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환경 보전의 필요성은 예전부터 거론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친환경농업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한국 사회의 공적 의제agenda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농업환경은 어떠한가? 어느 농촌 지역의 농경지 주변 식생이나 동물상이나 경관이나 수질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별로 없다. 사람들이 농업환경에 정말로 관심이 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할 정도다. 친환경농업에 관련된 실천, 논쟁, 정책 등의 시선을 따라가면 결국 마주치게 될 것은 농업환경이어야 한다. 그 소실점에는 농업환경이라는 추상 개념에 함의된 물질적 현실의 구체적 사례, 즉 농사짓는 땅과 주변의 땅, 물, 동식물, 흙, 미생물 등으로 이루어진 특정한 장소가 놓여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친환경농업’ 정책의 역사가 근 20년으로 결코 짧지 않은데도 정부, 시민, 농민 등의 시선과 논의는 소실점에 있는 ‘농업환경’에 이르지 못하고 안전성 인증제도, 친환경농산물 가격 또는 유통 구조, 농가 소득 보장을 위한 정책 수단 등등의 논의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들어 정부는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은 토양·용수 등 농업환경과 생태계의 보전과 농촌경관을 개선하기 위한 지역 주민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점검·관리하는 사업으로 현 정부의 국정과제이자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한 핵심 과제”(농림축산식품부 보도자료)라는 언급에서 드러나듯, 중요성이 크게 강조된다. 따라서 농업환경을 보전하려는 정책이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효과를 거둘지에 관한 논의도 그에 비례하여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정부의 농업환경보전 정책이 ‘프로그램’의 형식을 갖추어 추진되는 것은 타당하다. ‘프로그램’이란 특별한 장기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고안한 여러 가지 수단 및 활동들의 묶음을 말한다. 규제, 인센티브, 시장 상품화, 농촌 지역사회 참여, 시민사회의 관심 등 여러 측면에서 시도되는 노력이 조화를 이루고 시너지synergy를 만들어낼 때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농업환경은 자연환경과 달라
농업환경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선, 자연환경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환경’임을 강조해야 할 듯하다. 농민이 살림살이를 유지하려고 농사짓는 장소는 경작생태계, 즉 ‘인간이 개입하여 농작물을 키우는 생태계’이다. 자연생태계와 달리, 사람의 손길이 있어야 유지된다. 그래서 ‘농업환경agri-environment’이라는 별도의 범주가 성립한다. 사람의 접근을 차단해 훼손을 방지한다고 해서 농업환경을 잘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농업환경은 사람의 생산 활동과 자연의 생물학적 재생산 과정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장소다. 농업생산 활동은 사람에게 충분한 생산물을 제공해야 한다. 동시에 자연도 재생산해야 한다. 가급적 생물종을 풍요롭고 다양하게 해야 한다. 자연自然이라는 말뜻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도록 놓아두면 농업생산이 충분하게 이루어지기 어렵고, 농업생산 극대화만을 추구하면 자연의 다양성과 재생산을 저해한다.
정부의 농업환경보전 정책이 ‘프로그램’의 형식을 갖추어 추진되는 것은 타당하다. 농업환경을 보전하려는 실천이 단편적이어서는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란 특별한 장기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고안한 여러 가지 수단 및 활동들의 묶음을 말한다. 규제, 인센티브, 시장 상품화, 농촌 지역사회 참여, 시민사회의 관심 등 여러 측면에서 시도되는 노력이 조화를 이루고 시너지synergy를 만들어낼 때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개별 충족조건 몇 가지를 살펴본다.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규제는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농업환경을 보전하려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하며 제일 먼저 검토해야 할 제도적 수단이다. 내가 사는 마을에 농업용 저수지가 하나 있다. 이 저수지에서 물을 공급받는 논 면적이 대략 63만 평이다. 대부분 유기농업이 이뤄지는 농지다. 그래서 저수지와 그 하류 하천 수질은 예전부터 지역 농민들의 중요 관심사였다. 최근에는 저수지 상류 지역에서도 의식적으로 유기농업이 실천되고 있다. 수질을 보호하려면 상류에서부터 유기농업을 해야 한다는 농민들의 인식이 그런 실천의 바탕에 깔려있다. 그런데 저수지로 유입되는 상류 하천의 물은 여전히 더럽다. 주변에서 유기농업을 한다고 해도 상류 지역에서부터 축산분뇨나 생활하수가 하천으로 유입되기 때문이다. 하수와 오·폐수를 차단하는 규제 없이 농민들만의 친환경농업 실천으로는 농업환경을 보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타당한 규제가 바탕에 깔리지 않은 채 진행되는 실천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환경보호를 위한 일반 규제와 농업환경 프로그램이 서로 조율되어야 하는 이유다.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이 왜 꼭 마을(행정리) 단위로만 추진되어야 하는가? 상당수 마을에서는 실제로는 참여하기 어려운 고령 농가가 많을 터인데 ‘마을-지자체 협약’이라는 구조가 적합한가? 보조금 지급 대상 행위 유형 목록에 포함된 것들은 대부분 농민이 자신의 농경지에서 실행해야 할 것들인데, 농경지 밖에서 이루어질 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인센티브 또는 노동의 대가를 제공할 것인가? 일정한 장소 범위 안에서 농업환경을 보전하려면 수행해야 할 활동과 그런 활동들의 묶음으로 표현될 전략을 누가 판단하고 결정할 것이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둘째, 농업환경을 보전하려는 농민의 실천을 촉진하려고 공공 부문이 금전적 이익을 제공하는 정책 수단을 인센티브라고 한다. 