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인간’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독일·아일랜드 취재기

글․사진 송호진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연수 중인 기자는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선고한 날, 체코 프라하 외곽의 아주 작은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곳의 주인은 자신이 고른 세계 톱뉴스 네 개를 A4 용지 절반 크기에 담아 아침 식사 테이블마다 올려놓았다. 그중 하나가 ‘부패 스캔들, 최순실, 헌정 사상 첫 파면 대통령’의 내용이 적힌 한국의 탄핵 뉴스였다. 한국의 시민들이 바꾼 세상에 관한 소식이 이렇게 프라하의 어느 작은 숙소 테이블 위에까지 전해졌다.

한국의 대통령 탄핵 뉴스, 독일 교민들
한국 사회의 변화를 염원하며 전국의 농민들을 포함해 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왔던 지난해 말, 베를린에서도 몇 차례 집회가 열렸다.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 앞 파리저 광장에서 열린 1차 집회에서 60대 초반 남성이 우황청심환까지 먹고 자유발언에 나섰다. 그는 박정희 시대에 독일에 온 파독 간호사의 아들이다. 한국의 청춘들을 걱정하는 말을 잇던 그의 목소리가 격양되는가 싶더니 사전에 준비한 발언 내용 중에 없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염병할.”
이 짧은 말에 누군가는 손뼉을 쳤고, 누군가는 갑자기 뜨거워진 눈가를 손으로 훔쳤다. 실은 그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그리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이 그 한마디에 들어차 있었다. 그날 기자가 현장에서 느낀 교민·독일 유학생들의 감정은 ‘서글픈 분노’에 가까웠다. 타국의 광장에서 자기가 태어난 나라의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서글픈 감정을 일으킨다. 이날 광장에 나온 파독 간호사 출신의 노년 여성은 “지금의 한국 정부는 내가 기대했던 조국의 모습이 아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몇 주 뒤 베를린 교민들은 2차 집회를 다시 열었다.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나치 정권에 반하는 서적들을 불태운 베벨 광장에서 출발해 알렉산더 광장을 옆에 낀 대로를 걸어 훔볼트 대학으로 돌아오는 거리 행진도 벌였다. 행진이 끝난 뒤 훔볼트 대학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 학교에 다닌 카를 마르크스의 말이 새겨진 벽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결정한 다음 날, 체코 프라하 외곽의 어느 작은 호텔의 주인장이 직접 고른 세계 톱뉴스 4개 중에 탄핵 결정 소식(우측 상단 기사)이 실렸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결정한 다음 날, 체코 프라하 외곽의 어느 작은 호텔의 주인장이 직접 고른 세계 톱뉴스 4개 중에 탄핵 결정 소식(우측 상단 기사)이 실렸다.

순간 나는 이 문구가 ‘서글픈 분노’를 누르고 사회 변화를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선 독일 교민,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농민과 시민에게 전하는 격려처럼 들렸다.
이제 시민들이 앞당긴 대통령선거 이후 우리 사회와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변화를 위해 더 나아가게 될까. 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정치에 참여하고,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쪽으로 나아갈 순 없을까. 그런 점에서 시민들을 국가의 주요 의사 결정에 직접 끌어들이고, 정치 참여 연령을 아래로 더 확대하는 유럽 사회는 우리가 참고할 만한 대상이다. 특히 학생과 청소년의 정치화를 장려하는 유럽 사회의 모습은 눈여겨봐야 한다.

