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용행 성산일출봉농협 조합장
12월, 때 이른 한파를 맞은 육지와 달리 제주는 따뜻했다. 푸른 머리를 내놓은 월동무를 수확하느라 바쁜 성산읍 밭에도 가을 같은 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한 제주 노지에서 월동무를 길러 단경기에 육지로 판매한다는 현용행 성산일출봉농협 조합장(62, 제26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업기술 부문 수상자)의 아이디어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제주 명품, 겨울을 나는 무
제주하면 감귤이지만 2000년대 초, 열대과일을 비롯한 수입농산물이 밀려오면서 생산과잉으로 감귤원은 잇따라 폐원됐다. 비워진 밭에 심을 대체작물이 절실한 때였다.
“월동무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전국을 다니며 무 동향을 살핀 끝에 찾은 관동여름무를 도입해 제주 시험재배를 성공시켰습니다. 발상의 전환과 끊임없는 연구로 늘 남들이 안 된다고 하는 걸 되게 만들었지요.”
비옥한 제주 화산토에서 재배한 월동무는 당도가 뛰어나고 아삭해 인기가 높다. 자체 개발한 무 자동세척기로 기존 흙무를 세척무로 출하해 수취가도 높였다. 2016년, 월동무 조수익은 1,854억 원에 이르며 제주 제2의 소득작목으로 정착했다. 성산일출봉농협에서 적극 재배기술을 보급하고 품종 선택, 비료 등을 지원한 결과다.
풍년이어도 농민의 짐은 무겁다
지난해 월동무는 풍년이었지만 농민들의 어깨는 무거웠다. 생산량이 5%만 늘어도 가격이 절반 가까이 떨어질 수 있어 자칫하면 생산비도 건지기 어려운 탓이다.
“가격 폭락을 막기 위해 수급조절에 집중했습니다. 총 1,200ha의 월동무 시장격리 사업에서 500ha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협조했어요. 이전에는 저 혼자 뛰었지만 이제는 농민들이 스스로 뜻을 모아 믿고 따라주니 큰 힘이 됩니다.”
풍년이어서, 혹은 못생기거나 깨져서 버려지는 비상품 무가 없도록 농협을 통한 수출과 가공, 상품화를 확대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월동무는 현재 미국, 독일 등지로 수출하며 판로를 넓히고 있다. 못생겼어도 품질 좋은 무를 깍둑썰기해 김치업체에 납품하거나 2014년부터 참여한 ‘제주무브랜드경쟁력강화사업’을 통해 화장품과 의약품을 개발하는 방안 등 다양한 가공사업을 통해 비상품 무의 장기적인 판로를 꾸준히 고민하고 있다.
청정 제주, 농업의 미래를 생각하다
“선진국 농정을 보면 PLS농약허용물질목록관리제도와 GAP농산물우수관리인증제도, 농산물이력추적관리는 농사의 기본이에요. 미래는 친환경 농업으로 가야 합니다. 친환경 농업은 곧 농민에게 청정 제주의 자연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될 겁니다.”
성산일출봉농협은 전국 유일의 친환경 육묘장을 설치하고 20종이 넘는 친환경 모종을 공급하고 있다. 농민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육묘를 지원해 지역 친환경 농업 발전에 큰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미생물배양센터에서는 식물의 면역력을 높여주는 친환경 미생물제제를 무상 공급하고, 친환경농산물산지유통센터를 운영하는 등 다각도로 친환경 농업을 지원한다. 농민들의 호응이 좋아 지역 친환경 농업의 확대를 기대하고 있다.
농민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농협이어야
“신용사업보다 농산물 판매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농협이 되어야 합니다. 농협의 핵심 역할은 농산물 수매와 복지를 통해 농민의 더 나은 삶을 함께 고민하는 것에 있어요.”
현 조합장의 제안으로 성산일출봉농협은 무나 기장류를 농가에서 파종만 하면 드론 방제, 수확, 건조, 상품화까지 농협이 맡아주는 계약재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농가 고령화로 인건비 고민이 큰 농민들을 위한 대응책이자, 농산물 가격조절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그간 경제성장에만 주력하다 보니 농촌의 고유한 문화를 많이 잃어버렸어요. 농민이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뿐만 아니라 농촌 삶의 질 향상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농협이 농촌지역의 중심역할을 하며 농가소득과 농민복지를 우선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농협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농촌 청소년에 1억 원 장학금 기탁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 여기까지 왔지만 제가 아직 덕이 모자랍니다. 그래도 제 옆에 훌륭한 사람이 있어서 농민과 직원을 섬기는 조합장 역할을 해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현용행 조합장이 이뤄온 일을 돌아보면 부인 강대여 씨(62)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강대여 씨는 1만 평의 농장에서 키위와 조경용 꽃을 생산하며, 현 조합장이 농협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농장을 책임지고 평소에도 꾸준히 나눔을 실천하기로 유명하다. 현 조합장은 아내와 함께 지난해 12월, 1억 원을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하며 농촌 청소년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 달라 부탁했다. 작년 대산농촌문화상 상금 5천만 원에 사재 5천만 원을 더한 금액이다.
앞으로 농업회의소나 협동조합을 통해 농민의 삶과 농업 발전에 계속 힘쓰고 싶다는 현용행 조합장. “온 국민이 농업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는 그는 오늘도 바쁘게 걷는다. 농민으로서, 농민과 함께 걷는 길이다.
글·사진 유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