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을 2년 반 앞두고 스스로 명예퇴직을 신청해 학교를 떠나 홀연히 농촌으로 내려온 지 어 느덧 4년 차에 접어들었다. 인생 후반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농민이 원하는 정책이나 방향을 책으로 엮 어 세상에 남기는 일을 하고 싶고, 농촌 현장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며 농사짓고 사색하며 농민에게 듣고 배운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 시대가 얼마나 농업·농촌·농민을 홀대했는지 알리려고 한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변방의 북소리가 중앙에 들리도록 칼럼도 쓰고 틈틈이 기고도 하고 있다.
근래 가장 많이 느끼는 소회는 농민 특히 중·소농은 머지않아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고, 농촌지역 특 히 마을은 소멸 위기에 놓일 것 같으며, 농업은 대규모 관행농만 어느 정도 살아남아 다양한 품목의 소량 생산은 불가능해지고, 지금은 남아돈다고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쌀마저도 자급률이 80%대로 내려가고, 20%대의 곡물자급률은 형편없이 줄어 10%대로 떨어질 것 같다.
농촌 현장에 살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희망보다는 절망을 더 크게 느끼니 안타깝고 답답하다. 몇몇 앞서가는 농민이 나 마을공동체만을 보고 전체의 희망을 발견하기엔 너무 극소수이고 보편적이지 않다. 협업이나 사회적 농업 도 결국 현재를 대체할 대안이 될 것 같지는 않 다. 부분적인 것을 보고 전체도 그럴 것 으로 판단하려는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를 경계해야 한다.
농정은 아예 산으로 가고 있다. 수 입 개방과 기후환경 변화에 따 르는 가격 폭락과 대체작목 부재 등 악순환이 되풀이되 는 농민들의 고통에는 뒷 짐만 지고 있다. 농민·농촌은 안중에 없고 관을 위한 그들만의 농정이 판을 치고, 그들이 살아남기에만 급급한 보여주기식 정책들이 남발하고 있다. 스마트팜 혁신밸리 사업이 그렇고, 공익형 직불제 개편이라고 말은 하면서 직불금 파이를 키우려 하지는 않으며, 쌀 가격 안정장치 수립이나 곡물자급률 제고에는 소극적인 반면 농가소득 안정장치인 쌀변동직불제는 아예 없애려는 행정 편의적 발상 또한 그렇다. 에너지 자급마을 육성사업도 마찬가지다. 현 단계에서 에너지 자급이 그렇게 시급한 과제일까. 농민의 삶과 농촌지역의 위급함을 헤아리지 못하는 꽉 막힌 그들만의 보신 정책일 뿐이다.
농정당국조차 이러고 있으니 우리 사회가 농민·농촌·농업 현장을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얼마 전 농촌지역 살리기 토론회에서 한 도시계획 전문가라는 사람이 ‘농’자 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명산업이니, 미래성장산업이니, 농정철학이니 하는 거창한 농정 구호보다는 농민이 가장 원하는 것을 시급하게 추진해야 한다. 대부분의 현장 농민들은 큰 걸 요구하지 않는다. 쥐꼬리만 한 돈 몇 푼 지원 받는 것보다 우선적인 것은 내가 생산한 농산물을 ‘안정적인 가격에 언제나 판매’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저 내 물건 잘 팔아 주는 것이 최고다. 특히 대농보다는 중소농이 가장 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중소 농민이 진정 원하는 것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80~90%에 달하는 이들 중소농이 사라지면 농촌의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농정 당국은 ‘안정적인 가격으로 언제든 판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에 예산과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은 학교 및 공공급식을 포함하는 로컬푸드 시스템을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더욱 활성화하는 정책 개발은 물론 지역 시군단위의 역할과 책임을 강화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민간조직의 활성화를 지원하는 일에 몰두했으면 한다. 이것 하나라도 활성화되면 중소농의 농산물 가격과 소득 안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결국 농촌지역과 귀농·귀촌도 활성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거창한 농정구호나 정치적 선전은 걷어치우고 농민과 농촌 현장에서 필요치 않다고 하는 곳에 예산과 쓸데없는 힘을 제발 낭비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 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양양로뎀농원 농부. 중앙대 산업과학대 학장, 한국농업정책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쌀은 주권이다』(2016,콩나물시루), 『농업문명의 전환』(2011,교우사), 『농산물 시장 개방의 정치경제론』(2008,한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