18살 청년도 개헌에 참여하는 아일랜드 시민의회
기자는 지난 2월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다녀왔다. 자원한 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500명을 뽑아 국가 의사 결정에 참여시킨 고대 그리스 평의회가 현대 유럽에서 유사하게 재현된 ‘아일랜드 시민의회’ 현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더블린 외곽의 한 호텔에 들어서니 14개 원형 탁자에 다양한 연령의 시민의회 위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시민의회는 아일랜드 전체 인구의 연령·성별·사회계층·지역분포를 고려해 무작위로 뽑은 시민 99명과 정부에서 의장으로 임명한 대법관 1명 등 100명으로 이뤄져 있다.
지난해 10월 출범한 시민의회는 시민의 의견을 형식적으로 듣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들은 1년간 활동하며 헌법 수정(개헌)과 국가 주요 과제를 깊숙이 다룬다. 낙태를 금지한 아일랜드의 ‘헌법 제8조 수정안’을 다시 고쳐 낙태를 허용할지를 비롯해 국민투표 시기 및 방식, 의회선거일 고정 문제, 인구 고령화 대책, 기후 변화에 대한 아일랜드의 대응 방법 등 5가지를 논의한다. 각 주제마다 시민의회 참석자 과반 찬성으로 권고안을 채택해 시민들의 결정 사항을 입법부인 의회에 전달한다. 의회는 권고안마다 수용 여부를 밝혀야 한다. 권고안이 수용되고 헌법 개정이 필요하면 국민투표에 부친다.
기자가 방문 당시 시민의회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민감한 논쟁 사안인 낙태 문제를 먼저 다루고 있었다.

지난 2월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호텔에서 아일랜드 시민의회가 열렸다.
지난 2월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호텔에서 아일랜드 시민의회가 열렸다.

시민위원들은 낙태에 관한 윤리·법학·의학 전문가들을 불러 이들의 발표를 들은 뒤 원탁별 토론과 질의응답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정리해가고 있었다. 가장 첨예한 헌법 조항(낙태 문제)을 고치는 과정에 시민이 개입하는 아일랜드 시민의회는 참여 민주주의의 유의미한 실험으로 평가받는다.
아일랜드 시민의회 사례를 연구 중인 더블린대학(UCD)의 데이비드 패럴David Farrell 교수(정치학)는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민주주의는 고정된 제도가 아니며 진화하는 것이다. 시민이 국가의 의사 결정의 주체로 참여하는 시민의회는 민주주의 진화를 위한 시도로서 의미가 있다. 한국도 시도해보면 어떨까?”
특히 기자의 눈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18살 시민위원이었다. 선거권(투표할 권리) 연령을 만 19살에서 18살로 낮추자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막혀 있는 한국과 달리 아일랜드는 아예 18살 청년이 헌법 개정을 논의하는 시민의회 위원으로 참여한다. 헌법 개정 등 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세대가 논의 과정 초반부터 주체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청년은 기자가 “생명권·법적 쟁점 등 낙태에 관한 전문가들의 발표가 어렵지 않으냐”고 묻자 웃음부터 지으며 말했다. “자세한 정보를 듣고 함께 토론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독일은 ‘정치적인’ 청소년을 환영한다
현재 기자가 연수를 위해 체류 중인 독일은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부추기는 나라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에서 선거권 연령을 낮추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 가운데 하나가 학생들이 정치 논쟁에 휘말린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독일은 학생 시절뿐 아니라 생애에 걸쳐 ‘시민의 정치화’를 지원하는 나라다.
독일은 내무부 산하 연방 정치교육원이 각 주의 정치교육원, 정당의 정치재단, 노동조합, 종교단체, 주정부·대학·시민단체 주관 시민대학, 동네마다 있는 시민학교(VHS) 등 정치교육을 실시하는 주체에 예산을 적극 지원하는 독특한 정치교육 제도를 갖고 있다. 국가가 정치교육 내용에 관여하지 않는 대신 사회

독일은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부추기는 나라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에서 선거권 연령을 낮추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 가운데 하나가 학생들이 정치 논쟁에 휘말린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독일은 학생 시절뿐 아니라 생애에 걸쳐 ‘시민의 정치화’를 지원하는 나라다.

