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타이중시
대만에서 신新타이베이시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사는 타이중시 한복판. 여느 도시처럼 복잡하고 부산한 속에서, 조금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로 뒤덮인 듯한 둥근 건물, 마치 어느 숲에 있던 오래된 저택 하나가 어느 날 주변의 나무들과 함께 날아와 그 자리에 그대로 내려 앉아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컨테이너가 박히듯 돌출된 2층 벽에는 樹合苑(수합원, TreeHope EcoHub)이라 쓰여있다. 한자를 풀면 나무가 모여 동산이 된다는 의미인데, 천멍카이陳孟凱 수합원 대표는 이곳을 “도심 속 음식삼림”이라 소개했다.
도시에서 하는 새로운 실험, 수합원
입구를 지나면 공간 전체가 한눈에 펼쳐진다. 물건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 강의 공간, 체험공간,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공간, 가공장과 발효실, 휴식공간과 카페 등 각각 공간은 구분되어 있지만,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유연함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입구와 가까운 강의 구역에 자리를 잡자, 천 대표는 화장실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물이 아닌 톱밥을 사용하는 생태화장실입니다. 변기통이 차면 그대로 6개월을 발효시켜 퇴비로 사용하죠. 지금 세 칸 중 두 칸이 발효 중이라 한 칸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바나나, 파파야, 커피나무 등 다양한 식물이 사는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위로 다섯 개의 저장 탱크에 빗물을 받아 사용한다. 2층 카페 옆 멋스러운 휴식 공간은 재활용품으로 꾸며져 있다. 옛날 여행가방으로 만든 티테이블, 문짝을 개조한 탁자 등 소품의 종류도 다양하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왜 이런 일을 할까, 천 대표는 “도시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내심을 갖고 접근하도록 자세히 설명한다”고 덧붙였다.
도시와 농촌을 잇는 ‘농식대사’
수합원은 먹거리 인재를 키우는 일종의 학교다. 소비자 대상으로 식농교육, 견학, 체험, 가이드 투어를 진행하며, 5개의 전문가 양성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콩, 커피, 채소, 곡물, 유제품 등 다섯가지 분야 단계별 프로그램이 있는데, 최상위에 있는 직인職人과정을 마친 이들을 ‘농식대사農食大使’라고 부른다.
“외교사절을 대사라 부르죠. ‘농식대사’는 농민과 소비자를 이어주는 사람입니다. 직업이 있는 도시 사람이 수합원에서 농산물 가공기술을 배워서 대사가 됩니다. 처음에는 본인이 먹기 위해서 시작하죠.그러다가 넉넉히 만들어 주위 사람에게 권하게 되고, 비즈니스로 발전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사는 소농과 연결이 됩니다. 소농은 얼굴을 모르는 소비자에게 농산물을 팔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대사에게는 사회생활에서 만난 친구나 동료 같은 사회적 자본이 있어 소농의 농산물이 소비자에게 갈 수 있게 합니다. 모두가 아는 사람이 되는 친구 경제, 지인 경제인 거죠.”
농사는 재미있어도 농사로 먹고사는 건 다른 문제
농식대사를 키우는 과정은 귀농귀촌의 좋은 모델이 된다. 천 대표는 이 과정에서 단계를 차근차근 밟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대사가 되려면 직업이나 3년은 버틸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경험을 쌓을 시간이 필요하다. 농식대사는 여러 가지를 겸하는데, 그렇다고 재미나 취미가 아니라 각각에 대해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을 뜻한다.
“파머스마켓에서 물건을 사고(1단계) 자원봉사를 하는 것(2단계)까지는 농촌과 낭만적인 관계를 맺는 겁니다. 수합원 학생이 되면서(3단계) 농촌과 현실적인 관계를 맺게 되지요. 농사는 재미있지만 농사지어 먹고사는 건 다른 문제예요. 이런 말을 하면 젊은 사람들은 잘 믿지 않죠.”
무작정 믿는 것이 신뢰는 아니다
음식대사의 마지막 관문인 직인과정(4단계)에 들어서면 펑타이재단이 지원하는 가공장 등 수합원과 협력하는 실천적 장소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는다. 2년 이상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농촌에 정착할 수 있다.