우리보다 앞선 유럽 등 여러 국가에서도 인센티브는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인센티브라는 정책 수단이 필요한 까닭은 규제가 작동하는 것만으로는 농업환경보전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농업환경은 농민과 자연생태계의 상호작용 결과로서 유지된다. 영농행위를 포함한 농민의 다양한 활동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느냐에 따라 농업환경의 꼴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량을 줄여나가는 것, 퇴비 등 유기질 비료라 하더라도 토양 내 질소 및 인 함량을 고려하여 지나치지 않도록 조절해 사용하는 농법, 논에 둠벙 만들기, 적당한 장소에 소류지 조성하기, 잡초 및 경관 관리, 저수지 주변 및 관개배수로 청소와 정비 등등 농민들의 손길이 필요한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친환경농업직불제 같은 현재의 인센티브 정책 수단이 내건 조건은 농민 개인의 경작지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다. 농약과 화학비료 사용량을 규제하고 있을 뿐이다.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은 그보다 더 능동적인 실천을 전제로 한다. 더 능동적인 실천에는 그만큼 더 많은 품과 고민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인센티브의 내용이 새롭게 추가되어야 한다.
셋째,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에서 시장 상품화는 주요 정책 수단이 아니라 보완적인 수단의 위치에서 작동해야 할 것이다. 농업환경이 잘 보존되면 그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품질 속성이 다른 곳의 농산물과는 차별화되기 때문에 더 많은 가격을 받을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것이 통상적인 이론이다. 그러므로 농민은 농산물 가격 면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농업환경을 보전하려는 동기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잘 보전된 농업환경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가령 유기농산물이 시장에서 더 비싸게 팔릴 수 있도록 상품화를 촉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아주 고전적이며, 현재까지 한국에서 추진된 친환경농업 육성 정책의 뼈대를 이룬다. 일리가 있지만,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이 새롭게 논의되기 시작하는 배경에는 그 같은 ‘시장 상품화’라는 방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비판이 깔려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친환경농산물 가격이 관행 농산물에 비해 높게 형성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농업환경보전 실천을 충분히 지속적으로 이끌어내기에는 그 정도의 가격 차이가 충분치 않다. 게다가 안전성 같은 친환경농산물의 품질 속성에 대한 강조와 판촉은 엉뚱하게도 농업환경 자체보다는 농업환경의 결과물인 농산물에 대한 인증에만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소비자들의 관심을 이끄는 경향마저 있다.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앞에서 언급한 규제, 인센티브, 시장 상품화 등의 테마는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이 갖추어야 할 내용, 즉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보다 더 긴급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는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2018년 현재 정부는 충남 보령, 전남 함평, 경북 문경 등지에서 각각 1개 마을을 시범연구 대상 마을로 정해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을 실험하고 있다.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농민의 조직 형태는 ‘마을’이라고만 규정되어 있고, 마을과 지자체의 협약을 근거로 추진한다고 알려져 있다.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에서 규정한 ‘적극적인 행위’도 세세하게 열거하면서 각각의 행위유형별로 보조금 지급 단가를 마련해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알려진 정책 설계 내용은 여러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이 왜 꼭 마을(행정리) 단위로만 추진되어야 하는가? 영농조합법인이나 농업환경보전 실천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다른 형식의 농민 조직이 참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상당수 마을에서는 실제로는 참여하기 어려운 고령 농가가 많을 터인데 ‘마을-지자체 협약’이라는 구조가 적합한가? 농업환경보전에 기여하는 행위 유형을 정하고 보조금 지급 단가를 각각 정해둔 것은 행정상 필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현재 그 행위 유형 목록에 들지 않지만 중요한 실천 행위가 필요하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보조금 지급 대상 행위 유형 목록에 포함된 것들은 대부분 농민이 자신의 농경지에서 실행해야 할 것들인데, 농경지 밖에서 이루어질 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인센티브 또는 노동의 대가를 제공할 것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일정한 장소 범위 안에서 농업환경을 보전하려면 수행해야 할 활동과 그런 활동들의 묶음으로 표현될 전략을 누가 판단하고 결정할 것이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농촌 지역사회 주민의 공동 노력과 자율성을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에 수용하는 문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듯하다.
