 만나게 된다는 것에 대한 설렘의 힘이 커요. 봄마다 텃밭에 씨앗을 심고 매일 들여다보면 어느 날 그 작은 씨앗이 땅 위로 올라와 열매를 맺는다니, 너무나 설레는 일 아닌가요?”
윤 위원장이 이야기하는 설렘에서 문득, 봄의 기운이 전해져온다. 작은 씨앗이 매년 봄 두터운 땅을 뚫고 올라와 잎을 피우듯이, 농촌에서 마을과 더불어 사는 삶 역시 때론 힘들지라도 늘 서로의 존재 덕분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온 ‘오래된 미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다.
글·사진 유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