“저는 도시 안에서 유기농으로 사람을 키웁니다. 유기농처럼 느리지만 신뢰를 쌓고 협력하는 사람을 키우는 겁니다. 유기농업에서 중요한 건 좋은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이죠. 사람을 키우는 토양은 커뮤니티이고, 이것이 가능하려면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합니다.”
천 대표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신뢰”라고 말한다. 서로 믿을 수 있다면 상당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무작정 믿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쌓기 위한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 2017년 부터 직인과정을 열어 겸업형 스타트업 식농전문가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현재 많은 기관과 교류와 협업, 취업 등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협력을 시작한 건 아닙니다. 예전부터 꾸준히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에 현재의 강력한 협력이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 과정을 ‘사람을 심는다’고 합니다.”
수합원은 국가의 지원이 아니라 학생들의 교육비로 운영되며, 영업관리, 시간관리, 협업관리, 커뮤니티 운영관리 등 단순한 기술교육을 넘어선 다양하고 체계적인, 비즈니스 교육을 한다.
“대만 정부도 귀농귀촌을 지원하지만, 단순한 지원만으로 사람을 남게 할 수 없어요. 대사들이 농촌, 농민과 관계를 맺고 (본래 직업과 별개로) 가공으로 경제력을 확보하게 되면 점차 농촌으로 이주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죠.”
농민시장 소비자로 첫발, 먹거리 전문가가 된다
수합원의 뿌리는 농부시장이다. 천 대표는 2007년 ‘호프농업시장(合樸農學市集, Hepu Agriculture Market)’이라는 이름으로 대만 최초로 월 1회, 정기적인 농민시장을 연 후 3년간 열심히 활동하며 단골 소비자와 지지자들을 키웠다. 자원봉사자가 된 소비자들과 커뮤니티를 만들고 커뮤니티 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2010년부터다.
“처음엔 호기심과 흥미를 갖고 찾아왔어요. 와서 보니 마트에서 농산물을 사는 것과는 다른 일인 거죠. 다음에는 친구들을 데리고 오고, 그러다가 자원봉사자로, 결국 이곳 수합원까지 오게 되는 겁니다.”
커뮤니티 화폐로 단단해지는 ‘친구 경제’
수합원에는 특별한 ‘화폐’가 있다. 지구 또는 양배추가 그려진 명함같이 생긴 커뮤니티 화폐는 파머스마켓과 수합원이 발급하는데, 개수에 따라 금액이 정해진다. 파머스마켓이 열릴 때마다 약 6만TWD(약 250만 원)가 유통되는데, 농민의 파머스마켓 참가비나 자원봉사자 수고료를 이 화폐로 지급한다. 이 화폐는 수합원에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물건을 살 때, 그리고 프로그램 수강료를 낼때도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유효기간은 3개월, 기간이 지나면 사용할 수 없기에 자연스럽게 커뮤니티 경제가 활성화 된다. 화폐가 이동할 때마다 뒷장에 받는 사람 서명을 하고 그날부터 유효기간이 다시 설정된다.
“사용할 때마다 관계를 확인할 수 있죠. 돈을 쓸 때는 대상이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이걸 받을 때는 ‘이걸 어떻게 알았어요?’ 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죠. 사람 사이의 신뢰 관계를 쌓는 방법입니다.”
커뮤니티 화폐가 사용된 지 10년, 내부에서 자원을 유통하면서 독립적인 경제를 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천 대표는 강조했다. 화폐가 돌고 돌수록 커뮤니티는 탄탄해지고 얼굴을 아는 ‘지인 경제’는 더욱 활발해진다. 이러한 커뮤니티 화폐의 속성은 요즈음 ‘재난소득’으로 대두되는 지역 화폐의 역할과 가능성을 가늠하게 한다.
신뢰는 무작정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아는 것’으로 시작해 맥락과 관계를 확인하며 단단해지고 커진다. 농農과 식食의 연대도 그렇게 시작할 때다.
글·사진 신수경 편집장
수합원: https://www.treehope.net/