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호 정은농원 대표
새끼돼지들이 동그랗고 촉촉한 코에 ‘흙’을 잔뜩 묻히고 돌아다닌다. 이리 킁킁, 저리 킁킁, 조그만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주위를 탐색하고, 축사에 깔아놓은 흙에 얼굴을 묻고 몸을 비비며 논다. 몸집이 큰 돼지들은 널따란 들판을 누빈다. 산자락에 돋아난 풀을 뜯어 먹고, 빗물 고인 진흙탕에서 요리조리 몸을 뒹굴며, 추운 날에는 대나무 숲에 모여 비바람을 피한다.
농업의 자립을 위한 ‘무모한 도전’
전남 무안군 몽탄면, 정은농원 대표 정영호 씨는 아침저녁으로 돼지에게 먹일 ‘특별한 사료’를 준비한다. 그가 먹이통에 채우는 건 공장에서 나온 배합사료가 아닌, 농장에서 직접 만든 자급사료다.
“무모한 도전을 한 거죠.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농장을 자립적으로 운영하고 싶었어요. 배합사료를 극복할 대안을 찾을 때까지 말 그대로 ‘쎄빠지게’ 고생했습니다. 하하.”
처음부터 자급사료를 고집한 것은 아니다. 정영호 씨는 1998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아버지의 농사를 거들며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그때만 해도 소에게 배합사료를 먹이고, 땅에 농약을 뿌리는 것을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느 날 소먹이에서 닭 뼈가 나왔어요. 이게 뭔가 싶었죠. 제가 10여 년간 농민회 활동을 원 없이 했거든요. 생각해보니 말로만 농민운동을 한 것은 아닌가 싶더라고요. 우리 농업의 핵심 자재인 배합사료, 농약, 화학비료는 전부 외국에 의존하고 있잖아요. 농산물 수입 개방 반대를 외치면서도, 정작 저는 미국식 농업을 하고 있던 거예요.”
그는 더 이상 배합사료를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풀을 먹고 자란 소는 체구가 너무 작아서 값이 나가지 않았다. 소비자를 찾는 일은 더욱 만만치 않았다. 결국, 공들여 키운 소를 헐값에 넘기게 되었다. 정영호 씨는 “키우고 팔기에는 돼지가 더 쉽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충북 보은군에서 토종에 가까운 흑돼지를 키우는 농가를 찾아 수컷 1마리와 암컷 2마리를 사 왔다.
농민 연구자, ‘미역’을 발견하다
“돼지가 이렇게 기르기 어려운 동물인 줄 몰랐던 거죠. 그래도 한번 시작했는데 포기할 수 있나요. 끝까지 해보겠다는 마음이었는데, 그게 어느덧 10년이 흐른 거예요.”
정영호 씨는 돼지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찾아다녔다. 2018년 대산농촌재단에서 농업실용연구 지원을 받아 ‘보리’를 이용한 사료 연구도 진행했다. 의미 있는 연구였으나 결과는 기대만큼 신통치 않았다. 돼지의 몸무게가 70kg 이상이 되면 지방이 너무 과도하게 생기는 문제가 있었다. 연구가 끝날 무렵, 그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 ‘미역’이었다.
“발상의 전환이었죠. 공장식 축산에서는 돼지를 키울 때 단백질이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저도 곡물에서만 답을 찾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성장의 열쇠는 미네랄에 있었어요. 미역을 먹였더니 거짓말처럼 문제가 해결되었어요. 근육량이 늘어나고, 지방은 오히려 줄었어요.”
미역의 양에 따라 돼지가 살이 찌고 빠지는 걸 보면서, 정영호 씨는 쌀겨 99%에 미역 1%라는 황금비율을 찾아냈다. 그가 돼지 1마리를 100kg까지 키우는 12개월 동안 총 12만 원의 사료비가 든다. 배합사료를 사 먹이는 것보다 절반가량 저렴한 셈이다. 정 씨는 “사료 효율성이 높아진 덕분에 우리 가족이 굶지 않을 정도로 돈을 벌게 되었다”며 웃었다.
농민 스스로 정하는 적정 규모
정영호 씨는 ‘젊은 농민이 왜 몇만 평씩 농사를 짓지 않는지’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농장 규모를 무작정 키워서 ‘억대 농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제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돼지 마릿수가 100마리예요. 지금보다 더 많이 기르면 고기의 품질이 떨어지고, 고객과의 신뢰는 깨지겠죠. 제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스스로 적정한 규모와 형태를 정한 거예요.”
일주일에 한 번씩, 정영호 씨는 400여 명의 고객에게 돼지고기의 부위별 가격을 안내하는 문자를 보낸다. 휴대전화로 주문을 받다 보니 이제는 소비자와의 대화가 자연스럽다.
“지난 7월에 부득이하게 고깃값을 올리면서 미안한 마음을 전했더니,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사장님이 잘 살아야 우리도 맛있는 고기를 먹죠. 사장님이 망하면 우리가 어디서 이런 고기를 사 먹어요. 고깃값은 걱정하지 마세요.”
생산자와 소비자의 상생을 위하여 정영호 씨는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 농민이 소비자에게 미리 지급받은 자금으로 소를 사육하여 제공하는 일종의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공동체지원농업) 방식 농업이다.
“100명의 고객을 모으는 게 목표인데 사전 구매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요. 소규모 농가를 살릴 가능성을 확인한 거죠. 저와 같은 방식으로 소를 5마리 키우는 농가가 마을에 10곳만 생기면 좋겠어요. 그렇게 연대를 하고, 힘을 모으는 거죠.”
지속 가능한 농촌을 위한 마을교육
정영호 씨는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 이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알고 있다. 그의 첫째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지역의 학부모들이 모여 ‘내 아이, 우리 아이 같이 키우자’라는 마음으로 만든 교육공동체는 10년간 꾸준히 성장했다.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이 머무를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을 짓고, 농사부터 탐방까지 다양한 체험을 진행하다 보니, 전라남도교육청에서 지정하는 1호 마을학교가 되었다.
“학부모도 아이들도 모두 행복했어요. 지금도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대요. 처음에는 학교 선생님들과 대립적이었는데, 이제는 학교와도 동반 관계가 되었어요. 학교에서 주도적으로 혁신 교육을 하고 있고요.”
최장기 대표를 맡았던 정영호 씨는 그동안 함께했던 운영위원들과 2019년 졸업여행을 끝으로 모든 활동을 후배들에게 넘겨주었다. 지속 가능한 농촌을 위하여 마을교육에 앞장섰던 그는 이제 농민과 소비자가 협력하는 지속 가능한 농업을 꿈꾼다.
이날, 정은농원에서 새끼돼지들이 나란히 줄지어 꼭 붙어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정영호 씨는 “큰 돼지에 비해 작은 돼지는 추위를 많이 탄다”며 “아침에 와보면 30마리가 모여 이렇게 뭉쳐있다”고 말했다. 작은 동물들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추운 겨울을 보내듯이, 작은 농가들이 그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과 따뜻한 기운을 주고받아 생기를 띠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