의 다양한 목소리가 정치교육에 반영되도록 예산을 지원한다. 동네마다 있는 시민학교(VHS)에선 심리·철학·종교·역사·음악·미술·춤·요리·외국어 강좌 외에도 정치 관련 과목이 개설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된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 제도와 정당 운영 방식, 독일의 정치 현안, 유럽과 독일의 관계, 테러와 국제 문제 등 여러 주제의 강의를 듣고 토론한다.
무엇보다 독일에서 학교는 가장 훌륭한 정치교육의 장이다. 기자가 사는 베를린의 ‘힐데가르트 베크샤이더’는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학교(김나지움Gymnasium)다. 이 학교의 12학년은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같은 아비투어Abitur를 대비하는 마지막 학년이다.
그런데 12학년 학생들은 마지막 학기 내내 ‘정치·경제’ 과목에서 2010년 리비아·튀니지·이집트 등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과 당시 국제연합UN·독일 정치권이 취한 결정 등을 토론했다. 최근 이 학생들은 정치·경제 과목에서 각자 자유롭게 정한 정치 현안에 대해 관련 전문가와 나눈 인터뷰를 소개하는 공개 발표(프레젠테이션) 평가도 치렀다.
이 학교에는 1년에 두 차례 정도 대강당에서 지역 정치인들과 국내외 정치·지역 현안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도 있다. 학교 게시판에는 정당의 정치재단에서 주최하는 정치 포럼·세미나 안내 포스터를 게시해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한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한국 교민 김진 학생은 “수업에서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자주 토론했고, 정치 문제를 친구들과 잡담하듯 얘기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정치 이슈가 학생들의 잡담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독일 사회가 청소년의 정치참여 확대에 얼마나 힘을 쏟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U-18 모의투표’(U는 아래란 뜻의 Unter)다.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와 비슷한 독일의 연방의회 선거(총선)에선 만 18살부터 투표가 가능한데, 이 선거에 배제된 18살 미만의 어린이·청소년들이 실제 선거와 똑같은 용지에 모의 투표를 하는 것이 ‘U-18 투표’다.
‘U-18 모의투표’는 한 청소년클럽 주도로 1996년 베를린의 모의투표소 한 곳에서 처음 시작됐다. 지금은 지방선거, 연방의회 선거 때마다 실제 선거 9일 전에 ‘U-18 모의투표’가 먼저 진행된다. 예를 들어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4선 연임 여부가 판가름나는 독일 총선이 올해 9월 24일에 열리는데, ‘U-18 모의투표’는 9일 전인 9월 15일에 실시된다.

독일 사회가 청소년의 정치참여 확대에 얼마나 힘을 쏟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U-18 모의투표’(U는 아래란 뜻의 Unter)다.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와 비슷한 독일의 연방의회 선거(총선)에선 만 18살부터 투표가 가능한데, 이 선거에 배제된 18살 미만의 어린이·청소년들이 실제 선거와 똑같은 용지에 모의 투표를 하는 것이 ‘U-18 투표’다.

독일의 어린 학생들이 U-18 모의투표를 위해 투표함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SPI(베를린사회교육연구재단)
독일의 어린 학생들이 U-18 모의투표를 위해 투표함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SPI(베를린사회교육연구재단)