농업환경 유지노력이 지역공동체를 강화한다
얼마 전 문자 메시지 알림이 휴대폰에 떴다. 마을길 주변 풀을 깎고 화단도 꾸며야 하니, 화요일 낮에 나오라는 전갈이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1980년대 중반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일요일마다 아침 6시면 이장님 댁에 들러 열쇠를 받아들고 마을회관 문을 열었다. 장비 전원을 켜고 마이크를 들어 ‘방송’을 했다. ‘회관 마당과 마을길을 쓸고 청소해야 하니 4-H 회원들은 나오라’는 알림이 확성기를 통해 퍼져나가면, 중고등학생 열 명쯤 마당비를 들고 나타나곤 했다. 귀찮기는 하지만 우리가 할 만한 일이라고 믿었다. 옆의 면面 어느 리里에서는 ‘마을 풀 깎는 날’ 울력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벌금 몇만 원을 물리기로 했단다. 누군가는 ‘나하고 상관없는 일을 왜 해야 한단 말인가?’라며 불참하고, 다른 주민 다수는 불참자의 ‘공동체-감수성 부족’을 불편하게 여기는 풍경이 연출되는 시골 마을이 적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마을에서는 어차피 노인들 밖에 안 남아 일할 사람도 없으니, 공동으로 풀을 깎거나 청소하는 따위의 일은 아예 하지 않을 것이다.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다며 근심하는 사람이 많지만, 농촌에서 일 돌아가는 방식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수가 없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데 마을에 속해서, 내남없이 쓰는 장소, 시설, 경관이 농촌에는 여전히 많다. 딱히 이용자만을 가려내 이용료를 받자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군청 같은 공공기관이 그 모든 장소와 시설과 경관을 직접 관리할 수도 없다. 결국, 잠재적·현재적 공동 이용자인 농민들이 함께 관리하고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농촌 지역공동체가 농업환경을 보전하지만, 농업환경을 가꾸고 유지하려는 활동이 지역공동체를 강화할 수도 있다. 공동 활동과 공동체의 결속은 서로 되먹임한다.
지역사회의 자율성과 공동체성격을 존중, 확장해야
농업환경은 농사와 공동체 활동이 펼쳐지는 장소다. 그러므로, 쉽지는 않겠지만, 농촌 지역사회의 자율성과 공동체 성격을 존중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셋이다. 첫째, 행위 유형별로 단가를 산정해 지급하는 방식은 농민이 스스로 살아가는 장소에 대한 자발적 관심을 고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농업환경보전 정책의 대상이 되는 장소, 시설, 경관 등은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이른바 커먼즈commons이기 십상이어서 공동 활동과 규칙을 예비하지 않고서는 가꾸고 보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 지역마다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농업환경을 보전하려는 실천도 지역의 실정에 맞게 다양해야하기 때문이다.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은 이제 구상 단계다. 단순한 직불제, 친환경농산물 인증제도, 친환경농산물 시장 촉진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그동안의 농업환경 정책보다 더 적극적인 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진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구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보완하고 재검토해야 할 과제가 쌓여 있다.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형성하는 과정에 농민, 농촌 지역사회 주민, 시민사회, 학계 등의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해 의견을 개진할 통로를 활짝 여는 것이 긴급한 과제다.
※필자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1년간의 안식년을 맞아 현재 충남 홍성 젊은협업농장에 머물며 청년들에게 농사일과 강의로 청년농부를 육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