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권 전 한반도유기농배영농조합법인 대표
하얗게 꽃망울을 터뜨린 경기 화성 열린농원의 배꽃을 보니 고려 후기의 문신 이조년이 쓴 시조 ‘다정가’의 한 구절이 저절로 읊조려진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봄 햇살을 길게 받은 배꽃이 하얀 눈송이처럼 눈이 부시다.
혼자 꾸던 꿈, 같이 꾸니 현실이 됐다
20년 전, 김상권 대표(62, 제27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촌발전 부문 수상자)가 귀농할 당시만 해도 유기농 배를 농사짓는 농부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분위기였다. 전문가도 “배는 절대 농약 없이 못 짓는다”고 단정 지었을 만큼, 유기농 과수 재배는 어렵기로 유명했다.
“적성병에 걸린 배나무 잎을 들고 연구기관에 찾아갔어요. ‘이걸 어떻게 치료하면 좋겠습니까’ 물었더니 농약밖에 방법이 없대요. 농약을 쓰지 않겠다고 하니까 저보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저는 분명히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김 대표가 7년의 실패에도 유기농을 포기하지 않은 건, 병든 나무들 사이에서도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은 나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환경에서도 병에 강한 품종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혼자서 연구하기에는 돈도, 시간도 역부족이었다.
“오랫동안 수확을 못 했어요. 그런데 전국에 나같이 ‘바보스러운’ 사람들이 또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전국에서 유기농 배 농사짓는 열몇 명이 처음 만난 날, 우리는 밤새도록 배 이야기만 했어요. 각자 10년씩 고생한 이야기를 나눈 거예요.”
배나무와 고군분투하던 김 대표에게 든든한 동료들이 생겼고, 그렇게 유기농배연구회가 결성되었다. 혼자서는 몇 년이 걸릴 연구를 여럿이 나눠 진행하니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 송장원 박사의 도움도 컸다. 송 박사는 농민들과 꾸준히 협력하고 자문하면서 10여 년의 시간을 함께했다. 송 박사와 함께 흑성병(검은별무늿병)을 해결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농부들과 전문가가 힘을 합친지 5년, 드디어 수확이 되기 시작했다. 절박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이룬 꿈이다.
지역의 건강한 먹거리를 책임지다
유기농 배 생산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새로운 판로가 필요했다. 김 대표는 2012년 한반도유기농배영농조합법인을 설립했고, 경기도 학교 급식 총 물량 400t을 전량 공급한다.(2018년 기준) 농가는 안정적인 판로가 생겨서 좋고, 지역에서는 학생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어 좋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경기도 학교 급식에 납품하려면 1년에 400t 넘는 물량이 필요해요. 경기도에서 수확하는 유기농 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죠. 그래서 지역의 무농약 농가를 키우자고 했습니다. 저농약 농산물 인증제도가 폐지되면서 친환경 농업을 포기하려는 배 농가에 유기농 재배 기술을 공개하자는 거였죠.”
경기도친환경농업인연합회는 당시 김 대표에게 “영농일지를 포함해, 그동안 쌓은 경험치를 모두 지도 할 자신이 있냐?”고 물었고, 그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첫해에는 150t, 다음 해에는 300t, 지금은 400t 넘게 유기농 배를 수확하고 있다.
“탄탄한 판로가 생기니 농가들이 살아나요. 각 지자체에 납품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아직도 유기농 배의 물량이 부족하거든요. 무농약 농가를 키워 세력을 확장해야한다는 것, 처음에는 반대했던 법인 회원들도 이제 모두 인정을 해요.”
여럿이 모이면 나아갈 길이 나온다
김 대표에게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는데, 한반도유기농배영농조합법인의 중앙물류센터를 만들어 전국적인 판매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공동선별을 하면 작업도 수월해지고, 신뢰도도 올릴 수 있다.
“농민은 농사만 짓고, 판매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거죠. 무엇보다도, 체계적인 시스템이 잡히면 함께하려는 유기농 농가도 늘어날 거예요.”
그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배우려는 후배에게는 아낌없이 내어준다. 첫해에는 영농일지를 펴놓고 함께 농사짓고, 다음 해에는 문자로 해야 할 것을 알려준다. 그다음 해에는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자립시킨다. 더불어 그가 후배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연대’다.
배꽃이 피기 전, 김상권 대표가 꽃눈 적화 작업을 하고 있다.
“농업은 혼자 하면 안 돼요. 농민이 혼자 있으면 그건 잘못된 거예요. 단체를 만들고, 교류해야 해요. 여러 명이 모이면 나아갈 길이 나와요. 나 혼자서 농사지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김 대표는 여럿이 상생하는 법을 고민하고,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 그는 최근 신화 품종의 배나무 200주를 새로 심었다. 맛이 달고 껍질이 얇아서, 요즘의 열대과일과 겨룰 수 있는 품종이라고 했다. 김 대표가 농사를 그만 둘 때쯤이나 수확할 수 있다는 배를 심는 이유는 딱 하나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다. 다 같이 잘 먹고 살기 위해, 미래를 심는 것이다.
김 대표는 유기농을 시작하고 가장 뿌듯한 순간을 ‘요즘’이라고 꼽았다. 그는 “꿈꾸던 유기농 배를 생산하게 되었고, 함께하려는 동지는 계속 늘고 있다”며 하얀 배꽃처럼 환히 웃었다. 작은 꽃이 단단한 열매를 맺듯이, 김 대표의 행보가 유기농 배 농가에게 단단한 터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