이 투표는 청소년·청년단체들이 모인 ‘U18 네트워크’가 전국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진행한다. 연방 정치교육원 등 정부 기관이 재정을 일부 후원한다.
모의투표소 설치가 자발적 참여로 이뤄지는 것도 흥미롭다. 누구나 자기 동네에 투표함을 갖춘 투표소를 창의적으로 디자인해 설치할 수 있다. 이미 지난 2월 20일부터 ‘U-18 모의투표소’를 설치할 사람과 단체의 자발적 신청을 받고 있다. 투표소는 길거리, 광장, 공원, 도서관, 수영장, 스포츠클럽, 학교, 청소년 시설 등 다양한 곳에 설치된다. 투표 전에 청소년들은 정치인들을 초청해 선거 쟁점과 견해를 듣는 인터넷 방송도 진행한다.
참여율도 높다. 2013년 총선 ‘U-18 모의투표’에선 전국 1,525개 투표소에서 19만 8천 여 명이 투표했다. 당시 부모의 손을 잡고 나와 ‘투표 놀이’를 경험한 1~5살 투표자가 188명이었고, 6~10살은 1만 2천 여 명, 11~15살은 9만 2천여 명에 달했다.
모의투표 당일 공개되는 결과는 청소년들이 정치적 극단주의에 쉽게 휩쓸린다는 주장을 머쓱하게 만든다. 2013년 총선 ‘U-18 모의투표’에서 어린이·청소년 참여자들은 극우 정당인 국가민주당(NPD·3.23%), 반유럽연합·반이슬람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1.46%)을 외면했다. 이들 당은 당시 모의투표에서 독일 의회 진출을 위한 최소 득표율(5% 이상)도 얻지 못했다.
독일에선 모의투표에 그치지 않고 연방의회 선거권 연령을 지방선거(주의회 또는 구의회 선거 등)처럼 16살로 낮추자는 요구가 정치권에서 제기된다. 현재 독일은 지방선거에선 16개 주 가운데 10개 주에서 만 16살부터 투표할 수 있다. 사회민주당·녹색당·좌파당은 ‘16살 선거권’을 연방의회 선거까지 확대하자고 요구하는 정당들이다. 이들 정당은 “16살이 성인보다 정보를 덜 얻는다는 증거가 없으며, 더 오래 삶을 이어갈 당사자가 직접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 정치적 주장에 쉽게 영향을 받는 성인이 많은데도 청소년들의 정치적 성숙도만 지적하는 것은 그들에게만 더 높은 정치적 자격 요건을 강요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독일은 학교와 동네 곳곳에서 시민을 위한 정치교육이 이뤄진다. 정부 지원 ‘외국인을 위한 사회통합과정 교육’에서도 나치 정권의 잔혹성과 그 반성에 대한 교육, 민주정치에 대한 교육이 진행된다. 외국인 교육 참가자들이 나치 시대의 사진을 모아 당시 역사를 배우고 있다.
독일은 학교와 동네 곳곳에서 시민을 위한 정치교육이 이뤄진다. 정부 지원 ‘외국인을 위한 사회통합과정 교육’에서도 나치 정권의 잔혹성과 그 반성에 대한 교육, 민주정치에 대한 교육이 진행된다. 외국인 교육 참가자들이 나치 시대의 사진을 모아 당시 역사를 배우고 있다.

한국은 정치 참여의 폭을 넓힐 수 있을까
이처럼 지금 아일랜드에선 18살 청년이 헌법 개정을 위한 시민의회 위원으로 참여하고, 독일에선 선거권에서 배제된 어린이·청소년들이 실제 투표와 똑같은 모의투표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고 표출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독일이 학생 시절부터 정치교육을 진행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생동감을 잃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습득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독일은 이미 47년 전인 1970년에 연방의회 선거권을 21살에서 18살로 낮췄다.
지난해 말 촛불이 타오른 한국 사회는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선거권이 19살 이상인 유일한 나라이며, 선거권 연령 인하 논의가 정치권에서 막힌 채 다시 대선을 맞이했다. 반면 유럽은 젊은 세대가 정치의 시혜 대상이 아니라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주체로서 권리를 행사한다. 1969년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취임식에서 선거권 연령을 낮추는 헌법 개정을 언급하며 했던 말은 ‘참여 민주주의’ 폭을 더 넓히는데 주저하는 한국 사회가 경청할 내용을 담고 있다.
“(더 젊은 유권자들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함께 결정하고 결과의 공동 책임자가 되는 것이 독일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시도하려 한다.”

29-2※필자 송호진: 한겨레신문 기자. 2000년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한겨레신문 스포츠·문화·정치부, 한겨레21 정치팀장 등을 거쳤다. 지난해 8월부터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정치교육 등을 주제로 1년간 연구 연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